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추운 올겨울, 학교 운동장은 스산하기 그지없다. 활기차게 뛰어노는 아이들은 없고 꽁꽁 언 축구 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실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진 학생들은 몸을 꼬며 지루해하지만 영하 10도 안팎의 운동장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특히 봄방학을 며칠 앞둔 시기는 교사들이나 학생들에게 모두 힘든 시간이다. 교과서 진도는 이미 완료됐고 성적처리도 모두 끝나 시간이 남아돈다는 말이 딱 맞는 시기다. 교사들이 기획했던 프로그램도 거의 완료됐고 관련 예산정산 보고서도 모두 제출됐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
“선생님, 억울해요. 애들 좀 혼내주세요!” 성호가 다급하게 교무실로 뛰어들어와 마구 소리를 질러댄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 교사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분한 맘을 삭이지 못하고 두서없이 말을 쏟아내는 성호에게 의자를 내주고 겨우 앉게 한다. 좋아하는 사탕을 줘도 받아놓기만 하고 입에 넣지 않는다.(사탕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약과 같은 작용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이 사탕이나 초콜릿을 입에 넣고 있으면 흥분을 쉽게 가라앉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학생들 당만 높여주어도 사고가 확 줄어들 거라는 농담 같은 말도 있다.)한참
학교의 1, 2월은 졸업과 함께 교직원들의 인사이동이 많아 모두가 뒤숭숭한 시기이다. 공립학교는 5년의 순환근무 원칙 때문에 교사 5명 중 1명은 해마다 학교를 옮겨야 한다. 그리고 휴직에 들어갔던 교사들의 복직 여부에 따라 기간제 교사들도 학교를 그만두거나 다른 학교로 떠나야 한다. 교장, 교감, 행정실 식구들도 승진이나 전근발령에 따라 학교를 옮기고, 정년퇴직이나 명예퇴직으로 영영 교직을 떠나는 동료들까지 있으면 도대체 누가 남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면 떠나가는 사람들은 섭섭하고 보내는 사람들은 아쉬워
“선생님! 어려워요. 못 하겠어요.” 오늘도 수학 문제 거부 운동을 하는 지환이. 나는 “이건 지환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까 풀었던 문제를 보고 다시 풀어보자”라며 격려했다. 그러자 지환이는 이번엔 “우석이가 방해해서 문제 못 풀겠어요!”라며 거부한다.지적장애 3급인 지환이는 받아올림이 있는 두 자릿수 덧셈을 공부하고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쉬운 문제만 풀려 하고, 어려워 보이는 과제는 일찌감치 포기해 버린다. 받아쓰기나 형성평가의 점수가 낮게 나오면 “나는 바보 멍청이예요!”라며 떼를 쓰고 울기 시작한다. 감정
“어떻게 해야 대학에 갈 수 있어요? 아니, 좋은 대학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교사들이 자주 듣는 질문이다. 우리나라 학생, 학부모의 최고의 관심사 중 하나이고 빈번하게 들어오는 상담 내용이기도 하다. 단순한 답을 해주기에는 뭔가 아쉽고, 정확한 답을 해주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아 어렵고, 답하지 않고 외면하기에는 너무 절실한 주제다. 교사들이 흔하게 답하는 내용은 “목표를 분명히 하고, 대학이 요구하는 중점 선발 내용에 맞춰 준비하고, 수능을 위해 핵심을 정리하여 집중 학습하라”이지만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대학마다
추위가 매서운 계절이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오리털 외투를 덮어쓰고 책상에 딱 달라붙어 있는 아이들, 세상의 온갖 아픔은 죄다 짊어진 듯한 얼굴로 추위를 타는 학생들을 보면 ‘추위는 차가운 바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허한 마음에서 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민구(가명)가 요즘 책상에 달라붙어 움직일 줄 모른다. 친구들과 이야기도 하지 않고 점심도 자주 거르려 한다. 점심시간에 빈 교실에 혼자 엎드려 있는 것을 겨우 달래서 식당에 보내는 일이 잦다. 수업에도 전혀 의욕이 없다.민구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최근에 부모님이 자주
“선생님, 우리 진혁이는 장애아동인 것이 거의 표가 안 나요. 일과 중에는 통합학급에서만 생활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방과 후에 선생님께서 진혁이가 어려워하는 수학과목 좀 개별 지도해주시면 안 될까요?”지난 4월, 2학년인 지적장애 3급 진혁이가 전학을 왔다. 진혁이 어머니는 등교 첫날 나에게 전화로 부탁을 하셨다. 진혁이는 통합학급에서 반 친구들과의 학습이 가능할 만큼의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의사소통도 원활했다. 수업 중에 주의가 산만하고 떠들어서 통합학급 담임교사의 지적을 받곤 했지만 2학년 남자아이들에겐 흔히 있는 모습이
