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동성혼 부부인 앰버 와이스(왼쪽)와 샤론 파포. 2008년 샌프란시스코 시청에서 결혼증명서를 받은 뒤 찍은 사진이다. ⓒphoto AP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동성혼 부부인 앰버 와이스(왼쪽)와 샤론 파포. 2008년 샌프란시스코 시청에서 결혼증명서를 받은 뒤 찍은 사진이다. ⓒphoto AP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대, 동성(同性)이라도 결혼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같은 생각을 지금 당장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5월 9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동성혼 지지발언이다. 하루 전날 급히 만들어진 백악관 내 인터뷰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동성혼 지지가 공식화된다. 비록 개인적이란 토를 달고 있지만, 미국을 대표하는 공인의 생각이다. 그동안 그 어떤 대통령도 직접 언급하기를 꺼렸던 문제를 오바마가 던진 것이다. 미국 미디어의 표현대로, 미국 최초의 ‘게이(Gay) 대통령’의 탄생이다.

오바마의 동성혼 지지발언은 5월 6일 조셉 바이든 부통령의 TV 인터뷰 내용이 발단이 됐다. “여성과 결혼한 여성, 남성과 결혼한 남성, 이성과 결혼한 사람들 모두가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바이든 부통령이 동성혼을 지지하자, 그러면 오바마 대통령의 동성혼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를 묻는 쪽으로 여론이 관심을 보였다.

미국은 여론으로 움직이는 나라이다. 지지율과 관심사에 대한 조사가 하루도 빠짐없이 시시각각 이뤄진다. 백악관은 촉수를 세우며 국민 생각에 주파수를 맞춘다. 교육담당 비서인 아른 던컨(Arne Duncan)은 바이든의 발언 하루 뒤인 5월 7일, 자신도 동성혼을 지지한다는 발언을 공식화한다. 오바마는 백악관 주인의 생각을 묻는 국민 여론에 휘둘린 상황에서 동성혼 지지발언을 하게 된다. 원래 대통령의 동성혼 지지발언은 여론을 봐가면서 대통령 선거일 직전에 쓸 ‘히든 카드(Hidden Card)’ 중 하나였다. 실언이 잦은 바이든 때문에 너무 일찍 칼을 뽑은 셈이다.

오바마 발언 너무 일찍 터뜨렸나

현재 미국에서 동성혼은 연방 차원의 법에서는 합법이 아니다. 합법이 아니기 때문에 연방법의 혜택과 보호를 받지 못한다. 지방정부에 많은 권한을 일임하는 독특한 미국식 제도 때문에 주 정부가 법으로 의결할 경우 동성혼도 가능하다. 일부 주는 동성혼을 예외적으로 인정한다. 매사추세츠주에 이어 최근 메릴랜드주까지 전부 8개 주가 동성혼을 인정하고 법으로 보호하고 있다. 오바마의 발언은 8개 주만이 아니라 미국 51개 주 전부가 동성혼을 법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오바마 발언 이후 공화당 지지자들로부터의 반발이 거세게 밀어닥쳤다. 크게 볼 때 두 가지 종류의 반발이다. 첫째 대통령이 동성혼을 지지했다는 점과, 둘째 오바마가 대통령 자격으로 ‘공식적’으로 동성혼 지지발언을 했다는 부분이다. 이 중 분노의 목소리가 집중된 곳은 두 번째다. “본인이 알아서 처리하면 될 개인의 결혼 문제에 왜 대통령이 끼어들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느냐?” 부부의 이불 속에까지 들어와 정부의 권한과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이른바 ‘작은 정부론’에 입각한 생각이다.

