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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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8일 미국 코미디언 스티븐 콜베어(Stephen Colbert)가 진행하는 CBS 심야 토크쇼에 한 동영상이 소개됐다. 흔들리는 거친 화면 속의 남자는 주변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며 “우리 모두 여기에 있다(All of us are here)”라고 말했다. 32초간 이어진 이 동영상이 끝난 후 콜베어는 잠시 울먹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 동영상은 미국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는 인기 장수 프로그램을 타고 미국 전체를 감동으로 몰아넣으면서 우크라이나의 반전을 알리는 기폭제가 됐다.

지난 2월 26일(현지시간) 새벽 텔레그램을 통해 처음 공개된 이 동영상은 러시아로부터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가 자신의 건재함을 알린 일성(一聲)이었다. 러시아군이 수도 키이우(키예프)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를 휩쓰는 상황에서 젤렌스키는 키이우 정부 청사를 배경으로 우크라이나의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음을 전했다. 젤렌스키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데니스 슈미할 총리, 미하일 포돌야크 대통령실 고문, 안드리 예르마크 대통령실 비서실장, 다비드 아라하미아 여당 대표 등을 소개하며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수호 중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다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미 키이우를 탈출했다는 소문이 나도는 상황에서 이 동영상은 우크라이나가 결코 러시아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구글 지도에서 시작된 소셜미디어 전쟁

21세기 들어 벌어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이전의 전쟁과는 양상을 달리한다. 2003년 이라크전쟁 당시 CNN은 미군이 크루즈미사일을 퍼붓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했다. 마치 비디오게임을 보는 듯한 전쟁 보도를 접하면서 전문가들은 전쟁의 양상과 보도가 새로운 차원에 들어섰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그때와도 다르다. 카메라는 시시각각 변하는 전쟁터를 멀리서 크게 보여주는 데서 벗어나 전쟁터 한가운데의 사람들을 파고든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부당한 이번 전쟁이 자신들의 일상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를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다. 포격으로 숨져가는 소녀, 딸에게 모자를 씌우고 전쟁터로 떠나는 아버지, 공포의 방공호에서 기적처럼 태어나는 아기, 그리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는 시민들…. 젤렌스키의 동영상을 시작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의 공포와 분노와 항전 의지는 전 세계인들과 거의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다. 21세기 테크(Tech) 시대의 총아인 소셜미디어(SNS)가 그들의 전쟁을 우리의 전쟁으로 전이(轉移)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쟁의 발화점도 달랐다. 2003년 이라크전쟁이 CNN의 긴급 뉴스로 시작됐다면 이번 전쟁은 지난 2월 24일 새벽 구글 지도에서부터 시작됐다. 이날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 국경도시 벨고로드(Belgorod)로 들어오는 도로가 새벽 3시를 기해 구글 지도에서는 점차 붉은색으로 변해갔다. 구글은 안드로이드 모바일폰 사용자를 자동 추적해 교통량 지표로 활용하고 있다. 이날 새벽 러시아 탱크와 군용차들이 국경을 넘어오자 현지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자동차를 타고 뭔 일이 벌어졌는지 보려고 몰려들면서 ‘갑자기’ 구글 지도에 도로 혼잡 신호가 뜬 것이다. 러시아군은 모바일폰 휴대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침략자를 구경하러 나간 피침략자들의 이동이 전쟁의 시작을 알린 셈이다.

2300여년 전 알렉산더 대왕은 이런 말을 남겼다. “양 한 마리가 이끄는 사자 군단(軍團)은 무서울 것이 없다. 진짜 겁나는 것은 사자 한 마리가 이끄는 양 군단이다.” 날카로운 발톱이나 강력한 어금니가 없는 순한 양이라 해도 사자 지도자를 만나는 순간 사자 군단으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는 의미다. 전시 지도자(Wartime Leader)의 모범으로 떠오른 젤렌스키라는 지도자를 만난 4100만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이제 양떼에서 사자 군단으로 변하고 있다. 푸틴의 당초 구상과 달리 러시아군은 쉽사리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지 못하고 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알리는 소셜미디어는 전 세계 민주국가 시민들을 대러시아 전선으로 결집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전쟁은 냉전 시대 거대 진영이 깨진 뒤 소수의 독재국가와 자유민주 진영의 대립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고 있다. 이념의 대립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독재의 전선이다. 이 전선의 선봉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젤렌스키와 푸틴이 맞섰다.

