3·1절 100주년인 지난 3월 1일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3·1독립선언기념탑 앞에서 열린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 행사. ⓒphoto 뉴시스
3·1절 100주년인 지난 3월 1일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3·1독립선언기념탑 앞에서 열린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 행사. ⓒphoto 뉴시스

서울 서대문에 있는 높이 14.28m, 너비 11.48m 크기의 독립문은 구한말 자주독립의 의지를 모아 세운 기념물이다. 이 문이 있는 독립공원에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순국선열추념탑, 3·1독립선언기념탑 등도 있어 일제강점기 역사의 산 교육 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공원 내 다른 시설물들과 달리 독립문은 반일(反日)이 아니라 반중(反中)의 산물이다.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독립문의 건립을 주도한 것은 서재필이 이끈 독립협회였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10여년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서재필은 1895년 12월 귀국하여 다음해 4월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는데, 그 첫 사업이 영은문(迎恩門) 철거와 독립문 건립이었다. ‘은혜를 맞이하는 문’이라는 뜻의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중화를 흠모하는 집)의 정문으로 1407년(태종 7년) 명(明)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세워졌다. 독립문은 1년간의 공사를 거쳐 1897년 11월 완공되었는데, 총 공사비 3825원은 국민 성금으로 조달되었다. 사적 제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의 앞에는 사적 제33호인 영은문의 주초(柱礎) 두 개가 남아 있다. 32호는 독립자강의 상징이고, 33호는 사대외교의 표상이다.

이제껏 우리는 자주독립국이었던 조선이 일본의 부당한 침략으로 식민지가 되었다고 배웠다. 그러나 조선은 온전한 독립국이 아니었다. 최초의 불평등조약으로 1876년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조약의 제1조는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듬해 중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는데 제1조가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였다. 일본은 왜 이토록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하려고 했을까? 중국의 속국(屬國)이 아니라는 것을 국제적으로 확인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자신들이 조선을 건드릴 수 있는 명분이 확보된다고 본 것이다.

일본인 자객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년 10월)과 고종이 일본의 핍박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1896년 2월) 직후에 영은문은 철거되었다. 일본의 침탈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중국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이 필요했던 것이다. 독립문이 완공되기 한 달 전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 위치)에 올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바꾸고 독립국가임을 선포하는 광무(光武)개혁을 단행하였다. 왕에서 황제로, 전하에서 폐하로의 명칭 변경은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이라는 중화질서 속 동이(東夷)의 신분에서 벗어나겠다는 자주의지의 표출이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되는 1919년의 외침이 대일(對日) 독립선언이었다면, 1897년의 광무개혁과 독립문 건립은 대중(對中) 독립선언이었다. 그러나 대중 독립을 통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10년의 한일병탄으로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냉엄한 국제정치 용어로 표현하자면, 중국의 속국이었던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처지가 바뀌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곳곳에서 역사 되짚어보기가 성행 중이다. 예외 없이 모든 기획은 반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통령에 의해 친일청산은 주요 국정과제로 부상하였다. 그런데 독립문 이야기는 전혀 들려오지 않는다.

2017년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자신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실질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하더라”고 했다. 중국 지도자들은 전통적으로 이러한 인식을 가져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존경한다고 했던 마오쩌둥은 조선을 중국의 식민지라 칭했다.(에드가 스노 ‘중국의 붉은 별’) ‘한국은 중국의 속국’ 발언은 ‘독도는 일본 땅’보다 몇 곱절 강도가 센 발언임에도 정부는 ‘차분하게’ 대응하였다.

여권 인사들은 한발 더 나아갔다. 2017년 10월 노영민 주중 대사(현 대통령 비서실장)는 시진핑 주석이 참석한 신임장 제정식 방명록에 ‘만절필동 공창미래(萬折必東 共創未來)’라고 썼다. 만절필동은 황하가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사물이나 현상이 아무리 요동을 쳐도 결국은 순리대로 흘러간다는 것을 나타내지만,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개혁군주 정조가 1796년 음력 3월에 지은 시는 ‘만절필동(萬折必東) 그 정성 힘써 좇아나가리(萬折餘誠志事遵)’로 마무리된다. 만절필동은 황하가 1만 번 휘어도 동쪽으로 흐르듯,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나라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이날 정조는 문무백관을 이끌고 창덕궁 후원 최북단에 있는 명나라 황제 제단인 ‘대보단(大報壇)’에서 제사를 올렸다. 노론 지도자 송시열은 “내가 살던 화양동에 명 황제를 모실 만동묘(萬東廟)를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만동은 만절필동에서 온 말이다. 사대부들은 “황제 은총에 조선이 살아 있으니!”라면서 제사를 올렸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지난해 12월 미국 의회를 방문해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에게 만절필동이라고 쓴 친필 휘호를 선물했다. 만절필동에 얽힌 역사적 사연을 모르고 준 것이겠지만, 한 편의 블랙코미디였다.

온전한 역사인식은 불편한 진실과도 마주한다. 반일만 알고 반중은 모르는 외눈박이 역사인식, 친중의 흔적은 외면하고 친일만 현미경 조사하려는 편협한 자세는 중국발 미세먼지에 대한 무기력한 대응을 낳을 뿐이다.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은 과거의 ‘조공(朝貢) 외교’로 돌아가고 있다. 시진핑은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특사를 두 차례나 하석(下席)에 앉혔다. 홍콩·마카오 행정장관이나 지방서기가 시 주석에게 보고하는 자리였다. 문 대통령의 혼밥 논란이 발생한 곳도 베이징이다.

진보를 표방하는 현 집권세력은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비판한다. 반면 중국에 대해서는 침묵 또는 차분한 대응으로 일관한다. 반(反)해양, 친(親)대륙이 이들의 기본 스탠스다. 어떤 여권인사는 공공연히 한국이 대륙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5000년 역사에서 한국이 중국보다 앞섰던 기간은 중국, 러시아 등 사회주의 대륙세력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미국, 일본, 서유럽 등 자유주의 해양세력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기간이었다. 해양세력과의 교류협력을 한 단계 강화하면서 대륙세력과의 새로운 관계를 개척해가는 것이 정도(正道)일진대 이 정권은 거꾸로 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애국자가 되기 가장 쉬운 길은 일본 때리기에 앞장서는 것이다. 정부와 공영방송이 주도하는 관제 반일 캠페인은 최소한의 균형감각조차 상실하였다. 값싼 반일에 중독된 광란의 칼춤이 몰고 올 결과는 국민 분열과 외교적 고립일 뿐이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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