대부분의 신문 방송은 오바마의 동성혼 지지 발언을 비난하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오바마다운 비전과 정책으로 받아들였다. 미국 미디어의 70% 정도는 친민주당의 리버럴 성향이다. 소수자 차별을 없애는 21세기판 인권선언쯤으로 대통령의 발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동성혼 지지발언은 11월 6일 대통령선거에 ‘다소’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오바마 발언 직후인 5월 10일 이뤄진 갤럽의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자. “오바마의 동성혼 지지발언이 대통령선거에서 오바마를 지지하는 요인이 될 듯한가?” 1013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질문 내용이다. 답은 ‘그렇다’ ‘그렇지 않다’ ‘상관없다’ 세 개로 나눠져 제시됐다. 결론은 ‘그렇다’ 13%, ‘그렇지 않다’ 26%, ‘상관없다’ 60%이다.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미국인의 동성혼 자체에 대한 여론은 ‘동성혼 찬성’이 많다. 미국인의 동성혼에 관한 생각이 찬성 쪽으로 변해가고 있는 건 분명하다. 5월 20일 갤럽이 발표한 동성혼 여론조사 결과는 미국인의 의식구조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이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동성혼 합법에 동의하는 사람이 반대하는 사람을 눌렀다. 101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동성혼 합법화에 대한 찬성이 53%, 반대가 45%였다. 찬성이 44%, 반대가 53%이던 지난해 조사가 뒤집혔다. 찬성이 27%, 반대가 68%이던 1996년에 비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엄청난 의식변화이다. 16년 만에 동성혼 찬성 여론이 전체의 27%에서 53%로 무려 26%포인트가 늘어난 것이다.

동성혼 합법에 찬성하는 사람은 민주당과 무당(無黨)파를 중심으로 급신장했다. 공화당 지지자의 경우 1년 전에 비해 거의 변화가 없다. 역사가 보여주듯, 보수는 잘 변하지 않는다. 리버럴은 이미 변한 것을 더욱 변화시켜나가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낸다. 결과적으로 미국 사회 전반이 동성애자와 동성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길을 터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연령별로 볼 때 젊은 사람의 동성혼 합법화 찬성 비율은 압도적이다. 18세부터 34세까지만을 대상으로 할 때, 응답자의 70%가 동성혼 합법화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10명 중 7명이 지지하는 셈이다. 55세 이상의 응답자 중 39%만이 찬성한 것에 비해 거의 두 배 정도 높다. 젊은이들에게 동성애와 동성혼은 더이상 특별한 사회현상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게이 대통령’ 오바마의 정반대편에 선 인물은 제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이다. 2차 대전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 출신으로, 냉전이 본격화되던 1953년부터 1961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독실한 기독교도로 보수적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아이젠하워가 임기를 마친 해인 1961년에 오바마가 세상에 태어났다.

1945년 이후 동성애 이슈 첫 등장

1953년 6·25전쟁 끝해에 취임한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이름으로 남성동성애자와 여성동성애자의 연방정부 근무 금지 명령을 발포한다. 연방수사국(FBI)이 총동원돼 연방공무원 내 동성애자에 대한 색출에 들어간다. 동성애자 신고기관도 만들어 운영한다. 아이젠하워에 이어 지방정부도 동성애자 색출에 나서 공직에서 쫓아낸다.

동성애는 인류 역사와 함께 이어진, 모두가 입에 올리기를 꺼리는 공공연한 ‘터부’ 중 하나이다. 동성애 문제가 사회·정치적 이슈로 자리 잡은 것은 1945년 이후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숨기고 싶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1953년의 동성애자 추방 캠페인은 전쟁이 끝나면서 갑자기 불기 시작한 동성애 바람을 배경으로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날밤을 새는 전쟁은, 인간에게 남은 극단적 감정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극한으로 몰아가는 전쟁은 남녀 간의 애정만이 아니라 그동안 숨겨진 동성 간의 사랑도 표출시킨다. 모두 입을 다물었지만, 총성으로 가득찬 전쟁터를 배경으로 한 ‘게이’ 문제가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타난 것이다.

