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은 모든 종교의 원형이다. 2만~3만년 전의 원시상태에서는 초자연적인 힘을 숭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속이 체계를 갖추고 이론을 정비하면 종교가 된다. 종교의 원료는 무속이다. 무속은 못 배우고 투박하지만 파워가 있다. 제도화된 종교는 영적 파워가 약해진다. 종교가 제도화되고 체계화될수록 영발은 사라진다. 영발이 없는 종교는 식은 감자와 같다. 제도화는 껍데기만 남게 만들 수 있다. 무속은 거친 영발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에게 물질세계 너머의 그 어떤 힘을 느끼게 해준다. 무속을 인수분해하면 세 가지 갈래가 있다. 한민
결국(結局)이란 단어가 있다. ‘마지막에 이르러’라는 뜻이다. 이건 원래 풍수 용어이다. 산줄기의 마지막 부분에 정기가 뭉쳐서 국(터)을 만든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 에너지가 집결되어서 자리 또는 명당을 만든다. 그러니까 산꼭대기에는 명당이 드물다는 이야기이다. 호박이 가지 끝에 열매를 맺듯이 풍수에서는 산줄기의 아래쪽 끝자락에 제대로 된 터가 형성된다고 본다. 이런 ‘결국’의 관점에서 산을 바라다보면 산의 정상보다는 낮은 쪽의 끝자락을 유심히 보게 된다. 일반 등산객과 풍수가의 산을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결국의 관점에서 지
조선시대 승려들은 묘한 위치였다.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승려는 학자 계급이자 브라만 계급이었다. 성직자로 대접받던 계급 아닌가. 그런데 조선시대로 들어와서 갑자기 천민으로 강등되었다. 팔천(八賤) 중의 하나였다. 기생, 상여꾼, 백정, 노비와 같은 8가지 천민 중 하나에 속했다. 이런 대접이 있나!그런데 임진왜란과 같은 커다란 전쟁이 일어나자 최일선에서 나라를 지키는 정규군으로 활약하였다. 핍박받던 천민이 무슨 지킬 나라가 있다고 전쟁터에 나가서 자기 목숨을 바치나. 국방의 의무는 그 체제에서 가장 혜택받던 계급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왜군과 전투를 벌일 때는 평지보다는 산성에서 싸워야 유리하다는 사실이었다. 이유는 왜군의 신무기였던 조총 때문이다. 전투는 일차적으로 무기 싸움이기도 하다. 화살보다는 조총이 훨씬 파괴력이 강한 신무기였다. 사거리와 적중도, 그리고 집중 사격에서 오는 화력이 활보다 훨씬 강하였다. 그러나 지형이 험한 조선의 산성(山城)에서 싸움이 붙으면 조총이 가진 장점이 반감된다. 가파른 산악지형에서 붙으면 오히려 불리할 수도 있다.정유재란 때 경남 함양군 안의면의 황석산성 전투를 20여년간 연구해
그리스에 가 보니까 섬나라였다. 볼 만한 것은 섬에 있었다. 산토리니, 여기는 푸른색과 흰색의 페인트로 지붕들을 발라 놓아서 볼 만하였지만 사실은 아주 황량한 섬이었다. 크레타는 이집트의 고대 문화가 그리스로 건너가는 중간기착지로서의 의미가 있는 섬이었다. 미코노스는 가게의 기념품이 다 고급스럽고 쓸 만한 물건들이어서 약간 의외였는데 알고 보니 게이(gay)들이 선호하는 섬이었다. 동성애자들이 자식도 없고 딱히 돈 쓸 데가 없으니 비싼 물건을 많이 사기 때문이란다. 그리스는 육지보다 바다에서 돈이 나왔고 정보가 나왔다. 그러니 뱃사
지리산에는 여러 개의 대(臺)가 있다. 대는 어떤 곳인가? 땅의 정기가 뭉친 곳이다. 정기가 뭉친 곳에서 도를 닦아야 효과가 있다. 쓰레기나 매립해서 다져진 곳에서는 도통하기 어렵다. 대는 보통 바닥이 바위 암반으로 되어 있고 뒤쪽에도 커다란 바위나 절벽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앞에는 전망이 좋다. 뷰가 탁 트인 곳이 많다. 지리산에는 보는 관점에 따라 8대(臺)를 꼽기도 하고 10대를 꼽기도 한다. “금대, 무주대, 도솔대가 함양군 마천 일대에서 꼽는 3대다”라는 말이 있다. 금대에는 금대암(金臺庵)이 있고, 무주대에는 상무주암
이란의 호메이니는 생전에 특이한 취향이 하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은 냄새였다. 호메이니는 향수광이었다. 여섯 개의 감각기관 중에서 냄새에 아주 민감한 체질이었던 것 같다. 퀴퀴한 고린내를 못 참는 기질이어서 이를 방어하기 위해 향수를 뿌렸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사막과 광야가 많은 중동은 물이 귀하므로 잘 씻지 못한다. 먹는 물도 귀한데 샤워는 언감생심이다. 땀 냄새는 나고 목욕할 환경은 안 되다 보니 몸이나 텐트에서 냄새가 진동하고, 이 불쾌한 냄새를 잡기 위한 과격한 방법은 향수를 뿌리는 일이었다. 현재도 중동 지역이 최대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제도화된 종교가 있기 전에는 동굴이 신전(神殿) 역할을 하였다. 원시종교의 신전은 대부분 동굴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굴을 볼 때 예사로 보면 안 된다. 원시인들이 도를 닦았던 수도처로 보는 게 합당하다. 예를 들면 3만~4만년 전 원시인들의 벽화가 남겨진 유럽의 동굴이 이런 장소들이다. 알타미라동굴, 라스코동굴, 쇼베동굴에는 당시 사람들이 남겼던 동물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대표적으로는 야생 소의 그림이다. 인도네시아 슬라웨시동굴에도 4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동굴벽화가 발견되었다.동굴벽화는 왜
