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잼버리대회가 파행 끝에 어렵사리 막을 내렸다. 이런 긴박한 와중에도 정치권은 어김없이 낯뜨거운 책임 공방을 벌였다. 정쟁은 가뜩이나 어려운 사태 수습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실제로 부실한 대응과 격렬한 정쟁으로 인해 재난 수습 과정 자체가 또 다른 비극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세월호 참사가 대표적이다. 이태원 참사도 닮은꼴로 번질 기세다.이런 현실에 비추어 우리가 반드시 음미해 볼 만한 재난 수습 현장 보고서가 있다. 바로 로버트 젠슨의 ‘개인 소지품’(Personal Effects·2021)이다. 여기서 개인 소지품이란,
지난 4월 27일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예상대로 미국의 관심은 온통 중국을 어떻게 포위·견제하느냐에 쏠려 있다. 돌이켜보면, 중국은 미국 주도 세계 질서로 들어와 한때 냉전 종식의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패권 국가가 되어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중국은 왜 패권화를 서두를까. 미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이런 난제를 미국 측 입장에서 깊이 파고든 전략론이 있다. 바로 마이클 베클리와 할 브랜즈의 ‘위험 구간’(Danger Zone·2022)이다. 현재 중국은 정점에 도달하여 상당한
우리나라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33.4%다. 2000년에 15.5%였다가 20여년 만에 갑절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가속될 전망이다. 바야흐로 홀로 살기가 대세인 시대다. 그럼에도 1인 가구 하면 여전히 외로움, 고립, 심지어 고독사 등을 떠올리는 우리의 인식은 구태의연하다. 과연 1인 가구의 물결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이런 심각한 물음을 푸는 데 상당한 실마리가 될 만한 탐사보고서가 있다. 바로 에릭 클라이넨버그의 ‘고잉 솔로’(Going Solo·2012)다. ‘go solo’란 적극적으로
오랫동안 유시민은 좌파의 스피커 역할을 했다. 그는 노무현의 정치적 호위무사이자, 문재인의 절대적 옹호자였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그 역할이 김어준에게 넘어갔다. 어쩌다 유시민은 지고 김어준이 떴나. 그것은 단순한 인물 교체인가, 엄청난 시대 변화인가.이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참고해 볼 만한 평론이 있다. 바로 강준만의 ‘정치 무당 김어준’(2023)이다.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김어준은 지식인도 언론인도 논객도 아니다. ‘어용’이긴 해도 지식인임을 자처하며, 논객으로 이름을 떨친 유시민과도 결이 다르다. 그에게 팩트나
요즘 화두는 단연 챗(Chat)GPT다. 이런 대화형 인공지능(AI) 서비스는 이미 변호사자격시험이나 의사자격시험을 거뜬히 통과할 정도다. 더구나 그 능력은 이제부터 가속적으로 향상될 전망이다. 이처럼 인공지능 서비스나 이를 장착한 로봇이 다방면으로 확산한다면, 과연 우리 인간이 일할 자리는 남아나기나 할까.이 심각한 물음에 천착하여 우리에게 상당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인상적인 탐사보고서가 있다. 바로 엘렌 러펠 셀의 ‘일자리’(The Job·2018년)이다. 부제는 ‘근본적 변동기의 노동과 그 미래’다. 제목과 부제가 시사하듯이 이
얼마전 김부겸 전 총리는 한 강연에서 “보수는 덜 뻔뻔해져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것은 보수가 탐욕에 사로잡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다는 비판이다. 동시에 타인에 대한 공감이 진보의 특기라는 자랑(?)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진보 세력에게 공감은 전가의 보도다.진보뿐만이 아니다. 사실 오늘날 좌우를 막론하고 공감을 거의 절대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문제가 공감이 부족해서 생긴다고 믿는다. 해법은 간단하다. 공감을 늘리자는 것이다. 이런 풍토에서 그런 상투적 해법에 과감하게 반기를 들며, 공감이 이로울 때보다 해로울