전역한 남성동성애자들이 돌아와 대도시 구석에 그들만의 공간을 만든다. 1950년 11월 LA에서 퇴역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동성애 모임이 처음으로 결성된다. 마타차인 소사이어티(Mattachine Society)라는 이름의 단체이다. 마타차인 소사이어티는 르네상스기의 프랑스 예술가나 문화인을 의미하는 말이다. 사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조직된 동성애 단체는 1924년 결성된 ‘인권을 위한 소사이어티(The Society for Human Rights)’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오바마의 정치적 기반인 시카고에서 탄생됐다. 독일계 의사들을 주축으로 한, 지식인 중심의 동성애 단체이다. 하지만 이 단체는 대중적 기반이 없어 오늘날의 동성애 단체들과는 구별된다. 때문에 마타차인 소사이어티가 대중적인 동성애 지지 모임의 효시로 받아들여진다. 아이젠하워의 동성애 추방명령은 마타차인 조직이 서부를 넘어 중부, 동부로 넘어오던 때이다. 마타차인은 남성동성애자에 이어 여성동성애자도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1960년대 종교 이슈로

동성애 운동이 정치적 이슈로 부상한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이다. 흑인 공민권 운동과 함께 부각된 소수자 보호라는 차원에서 시작된다. 동성애 공직자의 추방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처음으로 워싱턴에 나타난다. LA에서는 경찰의 무차별 폭력과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진다. 1969년 6월 27일 발생한 뉴욕 경찰의 동성애자 단체 급습 사건은 TV를 통해 상세히 보도됐고, 이것이 동성애자들의 수난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당시는 물론 현재도 미 동부의 동성애자 성지로 받아들여지는 뉴욕 맨해튼 내 그리니치(Greenwich)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그리니치 사건은 동성애 단체들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전환점이 된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회 문화 현상이 그러하듯, 뉴욕은 미국을 대표하는 맏형에 해당한다. 뉴욕이 움직이면 결국 전역에서 통하게 된다. 뉴욕을 중심으로 남성동성애자·여성동성애자·양성애자·성전환자를 포함한 LGBT(Lesbian·Gay·Bisexual· Transgender의 첫 자를 딴 용어) 단체들이 갑자기 생겨나면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인권 보호라는 차원에서 대학생들이 가담한다. 1970년 5000여명의 LGBT가 뉴욕에서 제1회 동성애 퍼레이드를 벌인다.

그리니치 습격사건 이전에 미국 전역에 있던 동성애 단체 회원은 통틀어 수천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1973년이 되자 동성애 단체는 무려 800여개로 늘어난다. 회원도 십만 명 단위에 육박한다. 보수주의 대통령의 상징인 로널드 레이건의 임기 말이던 1987년, 60만명의 동성애자들이 워싱턴에서 집회를 벌인다. 차별 금지와 평등권 실현을 요구했다.

미국은 청교도의 나라이다. 물론 개신 유대교처럼 종교단체 중 LGBT를 인정하는 곳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절대 반대’이다. LGBT 단체가 폭증하면서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자들의 반대도 거세진다. 정치·사회·문화적 이슈가 아닌, 종교와 인륜을 앞세워 LGBT 단체와 대립한다. 1960년대 인기곡 ‘페이퍼 로즈(Paper Rose)’로 유명한 앨라배마 출신의 여자가수 애니타 브라이언트(Anita Bryant)는 반(反)동성애 캠페인의 선봉에 선다. 1977년부터 시작된 그녀의 ‘성전(聖戰)’에 종교인·정치가·경제인·문화인이 가세한다. 1980년대 들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이 발견되면서 반동성애 운동은 승기를 잡는 듯했다. 동성애자 사이에서 에이즈가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이로 인해 동성애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됐다.

‘동성애 반대’ 표는 공화당 표?

그러나 LGBT는 에이즈 문제를 인권과 연결되는 또 다른 차별적 이슈로 발전시켜 나간다. AIDS 환자에 대한 격리나 차별을 반인권적 행위라고 규탄한다. 2002년 미국인이 사랑하던 배우 록 허드슨이 AIDS로 숨지며 미국민은 충격에 빠진다. 록 허드슨은 공화당의 상징이자 보수주의자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진 인물이다. 결국 역설적으로 AIDS 문제는 동성애자들의 권리와 이미지를 신장시키는 기능을 하게 된다.

1990년대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동성애는 막힐 것이 없는 대세로 자리 잡게 된다. 보수주의자들의 완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운동은 글로벌리즘의 선두에 선, 지극히 미국적인 첨단 문화로 자리 잡는다. 21세기 초는 커밍아웃으로 불리는 동성애 고백이 과거의 유물로 전락한 시기이다. 색다르거나 차별의 대상이 되는 특별한 존재로서의 동성애가 아니다. 흔히 볼 수 있고, 문화의 일부로 일상 속에 정착됐다. 죄를 지은 것처럼 고백하는 커밍아웃은 구시대의 전설이 되었다.

