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호돌이 어린이’ 윤태웅군이 굴렁쇠를 굴리고 있다. ⓒphoto 개막식 동영상 화면 캡처
88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호돌이 어린이’ 윤태웅군이 굴렁쇠를 굴리고 있다. ⓒphoto 개막식 동영상 화면 캡처

벌써 연재 10회. 그런데 이어령, 하면 떠오르는 창조의 트레이드마크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88서울올림픽 ‘굴렁쇠 소년’ 말이다. 사실 그간 몇 번 재촉했다. 굴렁쇠의 숨은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그때마다 그는 “아직 때가 아니여”라며 손사래를 쳐 왔다. 오늘도 ‘굴렁쇠’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내가 말하면 자화자찬이 될 테니 남들이 쓴 글을 읽어보고 그냥 지나갑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2~3회에 걸쳐 해도 시원치 않은 판에 그냥 넘어가자니. 기자는 전에 없이 반발했다. “안 되죠. 요리를 먹는 게 아니라 요리를 만든 주방을 구경하자는 게 ‘창조의 이력서’의 기획 취지잖아요. 어떻게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리셨는지, 무엇을 왜 보여주려고 하셨는지 낱낱이 말씀해주셔야죠.”

그는 대답 대신 ‘어느 노 정객과의 시간여행’이라는 신간을 내밀었다. 얼마 전 작고한 김재순 전 국회의장의 일생을 대담 형식으로 묶은 이 책에는 정치·문화계 비화가 꽤 많이 등장한다. 그중에는 김재순이 ‘새벽’ 편집위원으로 이어령 교수를 모셔오게 된 회고담도 있다. 여기에 88서울올림픽 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선생이 아니면 한 소년의 움직임만으로 어찌 세계인을 감동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고요한 아침의 나라답게 물리적 힘이 아니라 오히려 정적(靜寂)으로 세계를 정복한 위대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전부였다. 솔직히 굴렁쇠 퍼포먼스에 대해서는 이보다 감동적인 평이 많다. 왜 하필 이 책을 내밀었을까.

책에서 눈을 떼자 그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목청이 큰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잖아. 소음이나 폭탄 터지는 소리보다는 정적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세계인들에게 보여주려 했지. 생각해봐요. 굴렁쇠 퍼포먼스 바로 직전,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이념의 벽, 빈부의 벽, 분단의 벽들을 부수는 태권도 공연 장면이 펼쳐지고 그 담들이 모두 무너진 자리에서 새싹이 나요. 그 틈 사이에 잠시 필름이 끊긴 영사막의 공백처럼 텅 빈 공간이 나타나지. 초록색 잔디 위로는 햇빛이 꽂히고 정적이 흐르지. 거기에 하얀 러닝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어린아이 하나가 굴렁쇠를 굴리며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요. 군중이 아니지. 주먹 쥔 어른들의 시위가 아니지. 그건 지구의 모든 사람의 기억과 잃어버린 시간 속에 나타난 생명이에요. 더 이상 설명하면 정적은 깨지고 굴렁쇠는 그냥 자전거 바퀴에 불과해. 너무 눈부셔 잠시 환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순간으로 그 정적을 재현한 것뿐이에요.”

정적의 재현이라. 그래도 부족하다. 이어령 교수는 이 연재 기획단계부터 자화자찬이 될 것을 우려하고 경계했다. “나는 전기문 같은 걸 절대로 쓰지 않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확고하다. 다만 “나처럼 생각하면 누구나 나 같은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며 연재를 시작한 터였다. 이게 딜레마다. 굴렁쇠 소년 퍼포먼스 발상 과정을 털어놓으려면 “내가 말이지~” 하며 세세히 밝혀야 하는데, 그는 그런 얘기가 자화자찬으로 들릴 것을 우려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밝힐 건 밝혀야 한다. 재차 캐물었다. “김영태 시인은 굴렁쇠 소년 퍼포먼스에 대해 종이가 아니라 잔디밭 위에 쓴 ‘일행시(一行詩)’라고 평했더군요.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해내셨나요?”