예전만은 못해도 설날의 귀성 전쟁은 여전히 뜨겁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혈육과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관습이 강고하다. 하지만 명절에 웃는 얼굴로 만난 가족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헤어지기도 한다. 사실 어느 집에나 작든 크든 갈등이나 다툼이 존재한다. 요즘에는 그것을 서슴없이 법정으로 가져가서 원고와 피고로 격돌하는 가족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마침 법원 판결문 900여건을 바탕으로 오늘날 가족의 위기를 생생하게 파헤친 흥미로운 보고서가 있다. 바로 박민제의 ‘가족끼리 왜 이래’(2018)이다. 소송은 말 그대로 마지막 수단이다. 유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은 조금은 무겁다. 팬데믹은 그치지 않고 경기침체는 길어지고 있다. 더구나 많은 학자들은 지구온난화를 이대로 방치하면 기상이변은 물론, 머지않아 대멸종을 각오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과연 인류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이 화두를 붙들고 오랫동안 씨름해온 것이 바로 제러미 리프킨의 ‘회복력 시대’(The Age of Resilience·2022)이다. 우리는 지난 수백 년 동안 효율성·생산성을 앞세워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성장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의 필요에 순응하
월드컵 열기로 지구촌이 들썩인다. 이처럼 단일 종목 대회가 온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는 것은 축구가 유일하다. 심지어 축구 때문에 도처에서 폭력이나 살인이 벌어지고, 국가 간에 전쟁까지 불사한다. 그만큼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다.마침 유명 축구클럽을 찾아다니며 그 ‘무엇’을 진지하게 탐색해 본 흥미로운 탐사보고서가 있다. 바로 프랭클린 포어의 ‘축구는 어떻게 세상을 설명할까’(How Soccer Explains the World, 2004)다. 무엇보다 축구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역사·문화·경제·종교
가을이 사그라들기 전에 왠지 소설이라도 한 권 읽어야만 할 것 같다. 마침 요즘 세태를 통해 미래 사회의 기묘한 모습을 상상해 본 흥미진진한 문제작이 있다. 바로 무라타 사야카의 ‘소멸세계’(消滅世界·2015)다. 이미 우리 주변에서 연애·결혼·가족·출산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출산 소멸은 결국 세계 소멸로 이어진다. 그래서 미래 사회는 연애·결혼·가족이 소멸되어도 어떻게든 출산만큼은 이어가려고 발버둥치게 된다는 것이 작가의 발칙한 상상이다.소설은 미래 어느 시점에서 시작된다. 전쟁으로 남자들이 전쟁터로 끌려나가자 출산이 급감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빈번하게 ‘자유’를 입에 올린다.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의 의미가 모호하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전통적인 자유론은 국가의 기능이 강화될수록 개인의 자유가 위축된다고 본다. 그것이 ‘작은’ 정부론의 배경이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경제 위기 등 최근의 사태만 보더라도 더 큰 국가의 역할이 요구된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바로 그런 난제를 인상적으로 풀어헤친 묵직한 역작이 애쓰모글루·제임스 로빈슨의 ‘좁은 회랑’(The Narrow Corridor·2019)이다. 우리는 자유로운 결집, 결사, 저항, 선
윤석열 대통령은 “능력 위주로 사람을 뽑아, 오로지 결과로 말하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지극히 당연하게 들린다. 문제는 그에게 능력 있는 사람이 서오남(서울대 출신·50대·남자)이라는 점이다. 즉 전통적 엘리트다. 또한 결과만 강조할 뿐, 과정에 대한 고민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 시대를 그런 개발연대식 인사 방식으로 헤쳐나갈 수 있을까.해외의 사례이긴 해도, 이런 답답함을 펑 뚫어주는 신선한 목소리가 있다. 바로 ‘오드리 탕, 디지털과 인공지능의 미래를 말하다’(オ-ドリ-ㆍタン, デジタルとAIの未來を語る·2020)이다. 이것은
야당 대표가 내년도 정부 예산안을 ‘비정한 예산’이라고 비판했다. 물론 우리도 복지를 크게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소환되는 것이 북유럽 복지제도다. 실제로 언론이나 전문가들이 전하는 북유럽 이야기는 늘 우리를 감동시킨다.그런데 북유럽 복지에 대한 우리의 동경을 사정없이 뒤흔드는 생생한 현장 보고서가 있다. 바로 박지우의 ‘행복한 나라의 불행한 사람들’(2022)이다. 저자는 스웨덴 현지에서 직장을 다니며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스웨덴 복지제도의 실상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그것이 풍성한 혜택을 제공하
