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은 흥남철수 때 내려온 실향민… 경남고 문과서 두각 경희대 진학
강집돼 특전사 배치, 전두환 여단장상… “군생활 체질에 맞았다”
사법연수원 차석, 홀어머니 모시며 부산서 변호사 개업
‘노무현 그림자 30년’ 자기 목소리 낸 적 없어
지난 5월 21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추모의 집 로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흉상 제막식에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흉상을 배경으로 인사말을 하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지난 5월 21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추모의 집 로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흉상 제막식에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흉상을 배경으로 인사말을 하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그의 이름은 ‘정치인 노무현’이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지 않았다면 대중에 알려질 일이 없었을 것이다. 문재인(文在寅). 성격이나 인생관에 비춰 문재인은 평범하고 성실한 변호사로 개인의 행복을 만끽하는 삶을 누렸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여당 대통령후보 노무현’의 등장으로 그의 모든 인생 스케줄이 하루아침에 달라져버렸다.

2002년 12월 대선 기간부터 2011년 7월 말까지 꼭 10년간 그의 이름 앞에 붙었거나 붙어있는 직함들을 훑어보자. 노무현대통령후보 부산지역선거대책위원장,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시민사회수석비서관, 대통령비서실장,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 노무현 전 대통령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 노무현재단 이사장.

전부 노무현과 관련된 직함들이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막강한 자리에 있었지만 권력 남용으로 구설에 오르거나 크게 주목을 받은 일이 없었다. 언제나 ‘노무현의 그림자’ 역할에 충실했다. 자기 목소리를 낸 적도 거의 없다. 그는 그렇게 노무현 대통령 퇴임과 함께 청와대를 나왔다. 그것으로 그의 역할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또다시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은 전직 대통령 노무현이었다. 전직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자살하면서 그는 운명처럼 스포트라이트의 한복판에 우뚝 서버렸다. 그날 경남 양산 부산대병원에서 그는 차분히 읽어내려갔다.

“대단히 충격적이고 슬픈 일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오늘 오전 9시30분경 이곳 양산 부산대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대통령님께서는 가족들 앞으로 짧은 유서를 남기셨습니다.”

이 장면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TV에 비친 그의 모습은 이해찬·유시민·이기명·박연차·강금원·명계남 등 그간 친노 진영 사람들이 만들어낸 부정적 이미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한 사립대학교 신방과 교수는 지난해 봄 사석에서 문재인 이야기를 꺼냈다. “친노 진영 인사들 중에서 사람이 최소한의 품격이 있고 신뢰가 가는 사람은 문재인 변호사뿐이다. 노 대통령 투신 자살을 발표하면서 보였던 냉철함과 침착함에 그를 다시 보게 됐다.”

일단 그의 드러난 이미지는 좋다. 문재인은 누구인가. 1952년 경남 거제 출생. 경희대 법대 졸업. 사법시험을 거쳐 1982년 당시 부산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만나 함께 일했다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큰 줄기다.

문재인의 인생관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은 지난해 10월 치러진 경남 양산 재보궐선거 때였다. 그가 살고 있는 경남 양산의 한 단독주택 앞에 천막이 세워졌다. 부산지역에서 온 일부 인사들이 그의 집 앞에서 양산 재보궐선거 출마를 요청하며 농성을 벌였다. 그는 일관되게 현실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고, 양산 재보궐선거에도 출마하지 않아 자신의 언약을 지켰다.

내성적 성격으로 상가에도 잘 안 나타나

문재인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그의 정치관(觀)이다. 그는 여러 번 자신은 정치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또 ‘왜 모든 길이 정치로 통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양산 재보궐선거 출마를 압박받을 당시 이렇게 불출마 입장을 지지자들에게 전달했다.

“나는 지금의 내 삶을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게 이렇게 강요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다.”

그는 지난 2월 28일자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이 부분에 대해 또 한번 언급했다. 문재인은, ‘대중적 인기도 높고, 부산시장 출마 권유도 받았다. 차기대선에 나서라는 얘기도 계속 나온다. 정말 끝까지 출마를 안 할 건가’라는 질문을 기자로부터 받고 이렇게 말했다.