동성애 운동의 출발점이 된 군대 내 동성애 문제도 2010년 전기를 마련한다. 군대 내 동성애가 합법화된다. 1993년까지 미 국방부는 동성애자의 경우 강제 전역을 의무화했다. 당시 군대 내에는 전체 병력의 적어도 10% 이상이 동성애자로 추정됐다. 엄격하게 규정을 적용하면 10% 이상의 군인이 병영을 떠나야 한다. 때문에 군대 내 동성애 문제는 묵인되어 왔다. 고민 끝에 클린턴 행정부가 내놓은 현실 방안이 이른바 ‘묻지도 말고 답도 안 한다(Don’t ask, Don’t tell·DADT)’이다. 군당국은 군인의 성적 취향을 따져묻지 않고, 묻는다고 해도 장병은 그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다는 방식이었다. 클린턴이 퇴임하고, 이후 보수 색깔의 부시 행정부가 끝난 뒤 등장한 또 다른 민주당 행정부는 DADT 자체를 불필요한 편법이라고 규정한다. 오바마는 2008년 대통령 선거유세 때 DADT를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결국 미군은 동성애자라고 해도 군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됐다.

오바마의 이번 동성혼 지지발언은 선거전략상 중대한 실책처럼 보인다. 실업자가 늘어나고 각종 경제지표가 하향길에 들어서는 과정에서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분석이 많다. 그렇지만 동성혼과 동성애에 대한 미국의 지지 여론이 확산돼온 역사를 감안하면 동성혼 지지는 정치적으로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설령 잘못된 방향이라 하더라도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오바마의 동성혼 지지 발언은 퇴임 후라도 살아있는 동안 빛을 볼 ‘전설’로 남게 될 것이다. 1950년대부터 본격화된 동성애 운동의 역사를 보면 오바마의 동성혼 지지발언은 너무도 당연한 큰 흐름으로 받아들여진다.

동성애 문제는 소수자 보호와 인권이란 차원에서 민주당이 독점해온 이슈이다. 오바마가 동성애 이슈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과정에서 오바마 이후의 민주당을 걱정하는 사람도 많다. 동성애 이슈가 상식으로 정착될 경우, 동성애 단체가 더이상 민주당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동성혼이 미국에서 불법이 아닌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동성혼 지지와 합법화를 둘러싼 미국에서의 논의는 멀고 먼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다. 5년 뒤 늦어도 10년 뒤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중요한 이슈로 부상할 것이다. 전통·도덕·종교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재산권·연금·의료보험·양육비와 같은 문제가 얽혀들면서 동성혼 합법화 논란도 자연스럽게 등장할 것이다.

‘혼인보호법’ 위헌 논란

보스턴·뉴욕 순회항소법원 “남녀 간 결혼 규정 위헌”… 연방대법원 결정 남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은 곧바로 연방대법원의 위헌 심사 대상이 될 전망이다. 최근 전통적 결혼관인 ‘남녀 간의 결혼’을 위헌이라 규정한 판결이 지방에서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진원지는 보스턴이다. 오바마의 동성혼 지지발언 이후 3주일 뒤인 5월 31일에 나왔다. 보스턴의 연방순회항소법원은 연방법이 규정한 이른바 혼인보호법(Defense of Marriage Act)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혼인보호법의 시행령 조항에서 결혼에 대한 정의를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라고 한 게 문제가 됐다.

보스턴은 하버드대학을 중심으로 대학들이 밀집돼 있는 리버럴의 아성이다. 결혼이 ‘결코’ 남녀 간의 결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판결이 보스턴에서 나온 것은 의미심장하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사이에서도 결혼할 수 있는데, 남녀 간의 결합만을 결혼 조건으로 삼는 것은 인권유린이자 평등권에 어긋나는 차별조항이란 것이다. 미국 8개 주에서 동성혼을 법으로 인정하는 상황에서, 결혼보호법이 동성혼 부부들을 차별하는 조항이라고 단죄했다.