이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돈을 벌려고 노력하지만 노력에 비례해서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돈은 눈이 9개 달렸다. 노력도 필요하지만 아이디어, 세상의 흐름을 읽는 눈, 천재지변, 귀인의 도움 등등 여러 가지 변수가 총합적으로 작동한다. 거기에 덧붙여 운도 작용한다. 미국의 록펠러에게 사업성공의 비결을 물었을 때 록펠러의 대답이 걸작이다. “첫째도 운, 둘째도 운, 셋째도 운이다.” 운은 논리적 분석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어떤 지점에 있는 힘이다. 개인의 사주팔자에 재복이 있는 것도 필요하다. 팔자에 재복 없는 사람
산과 물이 인간을 달래준다. 그래서 동양의 그림은 산수화가 주종을 이룬다. 동양의 산수화는 종교적인 그림이다. 동양적인 해탈, 도통, 구원의 경지를 그린 그림이 산수화이다. 요산요수(樂山樂水)이다. 산과 수를 나눠 보자. 산은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한다. 왜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했을까? 산에 가면 바위에서 올라오는 정기를 받는다. 이 정기가 사람을 관대하고 인자하게 만든다. 등산을 하고 난 다음에 오는 특유의 충만함이 있다. 뭔지 모르게 꽉 차는 느낌이랄까. 이 꽉 차는 듯한 에너지가 산에서 받은 정기이자 지기이다. 에
‘도선국사는 풍수 공부를 어떻게 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볼 수 있다. 한국의 비공식 종교가 바로 명당교(明堂敎)이다. 명당을 좋아하고 명당을 숭배하는 문화가 한국 문화의 저변에 깔려 있다. 한국 사람 치고 명당 싫어하는 사람 없다. 이러한 명당교의 교주에 해당하는 인물이 바로 도선국사이다. 도선국사는 풍수의 이치를 누구에게 배웠는가? 계보는 어떻게 되는가? 아니면 스승 없이 혼자 터득하는 무사자오(無師自悟)의 케이스인가?도선국사는 지리산의 이인(異人)으로부터 풍수를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인(異人)? 불교 계통의 스님은 아니
조선시대 서울의 궁궐을 중심으로 사방 4군데의 호위 사찰이 있었다. 동쪽에는 불암사, 서쪽에는 진관사(津寬寺), 남쪽에는 삼막사, 북쪽에는 승가사이다. 이를 사고사찰(四固寺刹)이라고도 한다. 4군데서 도성과 궁궐을 지킨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서쪽에 있는 진관사. 근데 이름이 좀 특이하다. 나루 진(津)에 너그러울 관(寬)이다. 산속에 있는 절 이름에 어찌 나루 진(津) 자가 들어가는가? 고려 때 진관대사(津寬大師)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진관의 뜻은 ‘너그러운, 넓은 나루’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피안의
한국의 영지는 대략 3가지 조건을 갖추면 된다. 바위 암반, 소나무, 그리고 냇물이다. 냇물가에 넓적한 바위 암반이 있고, 그 옆에 노송이 있으면 대개 그러한 장소는 옛날 신선이나 도사, 고승들이 노닐거나 수도했던 터라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암반에서는 기가 나온다. 기가 너무 세게 나오는 곳에서는 구안와사가 오기도 한다. 경락이 막혀 있는 일반인들이 바위에서 잠을 자면 턱이 돌아가는 불상사가 나기도 한다. 세게 들어오는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면 턱이 돌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220볼트 밥솥에 500볼트가 들어와 버리면 타 버리는
지난 30년간 필자는 ‘필드가 선생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전국 여러 곳을 답사 다녔다. 책과 자료에는 없는 정보들이 현장에서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등산화 수십 켤레가 닳았다. 그래서 좋은 등산화를 보면 욕심을 낸다. 현장답사에서 얻고자 하는 정보는 대강 이렇다. 풍수(그 지역 산세가 어떻고 명당이 어디인가), 족보(명문가 집안의 역사 그리고 계보), 사주, 그 지역이 배출한 인물, 불교사찰, 도사들이 기도하던 기도터 등이다. 이러한 답사 포인트를 뭉뚱그리면 ‘강호동양학’이 된다. 강호동양학은 강단동양학에서