“넓게 보면 노무현재단 활동도 정치적이고,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하지만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것은 어려운 결단이 필요하다. 정치를 직업으로 할 경우 생각되는 어려움, 대통령이 말씀하신 고통을 이겨낼 자신감과 배짱, 결기가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게 없다. 논리 이전에 다들 자기 자신을 잘 알지 않나. 정치만 제일 중요한 게 아니다. 누구나 정치를 직업으로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난 4·27 재보궐선거 이후 완고한 입장에 조금씩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대선후보가) ‘짠’ 하고 나타나서야 되겠느냐?”(동아일보 5월 22일자) “혹시 도움이 된다면 피하지 않으려 한다.”(CBS라디오 5월 30일)

수중폭파조 군 경험으로 스킨스쿠버 취미

그는 실향민의 아들이다. 부친은 함경남도 흥남이 고향이다. 지역 명문인 함흥농고를 나왔고 공산 치하에서 흥남시청 농업계장으로 근무하다 6·25전쟁을 맞았다. 부친은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미군 군용함정(LST)에 몸을 실어 자유 대한으로 왔다. 흥남철수는 미군이 퇴각하면서 10만명의 피란민을 구한 세계 전사(戰史)에 유례가 없는 철수작전이다.

피란민을 태운 배는 거제도에 피란민을 부렸다. 부친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노무자로 가족을 먹여살렸다. 문재인은 1952년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이후 부산으로 이사해 영도구 청학동에 터를 잡았다. 북한 땅에 모든 재산을 놓고온 피란살이가 어땠을지는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게 지인들의 일치된 증언이다.

그는 경남고 25회다. 25회 졸업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문과에서는 문재인, 이과에서는 승효상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랬다면 서울대로 진학하는 게 보통이다. 승효상은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해 우리나라 대표 건축가가 되었다. 문재인은 재수 끝에 경희대 법대를 선택했다. 당시 경희대는 4년 장학금을 내걸고 우수학생들을 끌어들였는데 문재인은 학비가 들지 않는 경희대를 선택했다. 그만큼 문재인의 집안이 어려웠다는 뜻이다.

경남고 시절 문재인은 공부는 잘했지만 그렇게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범생이’였다. 내성적인 성격 탓이다. 3학년 때 문재인과 같은 반이었던 옥동훈씨는 월간조선 2011년 7월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한마디로 모범생이고 조용한 친구였습니다. 나중에 대학에 가서 학생운동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설마?’ 싶었을 정도로 정말 조용하고 공부만 하는 친구였습니다. 부산스럽다거나 교우관계가 넓은 편은 아니었고, 늘 같은 친구들하고 다녔습니다. 상당히 내성적이라고 해야 맞죠.”

경희대 시절을 보자. 1972년 경희대 1학년 때 유신헌법이 단행됐다. 그는 대학 시절 총학생회 활동을 했다. 당시 총학생회장은 훗날 28세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강삼재씨였다. 1975년 당시 대학가를 휩쓸던 유신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를 하다 경찰에 붙잡혀 구속된다.

구속과 함께 그는 강제징집된다. 훈련소인 창원39사단을 거쳐 그가 배치된 곳은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 특수전 훈련 당시 폭파 주특기를 부여받았다. 6주간의 특수전 훈련을 마칠 때 정병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폭파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자대 배치 이후 전두환 여단장으로부터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그는 3년간 수중폭파조 대원으로 근무했다.

‘다음카페 젠틀문(gentle moon)’에 보면 1978년 2월에 동료대원들과 찍은 사진 세 장이 올라와 있다. 회고록 ‘운명’에도 군 시절 사진이 실렸다. 문재인은 베레모와 군복이 잘 어울린다. 타고난 직업군인처럼 쾌남형이다. 그는 훗날 사석에서 군생활과 관련해 이런 얘기를 여러 번 털어놓았다. “억지로 끌려간 군대였지만 (군대에서) 잘해서 상도 받고 했다. 군생활이 체질에 잘 맞았다.”