민주주의와 독재의 전선

필자가 우크라이나와 처음 만난 건 27년 전인 1995년 겨울이었다. 구소련에서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지 5년째 되던 해로, 아일랜드 출신 그룹 U2의 노래 ‘원(One)’이 울려퍼지던 때였다. 당시만 해도 청년이었던 필자는 기차를 타고 발틱 3국과 우크라이나를 둘러봤다. 구소련 지배에서 막 벗어난 상황과 신생 독립국가들의 미래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예상은 했지만,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도 제대로 된 호텔 하나 없었다. 내국인과 외국인에 대한 가격 차별도 무려 5배에 이르렀다. 공산주의가 지배했던 땅은 제대로 된 잠자리, 깨끗한 식사, 식수와 온수 하나 제공하지 못하는 ‘중세의 땅’ 그 자체였다. 하루 숙박비가 100달러가 넘는 최고급 호텔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묵다가 1박에 20달러의 민박집으로 옮겼다. 당시 현지인의 한 달 월급은 100달러 미만이었다. 기차표를 사러 역에 가면 거의 100m에 달하는 긴 줄이 늘어서 있기 예사였다. 티켓 판매원이 점심을 먹으러 간 3시간 동안은 모든 것이 정지됐다. 그럼에도 불평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은 없었다.

우크라이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클래식 연주회의 수준이 엄청 높고 여성들의 미적 감각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연히 술집에서 영어가 가능한 러시아 국적의 30대 고려인을 만났다. 그는 “소련이 붕괴됐다고 하지만 경제력은 여전히 러시아인들에게 집중됐다”고 했다. 고려인들도 겪는 문제라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부정부패의 기원’이라는 사실도 알려줬다. 우크라이나만이 아니라 동부유럽 전체의 부정부패 지수가 월등히 높은 것이 소련 지배의 산물이라는 지적이었다. 당시 피부로 느꼈지만 구소련과 러시아인에 대한 우크라니아인의 감정은 살벌했다. 발틱 3국도 마찬가지였지만 거의 살기를 느낄 정도의 증오심이 표류했다. 현지인들이 주로 출입하는 술집에 들어가면 ‘끝까지 싸운다’는 대(對)러시아 항전가가 항상 울려퍼졌다. 구소련 체제에서 경제권 박탈은 물론, 비밀경찰을 통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이 그런 저항의지로 나타나는 듯했다. 냉전 당시 우크라이나 내 비밀경찰은 인구 5명당 1명 정도였다고 한다. 비밀경찰에 끌려가 고문 살해되는 사건이 비일비재했다. 서부유럽에서의 러시아관(觀)은 책이나 영상을 통한 ‘인식으로서의 세계’에 그치지만 우크라이나와 동부유럽이 바라보는 러시아는 ‘현실 속의 공포’로 남아 있다. 이미 한 세대 전 얘기라 말할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뉴욕에서 만나본 동부유럽계 이민자 대부분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소련 체제하의 트라우마’를 잊지 않고 있다.

우연이겠지만 이번에 젤렌스키의 항전 동영상을 접한 곳은 알렉산더 대왕의 흔적이 서린 터키 ‘마르마라(Sea of Marmara)’의 한 호텔에서였다. 우크라이나 남쪽의 흑해(黑海)로 향하는 입구로,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때의 첫 전승지 ‘그라니쿠스 전투(Battle of the Granicus)’ 현장이다. 에게해에서 흑해로 들어가는 바다는 좁은 협곡으로 이어져 있다. 마르마라는 에게해와 흑해의 중간에 들어선 내륙 바다다. 폭이 1.9㎞에 불과한 좁은 해협을 끼고 있기 때문에 육안으로도 배들의 출입을 확인할 수 있다. 외신을 통해 알려졌지만, 2월 말 러시아의 잠수함과 전함들이 마르마라를 통과해 흑해로 올라갔다.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를 공격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결국 판명됐다.

길이가 10m 넘는 긴 테이블은 푸틴과의 회담에 늘 등장하는 기묘한 장치 중 하나다. 항상 끝자리에 혼자 앉는 푸틴은 일방통행 명령만 내린다. ⓒphoto 뉴시스
길이가 10m 넘는 긴 테이블은 푸틴과의 회담에 늘 등장하는 기묘한 장치 중 하나다. 항상 끝자리에 혼자 앉는 푸틴은 일방통행 명령만 내린다. ⓒphoto 뉴시스

독재자가 불러온 오데사의 비극

영화를 즐긴다면 1925년 제작된 구소련 영화감독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전함 포템킨’을 기억할 것이다. 역사에 남을 무성영화로, 제정러시아의 폭정에 맞선 무산 대중들의 봉기가 중심 테마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주무대가 이번에 러시아군이 공격한 흑해 연안 항구도시 오데사(Odessa)다. 잔인한 역사일수록 한층 더 기승을 부리는 것일까. 20세기 초에는 볼셰비키의 해방구였지만 가까운 시일 내 러시아 해군에 의해 초토화될 수도 있는 우크라이나의 땅이 오데사다.