지리산은 세계에 내놓아도 꿇리지 않는 산이다. 내놓을 만한 명산이라는 사실을 세계 여러 나라를 가보고 한참 뒤에야 알았다. 가장 큰 명산적 요소는 사람이 어디에나 살 수 있다는 점이다. 지리산은 흙으로 뒤덮인 육산이다. 나무와 식물이 잘 자란다. 물도 많이 나온다. 산이나 사람이나 물이 좀 많으면 좋다. 그래야 먹을 것이 있다.‘인삼 빼고는 다 자란다’는 산이 지리산이다. 텃밭도 가꿀 수 있고, 부분적인 농사도 가능하다. 그만큼 생태계가 풍부하다. 1000m 넘어가는 산봉우리가 40여개. 이 산봉우리 고지대에도 물이 난다. 위에서
전북의 진안고원. 해발 300~400m 높이에 있다. 고원이니까 시원하다. 그래서 인삼이 잘 자란다. 일교차가 큰 곳에서 농작물의 약효가 발생한다. 이런 고원지대는 도 닦기에도 좋다. 여름에 시원하기 때문이다. 이 진안고원에 높이 솟은 산이 마이산(馬耳山)이다. 바위 봉우리 두 개가 흡사 말 귀 같은 형상으로 뾰쪽 솟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거대한 암봉 두 개가 나란히 솟아 있는 모습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매우 이채로운 모습이다.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이다. 높이도 거의 같다. 바위가 있는 곳에 지령(地靈)이 있고, 지령이
6·25전쟁을 전후하여 지리산 일대에서 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림잡아 4만명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근거는 이렇다. “2000년대 초반 지리산 생명평화운동을 할 때 지리산에서 죽은 빨치산과 군경 토벌대의 위령제를 합동으로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이때 양쪽 죽은 사람 가족들의 위령제 신청을 받아보니까 그 숫자가 4만명쯤 되었습니다.” 지리산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는 ‘지리산 시인’ 이원규(59)의 증언이다.왜정 때 보광당이 숨어든 지리산왜정 때 지리산에는 보광당(普光黨)이 숨어 있었다. 일제의 학병 징용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다
중년 남자의 로망이 있다. 할리 오토바이도 아니고, 오디오도 아니고, 세계여행도 아니고, 바다낚시도 아니고, 야생화 찍는 것도 아니다. 산 밑에 텃밭 있는 조그만 집 하나 지어 놓고 밥 먹고 나서 뒷산 오솔길 산책하며 사는 삶이다.남자는 숲에 들어갔을 때 원초적 편안함을 느낀다. 여기서 원초적이라는 의미는 깊은 편안함, 만족감, 살롬을 뜻한다. 숲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필자는 장성 축령산 편백숲 밑에다가 지어 놓은 황토집 글방에 많이 머무른다. 15평(50㎡) 넓이에 방 2개와 부엌 하나의 단순한 구조이다. 아침저녁으로 글
전라도는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대이다. 논밭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특히 쌀농사를 짓는 데에는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전라도에는 고대부터 저수지가 축조됐다.대표적으로 세 곳의 대규모 저수지가 있다. 익산의 미륵사지 앞에는 둘레 70리(27㎞) 크기의 저수지 황등제가 있었고, 김제 금산사 옆에는 벽골제가 있다. 또 고창 선운사 옆에는 눌제가 있었다. ‘제(堤)’는 물을 가두는 제방(堤防)을 가리킨다. 이 세 곳의 ‘제’ 옆에는 공통적으로 미륵사찰이 있었다. 쌀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믿는 불교신앙이 미륵신앙
우리나라에는 지역감정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지역감정도 한 개가 아니고 여러 개가 있다. 가장 큰 지역감정은 이북, 즉 북한 지역 사람들이 가졌던 차별의식이었다. 조선조 500년 동안 이북은 차별당했다. 여기서 차별이라 하는 것은 고위직 진출이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평양(평안)감사 자리이다. 이북 출신이 평양감사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 이남 출신이 이 노른자 벼슬을 차지하였다. 조선에서 중국 북경(베이징)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신들이 중간에 반드시 들르는 지역이 평양이다. 사신으로 가는 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