군에서 배운 기술이 직업이 되고 평생 취미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문재인의 취미를 ‘스킨스쿠버’라고 기억하는 것은 군 시절 수중폭파조 경험 때문이다. 문재인은 경남고 졸업 40주년 행사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경남고 동기생들 상사(喪事) 시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스킨스쿠버 동호회 모임에는 열심히 나갔다. 그만큼 20대 초반의 군생활에서 경험한 수중폭파조 훈련이 그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다는 뜻이다.

사람의 성격은 어지간해서 바뀌지 않는다. ‘교우관계가 좁고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은 정치활동에는 부적격이다. 흔히 ‘정치는 사람 장사다’라고 표현되는데, 이 말은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던지는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문재인이 “내가 나를 잘 안다”라고 자주 말해온 것은 자신은 그런 정치활동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의미다.

문재인은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친노 진영은 그런 문재인을 내세우려 안간힘을 쓴다. 왜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을 저토록 띄우려는 것일까.

친노 진영은 대선 패배 후 ‘노무현 아바타’ 찾기에 고심했다. 2012년 대선에서 야권 후보는 ‘노무현 아바타’가 차지해야 한다는 게 친노 진영의 합의다. 처음에는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시민씨였다. 친노 진영은 유씨의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고 그를 띄웠으나 유시민씨 스스로의 한계로 좌초했다.

그 다음 ‘노무현 아바타’의 대안으로 등장한 인물이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다. 문재인은 친노의 스케줄에 따라 최근 회고록 ‘문재인의 운명’을 썼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노무현은 세종을 능가하는 성군(聖君)이다. 문화일보 윤창중 논설실장은 “지금 춥고 배고픈 황위병들에게 노무현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합리적이고 교과서적”, 선출직 경험 없어

사법시험이 그와 노무현을 연결해준 고리였다. 그가 군에서 제대한 게 1979년. 피란민으로 힘겨운 삶을 살았던 부친이 쉰아홉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복학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는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1차에 합격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개막되었고 그는 4학년 2학기로 대학에 복학했다. 그는 전년도에 1차에 합격했기 때문에 사법시험 2차시험을 치렀다. 그해 5월 학생시위에 참가했다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다시 구속된다. 군법회의에 넘겨져 유치장에 구속되어 있던 날 사법시험 합격 소식을 들었다.

1982년 8월 그는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면서 판사를 지망했다. 연수원 성적이 차석이어서 수료식에서 법무부장관상을 받았다. 판사 임용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구속 경력 때문에 막판에 좌절되었다. 변호사가 되자 ‘김&장’을 비롯한 로펌에서 좋은 조건으로 영입을 제의했다. 하지만 그는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실 겸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게 노무현 변호사와 만나게 된 인연이었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1978년부터 부산에서 개업을 하고 있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을 연결해준 사람은 박정규씨(노무현 정부 시절 민정수석 역임)였다. 문재인과 박정규는 사법시험 동기생이었다. 박정규는 사법시험 준비를 할 때 김해 장유암에서 노 변호사와 함께 공부한 인연이 있었다.

노 변호사는 박정규와 사법연수원을 나오면 함께 법률사무소를 운영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박정규는 검사로 임용되자 노 변호사에게 동기생 문재인을 천거했다. 초짜 변호사 문재인은 그렇게 4년차 변호사 노무현을 만났고, 첫 만남에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다음 날 내건 사무실 이름이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였다. 이 인연이 30년째 이어져오고 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의 공통된 평가는 “문재인은 합리적이고 교과서적인 사람”이다. 그는 한번도 선출직에 나가본 일이 없다. 검증받는 자리에 한번도 있어본 적도 없다.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비서실장은 인사청문회의 대상이 아니다. 현실 정치에 밝은 사람들은 바로 이 점 때문에 문재인을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친노 진영에서는 문재인이 마지막 대안이다.

조성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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