그는 조금 쑥스러운 듯 답했다. “피에르 레스타니라고, 베니스 비엔날레의 심사위원장을 지낸 저명한 미술평론가 알지? 그 사람도 묻더군. 프랑스에서는 서울올림픽 중계방송을 할 때마다 굴렁쇠 소년 장면이 타이틀로 나왔다고 해요. 그것은 스펙터클한 눈요기를 시켜주는 올림픽 행사가 아니라 그냥 그대로 행위예술이었다는 게 그분의 칭찬이었지. 나는 그게 내 아이디어가 아니라고 했어요. 의아해하더군. 나는 ‘내 아이디어가 아니다. 우리 조상님들의 작품이다’라면서 이렇게 말했지. ‘당신들은 캔버스 전체를 꽉 채워서 그림을 그립니다. 그래서 화가의 사인을 그림 위에 하지요.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비단 폭에 선 하나 긋고 매화꽃 몇 송이 그립니다. 일지매(一枝梅)지요. 공백이 많아 그 위에 시도 써넣고 낙관도 여러 개 찍습니다. 나는 옛사람들이 한 대로 한 겁니다. 초록색 잔디 위에 붓이 아니라 굴렁쇠를 굴리는 아이의 움직임으로 그린 것이지요.”

이어령은 자신을 ‘드래곤 킬러’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가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에 간여하기 전에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에는 청룡이 사방에서 등장했다. 한강에서도, 경기장에서도. 이어령이 그것을 전부 없앤 것이다. 용은 중국의 상징이므로 용이 서울올림픽에 등장하면 중국 문화의 모방으로 보일 것이라는 이유다. 부채춤도 마찬가지다. 일본 문화의 아류로 비칠까봐 부채춤도 뺐다. 이 둘을 배제함으로써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알고 있던 동아시아 문화에 한국 문화의 고유성을 널리 알린 것이다.

이어령 교수가 윤태웅군을 안아올려 ‘원’의 의미를 설명해주고 있다. 조선일보 1988년 12월 7일자
이어령 교수가 윤태웅군을 안아올려 ‘원’의 의미를 설명해주고 있다. 조선일보 1988년 12월 7일자

1분짜리 詩

창조의 순간은 시간도 공간도 멈춘다. 그 1분의 굴렁쇠 퍼포먼스처럼 지구가 잠시 멈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정적 속에 함몰하는 순간, 자신의 어리석음, 큰 목청, 큰 정치의 공허함, 사치의 경제가 빈 항아리로 울려오는 것을 듣는다.

1988년 9월 17일 오후 1시10분. 전 세계인의 시선이 대한민국 서울에 쏠려 있었다. 제24회 서울올림픽 개막식이 시작된 지 2시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무용단들의 화려한 군무에 이어 태권도 선수단이 격파 시범을 보이고 퇴장한 후였다.

텅 빈 운동장, 10초간 정적이 흘렀다. 넓디넓은 운동장을 원거리에서 비추는 카메라. 짙푸른 잔디가 돋보였고, 태양의 고도가 정점에 달한 시각의 가을볕은 유독 따사로워 보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삐이~’ 하는 고음의 이명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더니 대각선 끝에서 손톱만 한 흰점이 나타났다. 카메라가 점점 다가가면서 정체를 드러내는 흰점. 소년이었다. 굴렁쇠를 굴리며 운동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뛰어가는 소년. 빨간 챙이 달린 흰 모자에 흰 반소매 티셔츠, 흰 반바지를 입은 꼬마 소년은 무심한 듯 굴렁쇠를 굴린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다다른 꼬마는 멈춰 서더니 굴렁쇠를 어깨에 메고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큰 박수가 터져나왔다. 예측 못한 퍼포먼스에 관객들은 함박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벅찬 감동으로 가슴에 가만히 손을 대는 외국 관중도 있었다.

1분짜리 시(詩)였다. 그 시를 쓴 이가 바로 이어령이다. 이어령은 올림픽 개·폐막식 총괄기획을 맡았다. 화려함 대신 소박함, 채움 대신 비움, 군중 대신 단 한 명의 아이를 내세운 이 장면은 관객들에게 두고두고 감동을 안겼다. 텅 빈 공백에 관객들은 저마다의 감동으로 꽉꽉 채웠다. 김영태 시인은 이 퍼포먼스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어령씨는 그 넓은 운동장에 시를 썼다. 이 ‘정적’이라는 시는 태초의 빛을, 그리고 벽을 넘어 화합의 어우러짐에서 잠실벌의 숨죽임으로 남기지 않았던가.”(경향신문 1988년 9월 21일자)

