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이철원
일러스트 이철원

안정화(가명·홍보마케팅 담당자)씨는 지난해 8월 서울 강남의 한 IT 서비스업체로 직장을 옮겼다. 직장을 옮기면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직장 동료들이 안씨를 부르는 호칭. “예전 회사에서는 ‘안 대리님’이라고 불렸거든요. 여기서는 모든 직원의 이름을 부르고, ‘님’을 붙이더라고요.” ‘정화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존댓말을 쓰게 됐다. “직장을 옮긴 가장 큰 이유가 호칭이었어요. 면접을 보러 갔는데 ‘우리 회사는 모든 직원 상호간에 ~님이라고 부릅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예전 직장처럼 강압적이고 답답한 조직은 아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지금, 이직할 때의 기대가 충족됐을까. 안씨 회사 근처의 카페에서 만난 안씨는 한참을 두리번거리더니 “아니다”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팀과 일할 때는 도움이 돼요. 과장, 대리 같은 직함이 없으니까 몇 년차 직원인지도 잘 모르거든요. ‘이렇게 해달라’고 좀 쉽게 주문을 하죠. 그런데 팀 안에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호칭과 존댓말이 커뮤니케이션을 좀 더 부드럽게 하는 역할은 합니다.” 지난 여름 휴가철 일이다. 안씨는 회사 일을 뒤로하고 동남아로 휴가를 떠났다. “휴가 둘째 날에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오더군요. 내가 쓴 홍보물에 보충 자료가 필요하대요. 팀장이 ‘정화님, 이것 좀 찾아주세요’라고 지시를 하는데, 그 순간 ‘아, 호칭만 바뀌었지 여기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요즘 기업들의 대세는 ‘호칭 파괴’다. 호칭 파괴란 회사 내에서 과장, 부장 등의 직급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님’ 또는 ‘~매니저’ 등 연차와 직급을 구분하기 어려운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인 곳이 지난 10월 1일 합병한 다음카카오(이석우·최세훈 공동대표)다. 합병 전에도 다음커뮤니케이션은 전 직원을 호칭할 때 ‘님’을 썼다. 2002년 시행해 12년이 됐다. 최세훈 현 다음카카오 공동대표도 회사 안에서는 ‘최세훈님’이라고 불렸다. 합병 전 카카오는 전 직원이 영어 별칭을 썼다. 이석우 현 다음카카오 공동대표의 영어 이름은 ‘비노(vino)’다. 직원들은 회사 안에서 이 대표를 만나도 “비노,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상당수 IT 기업이 호칭 파괴 방식을 사용하는데, 직급이 아니라 수평적인 호칭을 사용하면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이런 호칭 방식이 실제로 효과가 있을까. 다음카카오는 앞으로 카카오의 호칭 방식, 즉 영어 이름을 임의로 만들어 부르는 방식을 사용하기로 했다. 황혜정 커뮤니케이션팀 매니저는 주간조선에 “이런 방식은 확실히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했다. “직급에 따라 호칭을 달리하는 회사도 다녀봤지만, 그때와 지금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느냐입니다. 영어 이름만 부를 때에는 상대방의 연차나 직급을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상하관계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2004년 발표된 한 석사 논문에는 실제로 호칭 파괴의 효과를 설문조사한 결과가 실려 있다. 고려대 경영대학원 인사조직 전공 오혜경씨의 ‘기업조직의 호칭파괴와 직급 폐지’라는 논문을 보면 CJ의 경우 호칭 제도를 바꾸고 나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구성원 간 상호 존중’ 측면에서 5점 만점에 3.92점을 받았다. 호칭을 바꾸고 나서 상호 존중하는 문화가 더욱 확산됐다는 얘기다. 가장 기대를 모았던 ‘권위주의 문화 타파’ 부문 역시 3.70으로 평균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 IT 회사를 다니는 안정화씨 역시 “‘님’자를 붙이고 존댓말을 쓰니 불쾌한 언어를 쓰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대한상공회의소(회장 박용만)가 우리나라 기업문화의 문제점에 대해서 조사한 결과 대다수의 직장인(61.8%)이 가장 큰 문제로 ‘상명하복의 경직된 의사소통 체계’를 꼽았다. 직장 내 갈등의 주요 요인도 ‘업무와 관련해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67.2%)라고 꼽았는데, 의사소통 문제가 기업문화의 발전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결과다. 특히 외국계 기업이나 해외 교류가 잦은 기업의 경우, 복잡한 호칭 체계가 기업 이미지는 물론 커뮤니케이션 전달 속도를 저하시킨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 때문에 대기업들이 이런 방식을 많이 도입하고 있다. CJ는 2000년부터 모든 임직원이 서로 ‘님’으로 부른다. SK텔레콤은 2006년에 주요 직책을 제외하고 나머지 임직원들을 ‘매니저’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일기획은 2010년부터 전 직원을 ‘프로’라고 부른다. 사원과 그 이상 직급 직원들은 따로 구분해서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2011년부터 새로운 호칭체계를 도입한 포스코의 경우 사원은 ‘어소시에이트’라고 부르고 대리부터 차장까지는 ‘매니저’라고 통일시켰다. 한화도 2012년부터 대리부터 차장 직급에 ‘매니저’를 붙이고, 사원급 직원들은 ‘씨’라고 호칭하기로 했다. 아주그룹 역시 지난해부터 부장급까지 전 직원에 대해 ‘매니저’라는 호칭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도입하는 것만으로 변화가 오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최근에는 수평적인 호칭을 쓰다가 다시 직급 체계를 부활시킨 기업이 더러 나오고 있다. 오리온은 2002년 전 직원을 ‘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가 2009년 직급별로 호칭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돌아갔다. 해태음료는 2007년 직함을 없애고 ‘선배’ 또는 ‘후배’라는 호칭만 사용하다가 다시 직급제를 부활시켰다. 가장 최근에는 KT가 지난 2009년부터 쓰던 ‘매니저’ 호칭 방식을 없애고 올 6월부터 직급제로 돌아가기로 했다.