결혼보호법에 대한 위헌 판결은 6월 6일 뉴욕 연방순회항소법원에서도 나왔다. 결혼보호법의 시행령이 남녀평등과 인권에 반하는 차별조항으로, 역시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불과 1주일 사이에 기존의 결혼관을 뒤엎는 두 건의 연방순회항소법원의 판결이 이어진 것이다. 보스턴과 뉴욕은 동성혼을 인정하는 주의 도시이다. 동성혼을 받아들이는 다른 주에서도 곧 결혼보호법에 대한 위헌 판결에 나올 것이 분명하다.

두 도시의 판결과 관련해 연방대법원도 위헌심사를 해야 할 운명이다. 심사 일정에 대한 발표는 없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국민에게 답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연방대법원의 심사 시기는 중요하다. 2012년 대통령선거 이전이 될지, 아니면 이후가 될지에 따라 오바마와 공화당 후보인 미트 롬니의 득실이 달라질 수 있다. 위헌심사 일정이 선거일 전에 잡혔으면 하고 바라는 쪽은 롬니이다. 결혼의 주체를 남자와 여자가 아닌, 성인과 성인으로 규정하려는 ‘법률조항’에 대해 미국민이 결코 관용적이지 않을 것이란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관습적으로 동성혼을 인정한다는 것과, 동성혼을 인정하는 법을 명문화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아무리 동성혼 지지자의 목소리가 높아진다고 해도, 동성혼 지지를 헌법에 명문화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오바마 역시 그같은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오바마도 결혼보호법에 대한 위헌 심사를 대통령선거 이후로 넘기고 싶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기대와 관계없이, 연방대법원은 철저히 독립적인 기준하에 결혼보호법에 대한 위헌심사 일정을 결정할 것이다.

결혼보호법을 위헌이라 주장하는 사람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평등이나 차별 금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돈과 관련된 현실적 문제 때문에 결혼보호법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결혼보호법이라는 용어가 미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2009년은 ‘동성혼과 돈’과의 상관관계를 알린 원년(元年)에 해당한다. ‘윈저(Windsor) 소송’으로 알려진 사건 때문이다. 여성인 윈저는 2007년 여성인 테아 스파이더와 결혼한다. 동성혼을 인정하는 캐나다에서 이뤄진 결합이다. 결혼 2년 만에 윈저는 여성 파트너와 사별한다. 스파이더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윈저에게 남긴다. 윈저는 재산을 받는 과정에서 동성혼의 경우 부동산 세금과 관련된 정부의 감면 혜택을 못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윈저의 결혼은 연방법에 따르면 적법하지 않다. 남녀 간의 결합을 전제로 한 결혼보호법 조항 때문에 그녀는 36만달러라는 세금폭탄을 맞게 된 것이다. 윈저는 곧바로 세금반환 소송에 들어간다. 인권과 평등을 지향하는 비영리단체인 미국민권자유연합(ACLU)이 윈저를 대신해 법정에 선다. ACLU가 전국적 지명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건의 내용이 곧바로 미국 전역에 알려진다.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리버럴들이 윈저를 응원한 것은 물론이다.

결국 윈저는 세금으로 낸 36만달러와 그동안의 이자를 전부 돌려받는다. 결혼보호법을 윈저에게 적용한 것은 위헌이라는 법률적 해석에 따른 것이다. 주목할 부분은 당시 결혼보호법 자체가 위헌이라 규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혼보호법은 법으로서는 존재하지만, 결혼보호법을 윈저에게 적용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애매한 판결에 따라 세금을 돌려준 것이다. 보스턴과 뉴욕의 연방항소법원이 결혼보호법 자체를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과 비교하면 한 단계 낮은 해석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윈저의 소송건은 그동안 결혼보호법을 대하는 오바마 행정부의 방침으로도 통했다. 한 눈은 뜨고, 한 눈은 감는 식의 정책이다. 결혼보호법 자체를 위헌이라 규정하고 폐기하지는 않지만, 결혼보호법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도록 하자는 접근이다. 오바마가 동성혼을 지지한다는 것과, 결혼보호법을 위헌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사항이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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