굴렁쇠 소년은 윤태웅. 그는 ‘바덴바덴 소년’으로 불린다. 1981년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차차기 올림픽 개최지를 발표하는 날 태어났기 때문이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세울!(seoul)”이라고 외친 그 벅찬 순간 말이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짜리 꼬마였던 윤태웅군은 어느덧 30대 중반이 됐다. 그는 연극배우로 활동 중이다. 연극 ‘19 그리고 80’에 주연으로 발탁돼 박정자씨와 함께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굴렁쇠 소년은 꼭 그날 태어난 아이여야 했어요. 운이 좋았지. 윤태웅군이 참 끌밋하잖아. 중산층 가정에서 볼이 오동통한 아이로 잘 자라줬지. 당시 굴렁쇠 굴리는 연습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평창동 우리 집 마당에서 시켰어요. 우리는 어렸을 때 굴렁쇠를 많이 굴리고 놀았는데, 윤군은 한 번도 굴려본 적이 없더라고. 나를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잘 따랐어요. 그런데 사실 좀 나는 억울했어. 50대 중반이니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나이는 아니었거든.(웃음)”

윤태웅씨는 매년 이어령 교수에게 ‘이어령 할아버지께’로 시작하는 손편지를 써서 보냈다. 편지는 성인이 된 후에도 이어졌다. 이어령은 윤태웅씨의 손편지들을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전쟁고아의 이미지 깨고 싶었다

한낮은 존재의 절정이다. 그림자가 사라지는 시간. 짙푸른 잔디에 햇볕이 꽉 찬다. 사람들로 떠들썩했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햇볕이 텅 비면 보인다. 그때 사마란치가 ‘서울’이라고 외친 그 순간에 태어난 아이가 등장한다. 그때부터 8년간 우리는 고층빌딩도 짓고, 놀라운 경제발전도 했지만 이어령이 보여주려 했던 건 운동장도, 시설도 아니었다. 바로 그 8년 동안 한국의 아이가 이렇게 잘 자랐다는 걸 생명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어두웠다. 한국, 하면 전쟁고아와 분단국 이미지를 떠올리는 외국인이 대다수였다. 퓰리처상 수상작의 단골 소재는 한국의 전쟁고아였고, 한국은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나라로 인식됐다. 이어령은 이런 외국인의 편견을 프랑스에서 직접 겪었다. 1970년대 초반의 일이다. 크리스마스 즈음, ‘이들에게는 노엘(Noel)이 없다’는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었는데, 그 포스터 사진에 땟국물 흐르는 옷차림을 한 한국 아이들이 있었다. “굉장한 충격이었지. 올림픽 개막식을 기획하면서 한국, 하면 떠오르는 전쟁고아의 이미지를 깨부수고 싶었어요. 그 편견을 일순간에 날려버리려면 강렬한 장면이 필요했지.”

그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생명이었다. 순진무구한 생명의 존귀함, 폐허를 딛고 피어난 기적. “올림픽은 육체의 꽃밭이에요. 영혼이 아닌 육체의 향연이지. 그런 올림픽의 정신을 가지고 생명을 보여주려 했어요” 굴렁쇠는 원이다. ‘동양에서 개최하는 올림픽’을 상징하는 기호로 단 하나의 원만큼 강력한 심벌이 또 있을까. 서양은 직선적 사고가 강하다면, 동양은 원형의 사고가 강하다. 서양은 처음 중간 끝을 선형으로 인식하는 종말론이 지배한다면, 동양은 영원회귀의 철학이 강하다. “굴렁쇠는 원이잖아. 그건 지구이기도 하고, 올림픽 마크의 둥근 원이기도 하고, 한국과 서양 사상이기도 해요. 어린이가 굴렁쇠를 굴리는 건 미래의 지구, 미래의 한국을 돌리는 것을 의미하지.”

굴렁쇠 장면에서 많은 이들이 갑론을박한 부분이 있다. 바로 배경음으로 삽입된 단음의 “삐이~” 소리를 두고서다. 누구는 음향 실수라고 하고, 누구는 효과음이라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후자 쪽이다. 이어령은 이 소리를 ‘정적의 소리’라고 했다. “정오의 정적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텅 빈 정적. 아무 소리도 안 나는 건 침묵이지 정적은 아니거든. 정적은 벙어리가 아니야. 음악을 넣지 말고 아주 높은 헤르츠(hertz)로 단음을 내기로 했지. 소리로 정적을 나타낸 거여. 그 정적 속의 한 아이, 인간 존재 자체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올림픽 사상 전례 없는 콘셉트의 획기적인 기획. 굴렁쇠 소년 기획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을까? 이에 대해 묻자 그는 웃음기를 싹 거두고 말했다. “왜 없었겠어? 많았지. 처음에도 많았지만 뒤로 갈수록 반대가 격해졌어요. 반대하는 이유도 다양했지. 어린아이를 올림픽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비판도 있었고, ‘돌발변수가 생기면 어떻게 할 거냐?’는 우려가 컸어요. 굴렁쇠를 굴리고 가다가 ‘엄마!’ 하고 도중에 가버리면 어떻게 하냐, 가다가 오줌이라도 싸면 어떻게 하냐 등. 이게 한국의 고질병이에요. 하지는 않고 남이 뭘 하면 끌어내리는 기질. 내가 전권이 있었으니까 강력하게 밀어붙였지, 안 그랬으면 힘들었을 거여.”