과학수업이 시작됐지만 철이와 민이(가명)가 과학실에 오지 않았다. 학생부에 불려갔다고 한다. 학급 회장이면서 평소 반듯한 행동을 하던 철이와 밝고 착한 민이에게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 아이들에게 물어봤더니 생각지도 못한 얘기가 들려왔다. 두 학생이 급경사인 하수구에서 썰매를 타려다가 걸렸다는 것이다. 우리 학교는 산의 경사를 끼고 건물을 세웠기 때문에 2층 현관으로 나가면 1층으로 이어지는 경사가 있다. 경사지만 나무와 풀이 자라나 있어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 옆 얼어붙은 경사진 하수구를 아이들이 타고 내려온다면 얘
요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사랑과 칭찬을 받고 자란다. 초등학교에서는 많은 아이들이 ‘영재’라는 이름으로 특별 교육과 대우를 받는다. 학원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수준의 영어와 수학을 다 끝마쳐준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내 아이가 이른바 ‘전교권’ 성적을 받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는 부모들의 콧대는 하늘을 찌른다. 2학년 학부모들이 다소 겸손해지는 것은 1학년 성적표의 영향이 크다.지금의 학부모들 역시 ‘둘만 낳아 잘 키우자’던 1970~1980년대 태어난 세대들이다. 형제가 많아 늘 경쟁하고 다투고 부모에게 혼나면서 자란 이전
학년 초 준구(가명)의 표정은 몹시 어둡고 마음에 분노와 두려움이 가득했다. 첫마디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었다. “아버지가 싫어요. 얼굴 보기 괴롭고 무서워요. 저는 놀고 싶고, 체육 중학교로 전학 가서 높이뛰기 선수를 하고 싶은데, 아버지는 소위 ‘사’ 자 들어가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하세요. 학원에서는 매일 시험을 보고 점수가 낮으면 나머지 학습을 시키는데, 이런 모습을 다른 학생들이 보는 것이 자존심 상하고 창피해요.”준구의 하소연은 계속됐다. 한번은 어지럽고 아팠다.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병원 다녀와서 학원 하루 쉬면 안
“선생님! 우석이가 없어졌어요. 바지 아래를 잡으며 밖을 가리켜서 화장실 가고 싶다는 의미로 알고 다녀오라고 했거든요. 20분째 돌아오지 않아요. 화장실에도 없고요.”우석이 담임선생님이 수업 중에 다급히 달려오셨다. 특수학급 교사인 나는 태연하게 답했다. “걱정 마세요. 근처에 있을 거예요. 잠깐 한눈팔다가 돌아올 거예요.”교실에서 갑자기 사라진 우석이. 다 이유가 있다. 3학년 우석이는 언어·뇌병변 2급의 선천적 장애아동이다. 입학 당시 말을 하지 못해 의사소통이 어렵고, 인지능력은 만 3세 이하의 수준이어서 통합교육을 하기에는
우리 학교의 자투리 공간에는 작은 텃밭이 있다. 텃밭 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유기농 채소를 키우는 곳이다. 올해는 유난히 텃밭 농사가 풍년이었다. 1학기에는 상추, 케일, 치커리 등 싱싱한 쌈채소를 풍성하게 수확했고, 2학기에는 배추 70포기를 수확했다. 비옥한 토양을 만들기 위해 한약재 찌꺼기를 썩혀 넣어주기도 하고 잡초도 제거해주며 가꾼 결과였다.지난 봄, 우리는 텃밭 상자에 있던 묵은 흙들을 영양분이 풍부한 상토로 교환했다. 그리고 작은 쌈채소 모종을 심었다. 학교의 많은 학생들이 텃밭 주변을 지나면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두 학교를 거쳐 우리 학교로 전학 온 범수(가명)가 우리 반으로 배정되었다. 학생들 말로는 두 학교를 평정한 일명 ‘짱 중의 짱’이다. 범수는 고개를 숙이고 교무실로 들어왔다. 키는 170㎝ 정도로 생각보다 크지 않았지만 떡 벌어진 어깨며 다부진 몸매가 범상치 않았다. 특히 눈매가 보통이 아니었다. 내 이야기를 듣다가 뒤에서 수군거리는 아이들을 향해 고개 돌려 쏘아보는 눈빛에 학생들은 모두 기가 죽는다. 범수는 담임교사인 나에게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나이도 다른 학생들보다 두 살 많아요. 이제는 정말 중학교 졸
“뭐 학교가 이 따위야!”교무실 문 앞에서 한 아이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일을 하다가 깜짝 놀라 아이에게 물어보니 선생님이 지각한 자기를 교무실로 내려오라고 했는데 5분을 기다려도 안 온다는 것이었다. 벌점 주신다고 했으면 벌점이나 주지 왜 오라가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등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씩씩댔다. 그 학생은 급한 업무를 해결하느라 5분 늦은 선생님에게 “5분이나 늦으면서 왜 학생의 지각에 대해 뭐라 하느냐”고 마치 훈계하듯 따지고 들었다.내년부터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사용하던 벌점제도가 일선학교에서 사라질 것
