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1536~1584)는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양대 거봉이다. 퇴계보다 35살 아래였던 율곡이 죽고 8년 후 전쟁(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엄청난 위기를 모면하자 문치(文治)에 기울었던 조선 지식인들은 위정자의 제도개혁(更張)과 변통(變通)을 촉구했던 이이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전쟁 이후의 정치사를 염두에 두면 17세기부터 정계는, 율곡을 영수로 한 서인(西人)과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老論) 및 소론(少論)이 조선 후기 역사를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율곡과 그 후예인 서인 및 노론의 정치적 위상을 잘 보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은 퇴계 이황과 동년배다. 삶과 철학, 정치이력 모든 면에서 이황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퇴계가 경상좌도를 대표한 유학자라면 남명은 합천·김해·진주 일대 경상우도를 대표한 인물이다. 조식은 1555년 명종 10년, 단성현감의 벼슬을 제수받았을 때 ‘단성사직소(丹城辭職疏)’를 올려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문정왕후는 생각이 깊지만 구중궁궐 속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임금께선 나이가 어려 선왕의 일개 외로운 후사에 불과하니 빈번한 천재지변과 민심의 분열을 어떻게 감당하고 수습하겠습니까!”(乙
퇴계 이황 때문에 조선 유학이 주자학 일색으로 귀결됐다고 비판한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는 ‘일선사화(日鮮史話)’에선 다른 성격의 에피소드를 전했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활동한 일본 사상가 모토다 에이후(元田永孚·1818~1891). 그는 구마모토(熊本) 번의 번교(藩校)인 시습관(時習館) 출신으로 이 지역 주자학을 창설한 오쓰카 다이야(大塚退野·1677~1750)의 학풍을 계승했고, 일본 근대국가 건설의 기점인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때 ‘교육칙어(敎育勅語)’의 초안을 작성했던 인물이다. 다카하시 도오루가 모토다 에이후를 언급한
이황(1501~1570)은 조선 유학의 거봉으로 손꼽힌다. 국내뿐 아니라 중국, 일본, 구미 등 해외에서도 동양유학과 관련해 가장 저명한 인물의 하나로 거론된다. 무엇이 이황의 철학을 주목할 만한 대표적 유학사상으로 만들었을까?20세기 초 경성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1878~1967)는 조선 지식인의 지적 종속성을 증명하기 위해 이황의 철학을 본보기로 삼아 질타했다. 이황은 오직 주희(朱熹)의 책만을 금과옥조로 삼은 주자학의 충실한 조술자였고 이 때문에 조선 유학은 퇴계 이후 주자학 일변도로 치달았다는 것이
유학뿐 아니라 동양철학 전체를 통틀어 기(氣) 개념만큼 많은 주목을 받은 용어도 드물다. 구름을 뜻하는 운기(雲氣) 개념은 중국 고대 은나라·주나라의 갑골문, 금문에서부터 등장한다. ‘좌전’과 ‘국어’는 음양풍우회명(陰陽風雨晦明)의 육기(六氣), 인간의 감정(六志), 질병(六疾)을 모두 기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이건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기가 자연과 인간 사회를 아우르는 보편적 철학 개념으로 정립됐다는 걸 말한다. 이로부터 기 개념은 도가, 유가, 음양가를 막론하고 동양인의 우주론,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피력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
미국의 진보적 정치학자 셸던 월린(Sheldon Wolin)은 정치적인 것의 고유성을 말하면서 기존의 정치관을 비판했다.(‘정치와 비전’) 그의 비판을 받았던 기존의 정치관 중 하나가 윤리적 판단에 정치를 종속시키는 규범적 정치학이다. 유학은 월린이 지적한 규범적 정치학에 해당된다. 도덕적 기준에서 현실 정치를 비평하고 정치를 윤리화하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조선 유학도 정치가의 도덕성(修己)을 바탕으로 정치운영(治人)의 정당성을 도출했기에 윤리(도덕)와 정치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 논리를 윤리적 판단
19세기 말 이후 서양은 우리의 절대적인 지식·문화 수입원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의 유교지식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서양의 과학과 정치제도다. 엄청난 위력의 과학지식과 민중에 의한 정치가 선출 방식(민주정)은 지난 세기 동양인을 깊은 열등감에 빠뜨렸다. 이 가운데 민주주의 문제를 살펴보자. 유학의 정치이념은 흔히 민본주의(民本主義)·위민주의(爲民主義)로 불린다. 이것은 소수의 뛰어난 정치가가 천심(天心)을 담은 백성의 마음, 즉 백성의 원망(願望)과 요구를 헤아려 백성을 다스린다는 의미다. 당연히 국민의(of), 국민에 의한
1388년 유명한 사건 하나가 발발한다. 요동 정벌에 나선 고려의 무장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이다. 이 사건은 왕조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여말선초(麗末鮮初)로 알려진 격동의 14세기, 한반도는 친원(親元)정책에 급급한 고위층 정치가, 사장학(詞章學)에 빠져 현실성을 잃은 낡은 유학, 낯 뜨거울 정도로 세속화된 불교가 혼재했다. 마지막 몸부림처럼 반짝하고 명멸한 공민왕의 짧은 개혁과 뒤이은 죽음은, 권문세족의 횡포에 지친 젊은 지식인들을 격분시켰다. 공민왕의 유교 부흥과 성균관 개혁의 바람을 타고 정도전은 30세(1
유학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조선시대의 철 지난 풍속, 삼강오륜의 경직된 윤리규범을 상기시킨다. 우리 것이 좋다고 무조건 선양하는 것이 아닌 한 왜 다시 옛날 일을 거론하느냐는 것이 통념이다. 이것은 나를 포함해서 지나가다 우연히 만난 어떤 여성에게라도 다음과 같이 질문하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은 조선시대에 여자로 태어나서 살고 싶은가?” 아마도 대다수 여성들이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이게 유학의 현주소다.왜 우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유학의 사유를 탐색하려는 것일까? 과거로의 지적 여정이 미래를 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