KT 홍보실의 이승우 차장은 이와 관련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장까지 매니저라는 호칭으로 통일하다 보니 사기가 떨어진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황창규 회장님이 취임하시면서, 직원들에게 업무 진작 동기를 부여하고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직급제를 부활하게 됐습니다.” 2009년 KT에 입사했던 한 직원은 “직급제로 바뀌고 나서 과·차장 이상 직원들이 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직원은 “호칭만 매니저일 뿐, 업무 중에 모두가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었다”면서 “분위기에 맞게 호칭을 되돌린 것 같다”고 말했다.

수평적인 호칭 체계를 사용하는 기업에서 주로 나오는 비판이 “호칭만 수평적이고, 기업문화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2009년부터 포스코에 다니는 ‘매니저’ 김창현(가명)씨는 “호칭 체계를 바꾸고 난 후에도 기업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적어도 팀 내에서는 위계서열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업무 방식이 유지되고 있다”는 얘기다.

김씨는 예를 들었다. “작년에 신입 사원 두세 명과 함께 술자리를 가지면서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누구누구 매니저는 우리 회사 호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랬더니 신입 사원 한 명이 ‘요즘 웬만한 기업들은 다 존댓말을 쓴다고 들었기 때문에 별다른 느낌을 못 받았습니다’ 그러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매니저’라는 호칭이 우리 조직을 특별히 더 유연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예전처럼 위압적으로 지시 내리는 상사는 거의 없고, 존댓말을 쓰는 상사도 많기 때문에 ‘매니저’라는 호칭도 유행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경영학)도 “직책에 대한 호칭을 바꾸는 것만으로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면서 “조직문화 자체를 바꿀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호칭 체계를 바꾼 아주그룹 관계자 역시 비슷한 주장을 내놓았다. 남윤원 커뮤니케이션팀 매니저는 “매니저라는 호칭 체계를 도입하고 나서 주니어급 매니저들의 발언 기회가 많아지는 등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호칭 체계만 바꿔서 당장 수평적인 조직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재 그룹 차원에서는 ‘아주만의 일하는 방식’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으면 호칭 체계를 아무리 바꿔봤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업종의 특성에 따라 효율적이고 적절한 호칭 체계가 따로 있다는 주장도 많다. 호칭을 직급제로 다시 바꾼 해태음료의 한 임원은 “제조업에서 수평적인 호칭을 쓰는 것은 무리수였다”고 떠올렸다. “빠르고 정확한 의사 전달이 중요한 것이 제조업인데, 수평적인 관계만 강조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황상재 한양대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는 “아이디어가 중요한 조직에서는 수평적인 의사 소통이 중요하지만, 제조업의 경우 한국적 호칭이 유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황혜정 다음카카오 매니저는 “기업이 추구하는 방향에 따라 다른 방식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수직적인 조직문화에 따르는 문제들은 호칭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키워드

#트렌드
김효정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