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황해도 재령 출생. 본명 송복희
황해도 해주예술학교 성악과 졸업

1951년 1·4 후퇴 때 단신 월남

창공악극단 가수로 데뷔
KBS라디오 ‘가로수를 누비며’ 진행

1984년~현재 전국노래자랑 진행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상, 한국방송프로듀서상,
보관문화훈장, KBS바른언어상
현 원로연예인 상록회 회장
무대 뒤에서 대본을 읽고 있는 송해씨. ⓒphoto 이구희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무대 뒤에서 대본을 읽고 있는 송해씨. ⓒphoto 이구희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단언컨대, 송해(宋海)씨 같은 연예인은 대한민국에 없다. 전국 방방곡곡 가장 넓은 지역에서 모든 연령층으로부터 골고루 사랑을 받는 연예인은 송해씨가 유일하다. 전국노래자랑 녹화장 주변에는 언제나 10대들이 몰려든다.

유명 초대가수를 보기 위해서인데 송해씨 역시 10대들이 사인 받고 싶어하는 스타다. 그가 보이면 10대들은 “송해 아저씨다~”라며 발을 구른다. 그래서 그가 탄 버스는 언제나 제작진이 지키고 서 있어야 한다. 잠깐 방심하면 여중생 10여명이 순식간에 노트를 들고 올라탄다.

10대 여중생이 사인받고 싶어하는 83세 MC 송해. 그를 지난 3월 20일 고흥읍 팔영체육관 귀빈 대기실에서 만났다. 기자가 들어갈 때 그는 대본을 한창 읽고 있었다. 분장을 하기 전이라 얼굴이 꺼칠하게 느껴졌다. 대기실에는 화장 담당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국노래자랑이 30년을 맞았습니다. 최장수 프로그램이 된 이유를 뭐라고 보십니까.

“처음 시작할 때는 군 단위를 중심으로 돌았어요. 그때는 여성 출연자 10명 중 7명이 한복을 입고 나왔습니다. 전국을 한 바퀴 돌면 3년 정도 가겠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읍이 시로 바뀌는 등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갈 데가 많아졌어요. 또 광역시의 구(區)들이 전국노래자랑을 유치하고 싶어했습니다. 서울만 해도 자치구가 25개나 되니까요. 또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지역축제가 많아지면서 전국노래자랑은 빠질 수 없는 이벤트가 되었고요. 복합적으로 갈 데가 무궁하게 되었습니다.”

전국노래자랑에서 MC의 역할은 뭐라고 보나요.

“전국노래자랑의 주인은 시청자인 국민이고, 전국노래자랑의 꽃은 지역 출연자들이에요. 사회자와 제작진은 그 꽃들이 아름답게 피도록 물을 주고 가꿔주는 일을 할 뿐이죠.”

1994년 진행자에서 하차했다가 시청자들 압력으로 복귀했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내가 내 개인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죠. 아집도 욕심도 많았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폭이 넓어졌다고 봐요.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 생애가 다할 때까지 전국노래자랑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때 방송국에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들었습니다.

“전화가 하도 많이 걸려와 프로그램 제작 파트는 말할 것도 없었고 행정 파트까지 달려들어 전화를 받아야했다고 합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G(global)세대가 세계 빙상의 역사를 다시 썼습니다. 전국노래자랑에도 G세대가 많이 출연하는데.

“젊은 세대의 놀고자 하는 흥(興)은 우리 세대가 도저히 못 따라가요. 요즘 젊은 세대는 등장부터 재미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뭔가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게 정말 대단해요.”

전국노래자랑에서 주로 트로트가 많이 불립니다. 한국인에게 트로트는 뭐라고 생각합니까.

“한국인은 흥과 멋과 신바람의 민족입니다. 초창기에는 대부분이 트로트였지만 지금은 별개 다 있어요. 노래와 음악은 우리네 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입니다. 노래와 음악이 없다면 그 순간부터 적막해지고 답답함을 느끼게 되지요. 노래와 음악에서 우리를 당할 민족은 없습니다.”

지금 10~20대에는 댄스음악과 랩이 대세처럼 보입니다. 이걸 즐기며 성장해온 세대가 40~50대가 되면 역시 댄스음악과 랩을 ‘추억의 노래’로 부른다고 보십니까.

“단연코 그렇게는 안 된다고 봐요. 내가 학사주점을 운영해봐서 아는데 한국 사람은 한잔하고 30분 지나면 우리 노래가 저절로 나와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국인은 우리 노래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노래’는 트로트, 뽕짝을 말하는 거겠죠.

“주로 트로트와 여기서 변형된 모든 노래를 망라합니다. 나는 우리 노래를 ‘흘러간 노래’라고 하는 걸 제일 싫어합니다. 추억의 노래, 다시 불러보고 싶은 노래라고 해야 맞죠. 저는 지금의 젊은 세대 역시 나이가 들면 ‘우리 노래’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믿어요. 그러기 위해선 우리 노래가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 정서를 이어나가는 역할을 전국노래자랑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늘 하는 얘기지만 노인들이 건강해야 나라가 건강해집니다. 노인들이 다음 세대에 이어줄 것을 제대로 전달해야 합니다.”