지금 유럽인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푸틴의 전쟁’이라 부른다. 주어를 러시아가 아닌 푸틴으로 삼고 있다. 상식을 가진 러시아인이라면 구소련 역사의 현장인 오데사를 한층 더 보호하고 아끼려 들 것이다. 하지만 독재자의 판단에는 그런 역사와 상식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어 보인다. 길이가 10m에 달하는 긴 테이블은 푸틴과의 회담에 늘 등장하는 ‘기묘한’ 장치 중 하나다. 푸틴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도 없는 끝자리에 ‘혼자’ 앉는다. 독재자는 귀가 없다. 대화나 충고도 필요 없고 일방통행 명령만이 존재한다. 오데사뿐만 아니라 그 어떤 곳이라도 한순간에 초토화시킬 수 있는 인물이 바로 푸틴이다.

이번 전쟁이 푸틴이라는 독재자에 맞선 민주진영의 전쟁으로 승화하면서 두 가지 환상도 깨졌다. 첫 번째 환상은 ‘경제화=민주화’라는 고전적 역사관이다. 중국이 주된 무대지만, 경제발전이 이뤄질 경우 민주주의도 함께 성장할 것이란 낙관론이 한때 지식인들을 지배했었다. 정확히 50년 전인 1972년 2월 단행된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北京) 방문은 그 같은 세계관의 출발점이었다. 한국이 입증하듯 중국 역시 ‘경제 발전=민주주의 성장’으로 연결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역사는 정반대다. 민주주의는커녕 경제 발전을 통해 조지 오웰의 ‘1984년’으로 변해버린 전체주의의 땅이 중국이다. 중국을 통한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 이론의 주창자는 닉슨 재임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다. 그의 낙관론과 이상주의는 반세기가 흐른 지금 세기적 오판으로 판명날 듯하다. 독재자 푸틴의 침공은 이런 낙관론과 이상주의를 결정적으로 깨버렸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독일 뒤셀도르프의 시위대가 푸틴과 히틀러를 합성한 사진을 들고 있다. ‘푸틀러를 막아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photo 뉴시스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독일 뒤셀도르프의 시위대가 푸틴과 히틀러를 합성한 사진을 들고 있다. ‘푸틀러를 막아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photo 뉴시스

우크라이나 전쟁이 깨버린 두 가지 환상

러시아 자체에 대한 환상도 깨져나갔다. 과거 유럽연합(EU) 지식인 중 일부는 석유·가스와 같은 에너지 통합을 통해 유럽과 러시아가 일체화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특히 에너지 수입국가 독일은 그 같은 평화론의 선두에 서 있었다. 자원대국 러시아가 에너지 판매를 통해 돈 맛을 알 경우, 자본주의권인 서구 유럽과의 평화도 자연히 구축될 것이라 판단했다. 미국이 이런 판단에 반대해도 러시아를 괴롭히려는 ‘음모’ 정도로 해석하면서 무시했다. 설령 러시아가 가스 파이프를 잠가도 대화를 통해 풀어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지난 2월 EU는 우크라이나 침략이 단행될 경우 러시아로부터 들어오는 가스관 신설 공사를 중단하겠다고 러시아에 경고했지만 푸틴은 비웃음과 함께 침략을 단행했다. 돈 맛이 아니라, 군사적 침략을 통한 힘자랑과 정복욕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에너지를 통한 유럽과 러시아 간의 평화 구축 구상은 물 건너갔다. 일체화와 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기대와 달리 가스관은 서방을 위협하는 또 다른 군사전략적 카드로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동안 ‘설마’로 버텼지만 우크라이나 침략이 냉전 종결 후 팽배했던 러시아에 대한 환상을 ‘완전히’ 깨는 출발점이 됐다. 이번 사태 후 국방비 대폭 증액을 공표한 독일의 변신은 바로 그 증거다.

21세기의 특징이지만 시대정신은 시대환경으로 직결된다. 시대정신과 시대환경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테크놀러지(이하 테크)는 가장 주목할 시대환경 중 하나다.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결된 일상의 테크가 시대환경, 아니 시대정신의 핵심이다. 이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인류가 쌓아온 테크의 실전 현장이기도 하다. 벨기에에 본부를 둔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를 통한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가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까지 제재 대상에 넣으면서 루블화 폭락이 이어지고 있다. 푸틴도 경제제재를 예상하면서 나름 준비했을 테지만 서방이 똘똘 뭉치면서 방어벽이 무너지는 상황이다. 이 가공할 공격에도 세계를 하나로 묶는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독재자를 배제시킨다는 테크 시대의 정신이 담겨 있다.