“재난은 불평등하다” 존 머터_ 재난 불평등코로나, 가뭄, 산불, 폭염, 폭우 등 우리에게도 재난이 일상화되고 있다. 이런 재난은 누구에게는 약간의 불편함만 주지만, 누구에게는 크나큰 고통을 준다. 심지어 목숨까지 앗아간다. 실제로 얼마 전 폭우로 반지하에 사는 장애인 가족이 참변을 당해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이처럼 재난이 연령·인종·계층·지역 등에 따라 불평등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인상적으로 파헤친 문제작이 있다. 바로 존 머터의 ‘재난 불평등’(원제: The Disaster Profiters·2015)이다. 최근의 세계적 재난 사
나라를 되찾은 지 77년이나 흘렀다. 그럼에도 일제의 어두운 그림자는 걷히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일본의 ‘완벽한’ 사과를 종용하고, 일본은 그럴 의향이 없다. 이로 인해 우리의 원한은 도리어 강렬해지고 있다. 과연 우리가 역사의 그림자를 벗어날 방도는 없을까.이런 난제를 푸는 데 상당한 참고가 될 만한 수준 높은 연구서가 있다. 바로 임지현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Victimhood Nationalism·2021)이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란, 후속 세대들이 앞 세대가 겪은 희생자의 경험과 지위를 세습하고, 세습된 희생자의
한동안 어디를 가는 것은 곧 무엇을 먹으러 가는 것이었다. 요즘은 먹으러 가는 것도 사진 찍으러 가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그만큼 음식도 먹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음식뿐만이 아니다. 무엇이든 소셜미디어(SNS)에 올려, ‘좋아요’를 받아 내려고 안달들이다. 왜 우리는 이토록 타인의 인정을 갈망하는가. 그런 현상은 정상적인가, 병리적인가.이러한 물음에 부딪히면 저절로 떠오르는 유명한 철학서가 있다. 바로 악셀 호네트의 ‘인정 투쟁’(Kampf um Anerkennung·1992)이다. 인간은 더불어 사는 사회적 존재
흔히 동물을 기르면 생명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실제로 반려 문화의 확산에 따라 동물권이나 동물복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당연히 이런 생명 존중의 궁극적 대상은 인간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조금은 불편한 의문도 없지 않다. 우리의 동물 사랑은 인간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반려 문화는 단지 순수한 사랑의 발로인가.바로 이런 물음에 상당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독특한 동물 담론이 인류학자 전의령의 ‘동물 너머’(2022)이다. 저자는 우리의 시선을 ‘동물’에만 고정하지 말고, 그 ‘너머’의 사회·경제·정치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현충일 추념사에서 “영웅들의 용기를 국가의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한마음으로 존경하는 영웅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에게 인물이 없다기보다 인물을 존중하고 기리는 문화가 부족한 탓이다. 그래서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낸 6·25전쟁을 통해서조차도 영웅이 별로 탄생하지 못했다.이런 와중에 뒤늦게나마 우리에게 잊혔던 6·25 영웅을 되찾아준 소중한 기록이 있다. 바로 재미 칼럼니스트 한우성의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2005)이다. 재미동포 2세인 김영옥(1
지난 대통령선거에서는 여야가 요란한 청년 담론을 앞세워 청년세대 쟁탈전을 벌였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그런 풍조가 자취를 싹 감췄다. 석 달도 채 안 되어 청년 문제가 모조리 해결된 것은 아닐 터다. 그렇다면 요즘 범람하는 청년 담론은 허구란 말인가.이런 의문에 상당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인상적인 세대 담론이 있다. 바로 중앙대 신진욱 교수의 ‘그런 세대는 없다’(2022)이다. 우리는 흔히 “○○세대는 이러이러하다”라는 식으로 각 세대를 어떤 특정 집단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곤 한다. 그러나 같은 세대 안에서도 다양성이 존재하는
이른바 ‘검수완박’ 입법 폭거는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켰다. 더구나 충격적인 일은 이런 폭거가 ‘민주화’ 세력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좌·우를 막론하고 우리 내면에 어떤 부정적인 기제가 공통적으로 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바로 이런 심각한 화두를 날카롭게 파고든 것이 임지현 등의 ‘우리 안의 파시즘 2.0’(2022)이다. 이 책은 이미 20여년 전에 나온 ‘우리 안의 파시즘’(2000)의 후속편이다. 저자들은 일제, 분단, 냉전, 독재 등을 거치며 우리 심성 내부에 파시즘적 결이 새겨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