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張俊河)는 일제 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이 된 독립투사다. 그는 잡지 사상계(思想界) 발행으로 문화 발전과 민권쟁취의 선도자가 되는가 하면,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맨몸으로 맞서 싸웠다. 옥처럼 맑고 티없는 귀공자 타입의 전형적인 백면서생으로 보이는 그가 어떻게 그다지도 대조되는 ‘투사의 삶’을 살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기독교 목사인 장석인(張錫仁)과 김경문(金京文) 사이에서 4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이듬해 3·1운동에 참여하며, 일제의
자그마한 체구, 온화한 표정, 단아한 선비의 전형으로 생전의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이 떠오른다. 아호 일석이나 별명 ‘대추씨’에 담긴 대로 그분의 삶은 지조 그 자체였다. 일제가 날조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온갖 고문과 옥고를 치르면서도 일석은 우리 국어를 지켜냈다. 1960년 4·26 교수단 시위 때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다. 5·16 군사정변 뒤 동아일보 사장 때는 군정을 거부했고, 유신체제 아래서는 ‘민주회복국민회의’의 고문으로 독재와 결연히 맞섰다. 또 1980년대 5공화국 때도 시국선
박열(朴烈)은 일본 천황 일가족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내각총사퇴까지 몰고 온 풍운아다. 박열은 이 사건으로 장장 23년간 옥고를 치른 후 광복 한국에 돌아와서는 때때로 총리·장관 물망에 오르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는 1902년 2월 3일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 98번지 샘골(현 문경시 모전동)에서 아버지 박지수(朴芝洙)와 어머니 정선동(鄭仙洞)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함양 박씨)은 전통적인 유가 가문으로 존경을 받아오던 지방 명문이었다. 모친의 꿈에 어느 날 밤 청룡·황룡이 오두막집 방문으
철기 이범석은 약관 20세인 1920년 청산리전투를 지휘하여 항일무장독립투쟁 사상 최대의 대첩을 이룩한 전설적 영웅이다.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40대에 환국해서는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을 맡아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한편, 방대한 조직으로 뿌리를 내린 민족청년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철기는 1900년 10월 20일(음력) 궁내부 농상공부 관리(정3품) 이문하(李文夏)와 연안이씨 사이의 2녀1남 중 막내로 서울 용동(지금의 명동, 중국대사관 건물 뒤채)에서 태어났다. 그는 만년에 구술한 자서전 우등불에서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