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학계 ‘톈안먼사태=민주화운동’ 부정적 시각도
중·일관계 악화 속 ‘大中華’ 외치는 민족주의 시위 늘어
1989년 6·4 톈안먼사태 때 자오쯔양 공산당 총서기(왼쪽)가 학생 시위대를 직접 찾아가 시위 자제를 촉구하고 있다. 자오쯔양의 오른쪽이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이던 원자바오 현 총리다.
1989년 6·4 톈안먼사태 때 자오쯔양 공산당 총서기(왼쪽)가 학생 시위대를 직접 찾아가 시위 자제를 촉구하고 있다. 자오쯔양의 오른쪽이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이던 원자바오 현 총리다.

“노벨평화상을 톈안먼(天安門) 희생자에게 돌린다.” 중국의 반체제 운동가 류샤오보(劉曉波)가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그의 아내이자 정치적 동지인 류샤(劉霞)를 통해 전달한 말이다.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연이은 ‘정치체제개혁’ 발언으로 중국의 정치 지형이 요동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지난 10월 18일 시진핑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하고 폐막된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17기5중전회)에서도 ‘정치체제개혁’이 논의된 것으로 알려진다.

시진핑의 중앙군사위 부주석 입성에 초점을 맞춘 한국 언론과 달리, 중국 언론들이 17기5중전회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공평정의’ ‘축소빈부’ 같은 정치적 화두였다. 후진타오 국가주석도 17기5중전회에서 채택한 12차5개년(12·5) 계획 기조로 ‘포용성 성장’을 제시했다. 중국 현지 언론과 네티즌들도 ‘공평정의’ 같은 화제로 분주하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사회’ 발언 이후 이어진 정치적 움직임과 흡사하다.

류샤오보의 발언 직후 1989년 톈안먼사태 관련자들도 최근 정치적 흐름과 맞물려 다시 조명받고 있다. 톈안먼사태란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대학생이 중심이 된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들고일어난 시위를 당국이 계엄군을 동원해 유혈진압한 사건을 말한다.

웨이징성, 민주화 운동 대부

반체제 인사들은 중국에서 ‘이견(異見)인사’로 불린다. ‘다른 견해를 가진 인사’란 뜻이다. 이들은 주로 1989년 6·4 톈안먼사태에 연루된 인물들이다. 700명이 사망(추정)한 6·4사태 직후 이들은 대거 대만과 미국, 유럽 등으로 이주했다. 이들 해외 민주화세력들은 지금도 ‘평반육사(平反六四, 6·4 재평가)’란 기치를 내걸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국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웨이징성(魏京生)’은 반체제 인사의 대표격이다.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 전에는 가장 강력한 수상후보로 줄곧 거론돼왔다. 웨이징성은 1976년 제1차 톈안먼사태 직후 ‘제5의 현대화(민주주의)’란 개념을 주창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베이징 동물원의 전기공으로 일하던 웨이징성이 ‘민주의 벽’에 써붙인 대자보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웨이징성과 교제 중이던 티베트족 여자친구는 그의 반항 성향에 불을 붙였다.

웨이징성은 지하잡지 ‘탐색’을 통해 베이징 친청(秦城)감옥의 실태를 폭로하는 글을 써 ‘중국의 사하로프’란 명성을 얻었다. 친청감옥은 중국의 대표적 정치범 수용소다. 결국 웨이징성은 1979년 중월(中越)전쟁 때 “베트남에 군사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목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89년 6·4 톈안먼사태 때 문제가 된 것도 웨이징성의 석방문제였다. 웨이징성은 10여년간의 옥살이 끝에 지난 1997년 국외로 추방돼 현재 미국에 망명 중이다.

웨이징성은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 발표 직후 “류샤오보는 반체제 인사의 주류가 아니다”라며 “후자(胡佳)와 가오즈성(高智晟)에게 관심을 가질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류샤오보 외에도 중국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셈이다. 에이즈(AIDS) 인권운동가인 후자와 파룬궁(法輪功·중국 정부가 불법으로 규정한 기공수련단체) 탄압에 항의한 인권변호사 가오즈성은 현재 각각 투옥과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있다.

왕단, 톈안먼사태 지명수배 1호

6·4 톈안먼사태 때 학생시위를 기획하고 주도한 왕단(王丹)의 움직임도 주목된다. 중국 공안 당국은 톈안먼 학생시위가 악화되자 왕단을 지명수배 1호로 검거령을 내렸다. 베이징대 역사학과 1학년생이던 왕단은 톈안먼 학생시위 당시 ‘민주의 여신상’을 톈안먼광장으로 반입해 꺼져가는 시위에 불을 붙였다. 사태 직후 체포돼 감옥에서 7년을 복역하고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왕단은 현재 대만 타이베이의 정치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왕단은 최근 천수이볜(陳水扁) 전 대만 총통의 국무기밀비 횡령사건 때 대만 측으로부터 20만달러가 넘는 지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왕단은 지난 2000년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한국지부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입국하려 했으나 우리 정부에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우려해 비자발급을 거부한 바 있다. 왕단은 지난해 홍콩에서도 입국이 거부됐다.

왕단은 자신의 트위터(@wangdan1989)와 페이스북 등을 통해 꾸준히 자기주장을 펴고 있다. 트위터를 통해 ‘이상주의자, 건설적 정치반대파, 중국의 정치와 생활질서를 다시 재건하길 바라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한 왕단은 “인터넷과 사회변혁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북한의 열병식에 배를 잡고 웃었다” “최근 학생운동은 너무 약화돼 어그러졌다”는 등의 각종 글을 남겼다.

