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일 자정 도쿄 롯폰기에 모여든 시민들이 ‘레이와’ 연호 앞에서 레이와시대 개막을 축하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5월 1일 자정 도쿄 롯폰기에 모여든 시민들이 ‘레이와’ 연호 앞에서 레이와시대 개막을 축하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옆 나라 일본이 새 시대를 열었다. 31년간의 헤이세이(平成)시대가 막을 내리고 레이와(令和)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일본 열도는 새로운 연호(年號)에 환호하고 있다. 레이와시대 첫 국빈으로 일본을 방문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스모 관람과 이자카야 만찬 등으로 아베 총리와의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내년에는 하계올림픽이 도쿄에서 열린다. 1964년 도쿄올림픽이 전후 고도성장의 기폭제였듯이, 내년 올림픽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일본 전역에 넘쳐흐른다.

그런데 레이와시대의 출범을 바라보는 한국의 시선에는 경계심이 가득하다. ‘레이(令)’는 지시 또는 명령의 의미이고, ‘와(和)’라는 글자는 태평양전쟁의 장본인인 히로히토(裕仁)의 연호 ‘쇼와(昭和)’에서 따온 것이므로 과거의 군국주의를 미화하고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변신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최근의 초계기 사건, 3·1운동 100주년 등 상황적 요인과 맞물려 그럴듯한 시나리오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국적 인식일 뿐이다.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이 5월 3일 헌법기념일을 앞두고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평화헌법 9조(전쟁 및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하고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내용)에 대해 ‘바꾸지 않는 편이 좋다’는 의견이 64%, ‘바꾸는 편이 좋다’는 의견이 28% 나왔다. 아베가 3연임에 성공한 것은 국민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인데, 평화헌법 개정에 대해서는 부정적 여론이 압도적이다. 요컨대 ‘아베노믹스 OK, 헌법개정 NO’가 대다수 일본인들의 스탠스다. 현재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 자민당을 주축으로 한 개헌 세력이 개헌 발의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 의석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쉽사리 추진을 못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우리가 진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따로 있다. 레이와시대의 개막은 ‘헤이세이 불황’의 종료를 의미한다. 1989년에 시작된 헤이세이시대는 1990년대 초 버블 붕괴와 1999년 디플레이션 진입으로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으로 점철되었다. 2012년 말 재집권한 아베는 디플레이션 탈출을 외치면서 경기부양에 총력을 기울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일본 후생노동성과 문부과학성이 국공립대 24곳과 사립대 38곳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올 초 졸업한 취업 희망자 43만6700명 중 42만6000명이 일자리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97.6%가 구직에 성공한 것으로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라 할 수 있다.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취업률은 전년 동기 대비 0.1%포인트 오른 98.2%로 집계돼, 9년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 수치는 버블경제가 남아 있던 1991년 봄 이후 최고 수준이다. 구직자들이 골라서 기업에 취업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공무원 시험 응시자는 감소하고 있다. 일본 인사원에 따르면 2019년 국가공무원채용시험(대졸 일반직) 응시자는 총 2만9893명으로 작년보다 11% 줄어들며 3년 연속 감소세를 보였다. 응시자가 3만명을 넘지 못한 것도 현 시험제도가 시행된 지 1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필자는 1990년대 일본에서 유학하였는데, 당시 공산당 선거 벽보에 ‘청년에게 일자리를’이라는 슬로건이 적혀 있었다. 공산당조차 청년 일자리를 염려할 정도로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였다. 격세지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자리 정부’를 표방한 한국의 고용 현실은 어떠한가? 지난 4월 실업자 수는 124만5000명으로 1년 전보다 8만4000명(7.2%) 증가했다. 4월 기준 통계가 존재하는 2000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실업률 역시 4.4%로 2000년 4월(4.5%) 이후 가장 높았다. ‘투잡(two job)’ 희망자와 잠재구직자 등을 합한 청년층 체감 실업률은 25.2%로 역대 최고치였다. 청와대는 작년에 비해 취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강조하지만, 그 수치는 휴지 줍기, 지하철 몰카 찾기, 장난감 소독하기 같은 노인 단기 아르바이트를 30만~40만개 급조한 결과다. 이를 빼면 4월 전체 일자리 수는 오히려 16만개 줄어들었다. 산업 현장의 주력인 30~40대 일자리는 무려 28만개가 사라졌고, 괜찮은 일자리라 할 수 있는 제조·금융·유통업에서도 17만개가 증발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편향은 국내 정치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일본의 부정적 측면만을 과잉 인식하는 관제 민족주의는 일본으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조차 원천봉쇄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20년 전 일본이 걸었던 길을 답습하고 있다. 역대 최저 물가와 금리에도 불구하고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는 복합불황의 늪에 빠져 있다. 조동철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은 디플레이션의 위험을 경고하고 나섰다. 지금 한국이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의 불황 탈출기이다. 그러나 문재인표 제이노믹스를 아베노믹스와 비교 검토하면 필시 친일 내지 토착왜구로 난타당할 것이다.

내친김에 한 가지 더 지적하자. 일본은 레이와시대를 맞아 새 지폐를 발행할 계획인데 1만엔권을 상징해온 근대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초상이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로 바뀔 예정이다. 시부사와는 일본 최초 은행인 제일국립은행(현 미즈호은행)을 설립했으며 도쿄가스, 일본철도, 도쿄전력 등 500여개의 기업 경영에 관여한 인물이다. 삼성그룹의 창업자 이병철은 시부사와를 롤모델로 삼았고, 세계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는 “기업의 목적이 부의 창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여라는 것을 이 사람에게서 배웠다”고 극찬하였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한반도 경제침탈의 주역이었다는 문제제기가 잇따르고 있다. 어떻게 그런 인물을 새 지폐의 상징으로 넣을 수 있느냐며 비분강개하는 우국지사들이 많다.

그런데 필자는 시부사와에 얽힌 또 다른 스토리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26세에 일본의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신하가 되었고, 다음 해인 1867년 유럽을 돌아보며 주식회사 제도 등 근대 문명을 익혔다. 그러나 그해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막부가 붕괴하면서 ‘망국의 신하’로 전락했다. 조용히 여생을 살고자 했던 그에게 메이지 정부가 손을 내밀었다. 출신성분이야 어쨌든 새 나라를 꿈꿨다면 동반자가 아닌가? 29세의 시부사와는 대장성(大藏省) 관료로 변신하여 근대 일본 건설에 앞장섰고, 33세에 경영인으로 변신해 ‘일본 경제의 전설’이 되었다.

시부사와가 예외적 케이스였던 것은 아니다. 메이지(明治)유신 세력은 봉건적 막번(幕藩) 체제만 해체시켰을 뿐, 인적 청산은 최소화하였다. 반(反)막부군의 총대장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막부의 육군 총재 가쓰 가이슈와 담판을 벌여 쇼군과 다이묘(大名)의 생존을 보장하고 에도성을 접수하였다. 이후 막부 출신 학자, 외교관, 군인을 대거 등용하였다. 심지어 홋카이도에서 끝까지 저항하였던 해군 제독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외무대신 등으로 중용했다. 메이지유신의 희생자는 3만명 정도였다. 50만〜100만명의 프랑스혁명, 1000만명 이상의 러시아혁명과 비교하면 매우 적은 숫자다. 혁명의 성공 여부는 피의 양과 비례하지 않는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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