윤태웅군이 이어령 교수에게 보낸 성탄절 카드. ⓒphoto 이어령저작권보존위원회
윤태웅군이 이어령 교수에게 보낸 성탄절 카드. ⓒphoto 이어령저작권보존위원회

꼬마 이어령의 눈물

이어령이 올림픽 개막식에 쏟은 세심함은 놀랍다. 굴렁쇠 소년이 홀연히 사라진 후 등장하는 어린이들의 의상이 생각나시는지. 샛노란 옷을 입고 우르르 나와서 ‘야! 놀자~’의 콘셉트로 해맑게 뛰어들어오는 장면이다. 이 장면의 의상은 세 번이나 다시 제작됐다. 이어령이 “이 색은 아니다” “저 색도 아니다”라며 다시 만들라고 했기 때문. 그는 “칙칙한 노란색이어서는 안 돼. 샛노란색이어야 했지”라고 말했다. 굴렁쇠 소년 TV 중계 장면 역시 이어령의 세심함이 녹아들어 있다. 그는 방송팀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대접을 하면서 굴렁쇠 장면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카메라 앵글까지 주문했다. 대각선 원거리에서 시작, 꼬마를 향해 점점 클로즈업하다가 다시 원거리 앵글로 바뀌는 것은 모두 이어령의 주문이었다. 국내 방송국은 물론, 미국 ABC방송국 팀에도 이와 같이 주문했다.

이어령은 인문학자다. 올림픽 개·폐회식 총괄감독은 대개 무대감독이나 영화감독 등이 맡는다. 이어령은 무대감독은커녕 무대연출 비슷한 것 한 번 해본 적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기막힌 장면을 창조해냈을까. 따져 물었더니 그는 “나는 인문학자로서 철학을 가지고 만들었을 뿐이여”라며 또 즉답을 피했다. 사실 굴렁쇠 소년 아이디어는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소환해냈다. 창조의 원천이 되는 강렬한 기억의 한 컷. 그는 우엉차를 서서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시선은 기자를 향했으나 초점은 까마득한 어린 시절을 좇는 듯 흐렸다.

“내가 말야, 어렸을 때 되게 청승맞았나봐. 굴렁쇠를 굴리다가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어요. 예닐곱 살 때의 일로 기억해. 윤태웅군 또래였지. 정오의 햇빛 속에서 좁은 오솔길을 따라서 혼자 굴렁쇠를 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울컥해지더니 눈물이 좌악 흐르더라고. 그 어린아이가 도대체 무엇을 느낀 것일까? 어린아이에게도 영성(靈性)이 있었던 모양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존재의 근원적 슬픔이 아니었을까 싶어.”

올림픽의 굴렁쇠 소년은 이어령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기도 했다. 정오의 햇빛 속에서 까닭 모를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던 꼬마의 감성, 뙤약볕의 정적이 주던 그 강렬한 감성은 기억의 우물 속에 깊이 저장됐고, 그 감성들은 창조적 영감의 질료가 되었다.

며칠 후 그는 인터뷰 후기를 보내왔다. 마지막에 실어줬으면 좋겠다는 요청과 함께.

“창조 뒤에는 늘 외로움과 정적, 그리고 암흑이 온다. 한밤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어둠이 있다. 딱 한 번밖에는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벤트는 아름답고 절실하다. 사람들은 일회성 행사에 왜 그 많은 돈을 낭비하느냐고 묻는다. 이 물질주의자들에게 반문하고 싶다. 당신이 태어날 때, 죽을 때에도 한순간이다. 되풀이되지 않는 시간이요 다시 점유할 수 없는 공간이다. 그것을 위해 당신은 전 생애를 바치고 있지 않은가.”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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