우얼카이시는 대만, 차이링은 미국에

톈안먼사태 당시 지명수배 2호로 지정된 우얼카이시(吾爾開希)도 빼놓을 수 없다. 베이징사범대생이던 우얼카이시는 톈안먼사태 때 왕단과 함께 학생시위를 주도했다. 위구르족인 그의 연설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태 직후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 현재 대만에서 정치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우얼카이시는 지난 6월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며 일본 도쿄에 있는 중국대사관의 담벼락을 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하는 등 여전히 주목을 끌고 있다.

우얼카이시 역시 자신의 트위터(@wuer kaixi)를 통해 중국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의견을 쏟아내고 있다. 트위터를 통해 ‘중국의 떠돌이 이의(다른 뜻)인사’라고 밝힌 우얼카이시는 “류샤(류샤오보의 아내)가 류샤오보의 면회를 다녀온 뒤, 경찰들이 그녀의 집앞에서 출입을 막고 ‘매체를 만나서도 안되고, 친구를 만나서도 안된다’라고 경고했다”며 긴박한 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왕단, 우얼카이시와 함께 톈안먼 학생시위 3인방으로 불린 차이링(柴玲)은 미국에 머물고 있다. 단발머리의 여대생 차이링은 ‘톈안먼의 꽃’ ‘중국의 잔다르크’로 불리며 서방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사태 직후 차이링은 배를 타고 홍콩과 프랑스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에서 하버드대 MBA를 졸업한 차이링은 미국의 컨설팅회사 ‘베인 & 컴퍼니’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다.

미국에서 미국인과 결혼한 차이링은 남편과 함께 ‘젠제이버(Jenzabar)’란 교육용 소프트웨어 기업을 운영 중이다. 현재 세 아이의 엄마인 차이링은 미국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로 살고 있다. 차이링은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미국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류샤오보와 나는 톈안먼에 탱크가 밀려들 때 마지막까지 같이 서있었다”며 “기념비적인 일이며 노벨위원회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차이링은 현재 ‘올 걸스 얼로드(All Girls Allowed)’란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중국의 강제낙태와 여아(女兒) 인권문제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차이링은 지난 10월 12일 미국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중국에서 매일 3500여명의 여아가 강제낙태되고, 500여명의 여성이 자살을 선택한다”며 중국의 여성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4군자 중 류샤오보는 옥중 노벨상 수상

1989년 6·4 톈안먼사태 때 톈안먼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는 ‘톈안먼 4군자’. 왼쪽부터 저우둬, 류샤오보, 허우더젠, 가오신.
1989년 6·4 톈안먼사태 때 톈안먼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는 ‘톈안먼 4군자’. 왼쪽부터 저우둬, 류샤오보, 허우더젠, 가오신.

이밖에 류샤오보를 비롯한 허우더젠(侯德建), 가오신(高新), 저우둬(周舵) 등 이른바 ‘톈안먼 4군자’도 중국과 미국, 대만 등지에 흩어져 있는 상태다. 톈안먼 4군자는 톈안먼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를 점거하고 계엄군에 맞서 단식연좌농성을 주도했다. 또 1989년 6월 4일 유혈진압이 시작되기 전에는 “학생시위대가 물러나면 계엄군도 철수하라”는 조건으로 계엄군 진영을 찾아 목숨을 건 담판을 벌였다.

‘용의전인(용의후예)’이란 곡으로 중화권에서 명성이 높은 허우더젠은 현재 대만에서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 허우더젠은 톈안먼사태 당시 대만에서 베이징으로 올라와 학생시위를 지지하는 공연을 벌였다. 6·4사태 당시 베이징 사범대 강사이자 ‘사대주보(師大週報)’ 편집장을 지낸 가오신과 베이징대 강사 출신으로 6·4사태 당시 쓰통(四通)그룹 종합계획부 부장이던 저우둬는 투옥 후 미국으로 망명해 각각 하버드대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톈안먼사태 당시 이들 반체제 인사들은 홍콩과 대만 등지의 지원을 받아 일명 ‘참새작전(黃雀行動·잠복을 뜻하는 은어)’을 통해 거의 대부분 해외로 망명한 상태다. 현재 이들은 망명 후 연락 자체가 뜸한 것으로 알려졌다. 톈안먼 4군자 가운데 유일하게 베이징에 머물고 있는 저우둬는 지난 2004년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가오신은 미국에, 허우더젠은 대만에, 류샤오보는 감옥에 있어 연락이 힘들다”고 토로한 바 있다.

반면 중국 반체제 인사들이 주로 외국에 머물고 있는 사실은 “중국의 민주화 운동이 중국 현실과 괴리돼 있다”는 한계도 노출 중이다. 더욱이 이들은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운신의 폭이 더 좁아졌다. 중화권 언론은 “베이징에 있는 저우둬가 현재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고 전한다. 류샤오보 역시 노벨평화상 수상에도 불구, 지난 2008년 중국의 체제개혁을 촉구한 ‘08헌장(零八憲章)’발표를 주도한 ‘국가전복기도죄’로 현재 랴오닝(遼寧)성 진저우(錦州)감옥에 수감 중이다.

더욱이 최근 들어 중국 학계에서는 톈안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보는 시각에 부정적 모습도 관찰된다. 오히려 민주화운동이 아닌 부의 분배, 공정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이는 톈안먼사태 때 등장한 ‘민주의 여신상’과 ‘덕선생(德先生·demo cracy)’이란 구호 때문에 ‘톈안먼=민주화’로 보는 서방의 시각과 조금 차이가 있다. 최근 중·일(中日)관계 악화에 따라 민주화가 아닌 ‘대중화(大中華)’를 외치는 민족주의 시위가 부쩍 늘어난 것이 대표적 방증이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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