이번 테크 전쟁에서 필자가 남달리 주목한 서방의 대러시아 타격이 있었다. 지난 3월 2일 애플이 자사 제품의 러시아 판매 중단을 선언한 것이다. 앞으로 아이폰 부품 조달도 중단한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심각해질 경우 애플의 구동체계인 iOS에 대한 제재도 이뤄질 것이다. 물론 구글의 구동체계인 안드로이드도 마찬가지다. 구동체계가 빠진 모바일폰은 단순한 전화기에 불과하다. 매일 모바일폰을 쓰던 러시아인들이 어떤 상태에 빠질지 짐작이 간다. 특히 러시아 젊은이들의 좌절감이 푸틴에 대한 분노로 이어질지가 핵심이다. 외신을 통해 매일 발표되고 있지만, 이른바 빅테크(Big Tech)와 글로벌 IT기업들의 우크라이나 지원, 지지 방침이 이어지고 있다. 스위프트는 한 나라의 국부를 타깃으로 한 경제제재로, 이미 상설화된 IT 글로벌 인프라와 네트워크를 활용한 정부 차원의 테크 제재다. 현재 전 세계 은행·금융 관련 인프라와 네트워크의 80% 정도가 미국·유럽·일본에 집중돼 있다.

돈과 네트워크가 결판 지을 승자와 패자

반면 사기업인 빅테크와 글로벌 IT기업이 벌이는 러시아 제재는 어떤 식으로 나아갈까? 러시아 일반 시민들이 생활 속에서 겪는 구체적 불편함으로 나타날 것이다. 매일 사용하던 구글 지도가 한순간 모바일에서 사라지는 식이다. 이번 IT 성전(聖戰)의 가장 큰 성과는 우크라이나의 항전 의지가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다는 점이지만 더 큰 성과도 기대할 수 있다. 푸틴이 주장하는 전쟁 명분과 억지, 나아가 폭력의 실상이 러시아 국민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다는 점이다. 소셜미디어로 공개적인 항전 의지를 천명하는 젤렌스키의 반대쪽에는 크렘린궁에 웅크리고 있는 푸틴이 있다. 상식이지만, 투명과 공정은 테크의 이념이자 목표 중 하나다.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인들의 항전이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는 의미다.

성급하지만, 푸틴의 이번 전쟁이 어떻게 종결될지 궁금하다. 핵폭탄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다. 언제나 그러하듯 역사를 관찰해 보면 단서를 찾을 수 있다. 1970년대 베트남전쟁 때부터 되풀이되는 결론이지만 ‘이기고도 진 전쟁’이 대부분이다. 조약이나 문서만으로 보면 정전이나 승전국이 된 듯하지만 실제는 지도자의 야반도주로 끝난 전쟁이 대부분이다. 베트남, 발칸,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은 좋은 본보기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푸틴의 전쟁도 비슷한 길을 걸을 것이다. 전쟁 발발 7일째인 3월 2일 현 시점에서 러시아군의 민간인 공격이 시작됐다. 국제법 준수는 애초부터 안중에도 없다. 골리앗을 누른 다윗의 무용담은 신이 지켜주는 성전에서나 통한다. 무차별 미사일 수백 발만으로도 키이우 함락이 가능할 것이다. 가까운 시일 내 대규모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골리앗의 푸틴이 승자가 될 확률은 높다. 그러나 이후 불어닥칠 후폭풍을 감안하면 정반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이 그러했듯이, 순간적으로는 이기지만 결국은 지는 전쟁이다. 그러나 푸틴의 러시아와 황혼대국이라는 미국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간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진 나라가 미국이라지만 세계 패권국 위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왜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강력한 경제력과 우방과의 네트워크가 배경에 있다. 간단히 말해 부자 나라이고 친구도 많기 때문에 전쟁에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패권을 이어갈 수가 있다. 러시아는 다르다. 이기고도 질 경우 영원히 추락할 수 있다. 돈도 없고 우방과의 네트워크도 없기 때문이다. 젤렌스키의 기상과 우크라이나 국민의 결의는 독재자의 전쟁을 무용지물로 만들 정의의 원천이다. 서방이 일치단결해 시행하는 금융제재는 전쟁이 종결되더라도 장기간 계속될 전망이다. 아무리 푸틴이라지만 전 세계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다. 중국에 기대겠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무기나 군대보다 돈에 관련된 문제가 바로 전쟁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무력이 아니라 돈이 전쟁의 원인이자 결과라는 것이다. 전쟁에 이긴다고 해서 최종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밑 빠진 독을 채울 엄청난 돈과 네트워크가 최후의 승리와 패권 존속을 약속하는 마지막 무기다. IT강국 러시아 국민들은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다. 독일·일본은 물론, 중립국 스웨덴과 핀란드조차 러시아에 등을 돌리고 있다. 평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동물이 양이지만 백 마리, 천 마리 양들이 평화를 직접 창조해낼 수는 없다. 평화를 만들고 자유를 지키는 것은 사자 같은 지도자와 국민들이다. 유럽과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사자 나라’ 우크라이나의 기상과 결의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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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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