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7월 17일~8월 2일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개최된 포츠담회담 모습. ⓒphoto 월드피스 자유연합
1945년 7월 17일~8월 2일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개최된 포츠담회담 모습. ⓒphoto 월드피스 자유연합

올해도 어김없이 8월이 왔다. 8월의 중심에는 8·15가 있다. 8·15는 일본 군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역사적 기념일이다. 여기서 소박한 질문 하나 던져보자. 왜 해방은 8월 15일에 이루어진 것일까? 7월이나 9월이 아니고 8월인 이유는 무엇인가?

해방의 타이밍을 결정한 것은 두 발의 원자폭탄이었다.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일본의 항전의지를 소멸시켰다. 일본은 8월 10일 천황제 존속을 조건으로 항복의사를 표명했다. 8월 13일 연합국 측은 천황제의 존속을 수용하면서 1)천황과 일본 정부의 통치대권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지휘 아래 둘 것, 2)천황은 일본 정부와 일본 군대 본영에 항복조항 서명의 권한을 줄 것, 3)천황은 모든 일본 군대에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무기를 인도하며 항복조항 실시를 위해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요구에 따르도록 명령할 것을 통고했다. 일본은 다음 날인 14일 오후 11시 모든 조건을 수용한다고 밝혔다. 8월 15일이라는 날짜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한 것이다. 이 소식은 포츠담회담에 참석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원자폭탄 개발은 1939년 8월 2일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미국이 독일보다 앞서 원자탄을 제조해야 한다고 권유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의 출발이었다. 과학기술자 4500여명이 매달렸고 200억달러가 넘는 천문학적 비용이 투입됐다.

이처럼 원자폭탄은 한반도의 운명과 직결돼 있었다. 만일 미국이 원자폭탄을 두어 달 앞서 완성했다면, 소련군이 대일 참전 준비(독일은 1945년 5월 8일 항복.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독일 항복 후 3개월 내 대일 참전 약속)를 마치기 전에 전쟁은 끝나고 미국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했을 것이다. 반대로 원자폭탄의 완성이 수개월 더 늦었더라면, 한반도는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이다.

8월 15일은 원자폭탄이 만들어낸 날짜이었기에 한국인들에게 해방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김구는 일제의 항복 소식을 접하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라고 개탄을 하였다. 임시정부가 꿈에 그리던 해방군의 국내 진입작전이 일제의 항복으로 무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해방된 조국에서의 권리 주장이 여의치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비단 김구만의 반응이 아니었다. 함석헌은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했고, 남로당의 우두머리 박헌영은 “대중적 반전(反戰)투쟁도 이루지 못한 채로 8월 15일,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으로 해방을 맞이하였다”고 아쉬워했다. 386의 정신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리영희는 “해방의 소식을 듣고도 어쩔 줄 모르고 엉거주춤할 뿐이었다. 해방이 실감되지 않았다”고 회고하였다. 1942년 6월부터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이 머지않았다”고 역설했던 이승만은 10월 16일 미국에서 귀국하였고, 소위 ‘빨치산 영웅’ 김일성이 평양에 나타난 것은 10월 14일이었다. 한반도의 그 어느 누구도 8·15를 주체적으로 맞이하지 못하였다. 해방은 ‘느닷없이’ 다가왔다.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항복 선언이 있었음에도 그날 오후는 의외로 조용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해방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구성해 민첩하게 활동한 여운형은 예외라고 주장한다. 여운형은 8월 16일 정오 휘문중학교에 모인 5000여 군중 앞에서 해방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며 건준이 조직되었음을 공표한다. 이날 전국의 형무소에서는 1만여명의 정치범이 석방되었다. 그런데 여운형의 발 빠른 행보는 사실 조선총독부와의 합작품이었다. 마지막 조선총독이었던 육군대장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8월 11일 항복 교섭 소식을 듣고 서류소각을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점령사령관인 미국의 하지 중장이 올 때까지의 응급조치를 강구했다. 핵심은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였다.

8월 11일부터 13일까지 조선총독부는 송진우에게 치안유지 협력을 설득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 대안으로 접촉한 것이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8월 14일 초저녁 일본 천황이 다음 날 항복 선언을 할 것이라는 정보를 접하였고, 15일 아침 8시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의 관저에서 회동을 가졌다. 그는 모든 정치범 석방, 3개월분 식량 제공, 치안유지와 건설 사업에 대한 불간섭 등의 조건으로 치안유지 협력(현존 통치기구의 유지 및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을 약속한다. 건준은 그날 밤 급조되었다. 여운형은 송진우에게 제휴를 타진했으나, 거절당했다.

16일 엔도는 여운형에게 미군은 부산-목포 라인 이하 지역만을 점령할 것이며, 나머지 지역은 소련군이 점령할 것이라고 전했다. 훗날 잘못된 정보로 판명되었지만, 이 한마디는 여운형의 정치행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여운형은 박헌영과 손잡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다. 김성수와 송진우가 이끈 한국민주당은 9월 8일 발기인 성명에서 여운형을 “정무총감, 경기도 경찰부장으로부터 치안유지의 협력 위촉을 받고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나선 일본제국의 주구”라고 비난하였다. 여운형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한국민주당은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이 모든 정황은 해방이 곧 독립으로 이어지기 힘들었음을 보여준다. 35년의 식민 피지배라는 질곡은 미·소 분할점령이라는 새로운 시련으로 이어졌다. 건준은 8월 28일자 선언문에서 “일시적으로 국제 세력이 우리들을 지배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도와줄지언정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다”고 했다. 반대 측에 있었던 한국민주당도 “한국은 군정 단계의 훈정기(訓政期)를 갖지 않으면 치안을 유지할 수 없으며, 또한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피할 수 없다”는 정세인식을 피력하였다. 좌우 공히 독립이 바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시인한 것이다. 자력으로 쟁취한 해방이 아니었다는 주체적 요인에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라는 운명적 요인이 복합 작용하여 나타난 불운이었다.

38선은 8월 10일 밤 미 육군부 차관보 맥클로이의 방에서 탄생되었다. 실무를 담당한 36세의 본스틸 대령은 애초 지방 행정구역 경계선인 도계(道界)를 생각했으나, 벽에 걸려 있던 것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소형지도뿐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렇게 마련된 38선을 8월 15일 승인하고 소련, 영국, 중국에 통지하였다. 1945년 8월 15일은 38선이 국제적으로 성립된 날이기도 하다.

올 8·15는 관제민족주의의 열풍으로 유난히 뜨거울 전망이다. 그러나 1945년 그날은 조용했다. 해방은 독립이 아니었다. 한국현대사에 대한 성찰은 여기로부터 시작된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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