‘우리 지역에 몰아넣는 야비한 특수학교 설립, 절대 반대.’우리 학교 교문 앞에는 ‘특수학교 설립 반대’를 외치는 주민들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우리 학교는 내년에 대대적인 변동을 앞두고 있다. 인근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단지 내 49개 학급의 대형학교 형태로 바뀌게 된다. 지금의 초등학교 자리에는 특수학교가 들어설 예정이다. 이곳 역시 님비현상으로 골이 깊다. 특수학교 설립을 두고 장애우 학부모가 무릎까지 꿇은 서울 강서구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지만, 우리 동네엔 안
철이(가명)는 앞으로 하루만 더 결석하면 졸업을 할 수 없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철이는 오늘도 출석부에 ‘수업 1시간’이 기록되자 사라졌다. 철이는 1시간만 수업에 참가해도 출석으로 인정해주는 제도를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다. 철이의 불규칙한 출석은 2년이 넘었다. 중학교 1학년 초에는 상습적으로 무단지각을 하는 정도였지만 점점 행동이 무절제해졌다. 2학년 때에는 지각하고 오전에 한두 시간 수업받다가 무단결과(缺課)한 후 오후에 무단조퇴를 해버리는 날이 반복되었다. 하루에 지각, 결과, 조퇴가 겹쳤을 때 학생에게 가장 유
수확의 계절 가을! 중3 학생들에게는 중학교 생활을 마무리하는 시기이다. 중3 교사들은 행동발달과 종합의견에 좋은 내용을 찾아 써주기 위해 많은 생각과 노력을 한다.나는 학기 초에 ‘장점 찾기의 생활화’란 주제로 자신의 좋은 점 찾기를 한다. 학생들이 자신의 장점들을 알게 되면, 자존감과 자신감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학교생활도 적극적으로 하고 표정도 밝아진다. 성적도 놀라울 정도로 향상된다. 장점 찾기를 잘하는 학급일수록 분위기도 좋다.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학생들에게 장점 찾기를 하자고 하면 무기력하게 있다가 “저는 장점이 없어
“선생님! 제가 3학년이 되면 선생님께서 우리 동생을 좀 봐줘야 할지도 몰라요. 몸이 조금 아픈데, 선생님이시라면 우리 동생 환희를 잘 봐 주실 수 있을 것 같아요.”작년 이맘때, 2학년 운희가 나를 찾아와서 한 말이다. 늘 밝고 긍정적인 성격에다 운동도 잘해 남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던 운희의 말에 적잖이 놀랐다. 지난 1월엔 운희 어머님이 따로 뵙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이렇게 해서 장애전담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는 운희 동생 환희를 만나게 됐다. 자폐가 있는 환희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부모님은 환희를 특수학교
우리 학교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축구부와 태권도부가 있다. 그곳에서 많은 학생 선수들이 전문 스포츠인을 꿈꾸며 멋진 미래를 향해 노력하고 있다. 학교도 우수한 학생선수 육성을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다 해왔다.교육을 논할 때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을 흔히 하지만 운동부에는 그 말이 가끔 사치로 여겨진다. 학생들의 대회 결과는 상위학교 입학에 큰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선수생활 내내 평가기준으로 따라붙는다. 또 학생선수들은 학교의 명예를 걸고 경기에 임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학생이니 학교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과거 학생선수
서늘한 바람이 불고 하늘이 맑아 창밖 풍경이 잘 보이는 완연한 가을아침이다. 모처럼 창밖으로 북악산을 보며 철민(가명)이와의 일을 회상하는 여유를 가져본다.철민이는 일명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대학병원을 다니며 심리치료를 받고, 지금도 약을 복용하고 있다. 철민이가 1학년 때 참가한 가을 사생대회 및 백일장에서의 일화는 유명하다. 철민이는 이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은 전혀 쓰지 않고 물에 뛰어들어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을 끼얹고 물총에 물을 담아 학생들에게 쏘고, 심지어 유치원 아이들의 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