1·2차 예심에서 보니까 이주여성이 네 명이나 참가했더군요.

“이주여성들의 공통된 꿈이 뭔지 아세요? 그건 전국노래자랑 본심에 나가 그 비디오를 자기 나라에 보내주는 것입니다. 또 이주여성들은 자기 나라에 가서 전국노래자랑을 해달라고 합니다. 그곳에도 한국 사람이 아주 많이 산다면서.”

한국 사회는 노인 차별이 심합니다. 특히 방송국은 나이 차별이 가장 심한 곳인데요.

“주변에 보면 특수 고급 인력이 한창 일할 나이에 물러나는 걸 많이 봐요. 정년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공식을 외우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경험이라고 하잖아요. 숱한 경험을 (다음 세대에) 이어주지 않으면 그게 끊겨요. 한번은 전국노래자랑에 103세 할머니가 85세 딸, 그리고 세 살짜리 증손녀와 출연한 적이 있어요. 103세 할머니가 ‘달아 달아 밝은 달아~’를 부르니 세 살 손녀가 글쎄 이걸 따라 부르는 겁니다. TV에서 이런 걸 보여줘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핵가족화 되면서 잃은 게 너무 많아요.”

그런 방송국 문화에서 83세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데 자부심을 느낄 것 같습니다.

“70~80대는 내가 자기들의 자존심이라고 합디다. 그런 자존심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출연자들로부터 끼를 받아서 내가 그분들에게 다시 나눠 주는 것이지요.”

전국에 송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아는 체를 합니까.

“예전에는 제가 지하철을 타면 ‘전국노래자랑 간다’ ‘코미디언 송해 간다’고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인사도 굉장히 세련되게들 하세요. 한번은 지하철을 탔는데 뒤쪽에서 전국노래자랑 시그널 음악이 들리는 겁니다. 제가 반가워서 손을 들어 인사를 했죠.”

전국노래자랑을 보면 망가지는 사람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저는 출연자들에게 준비해온 것 그대로 하라고 합니다. 망가지는 연기,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닙니다. 영리한 사람이 하는 겁니다. 멍청한 사람은 절대로 망가지는 모습을 못 보여줘요. 망가지는 건 정상에서 한 단계 올라가는 겁니다.”

수많은 사연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텐데, 가장 잊지 못할 출연자는 누구입니까.

“전국노래자랑에는 차별이 없으니까 장애인도 많이 나오잖아요. 여기 나와서 삶의 용기를 얻은 사람이 많습니다. 전국노래자랑은 추석과 설 때만 생방송으로 진행합니다. 언젠가 설 특집 때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생방송을 하는데 연출과 작가가 고민을 털어놓아요. 63세 되는 시각장애인이 예심을 통과했다는 겁니다. 정월 초하루 생방송인데 하고 걱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대로 하자고 했습니다. 시각장애인 순서가 되었는데 그분이 딸의 손을 잡고 17개의 계단을 올라와 무대에 섰습니다. 그 장면에서 콧날이 시큰해지더군요. 딸이 마이크를 아버지 손에 쥐어주었죠. 방청석에서 모든 사람이 서서 앙코르를 신청했고 결국 세 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장애인이 많이 나오게 됐죠.

고부간의 갈등을 풀어준 적도 있습니다. 한번은 며느리가 나와 노래를 부르고 시어머니가 춤을 추었죠. 처음엔 ‘집구석 꼴 좋다’며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사연인 즉슨 며느리가 인물도 없고 친정에 여유도 없고 음식도 잘 못해 늘 죄송하게 생각했대요. 그래서 하루는 어머니께 뭘 제일 하고 싶으시냐고 물었더니 ‘네가 노래자랑 나가 노래하면 내가 춤 한번 추고 싶다’고 했다는 겁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얘기입니까?”

잊지 못할 지방은 어디가 있습니까.

“전국 어디를 가나 아스팔트가 안 깔린 곳이 없어요. 충주에 가면 가로수로 사과나무를 심어놓았잖아요. 충주에 가면 충주가 좋다가 다른 데 가면 또 거기가 맘에 들어요. 선조들이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했는데 가는 곳마다 그 말을 실감합니다. 현지에서 목욕탕 갔다가 시간 나면 사찰과 명소를 찾습니다. 그걸 보고 느껴야 제대로 소개할 수 있게 되거든요. 가고 싶은 명소가 많아요”

왜 지역에 내려가면 목욕탕에 갑니까.

“목욕탕 가서 지역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지역 실정에 대해 파악이 되거든요. 그리고 재래시장에 가서 아낙네들 얘기를 들어보면 감이 오거든요.”

녹화 중 MC 송해씨가 출연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녹화 중 MC 송해씨가 출연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송씨는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송복희. 1951년 1·4 후퇴 때 부모와 형·여동생을 남겨두고 혈혈단신 월남했다. 그때 나이 스물넷.

고향땅 재령엔 가보셨나요.

“제가 금강산관광 1호로 북한에 갔었지요. 물론 고향과는 반대쪽이었지만. 그 뒤에 모란봉까지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갈)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황해도 재령은 뭐가 유명합니까.

“나무리뻘 연백평야죠. 김제 만경평야를 연상하면 될 거요. 일제의 조선총독이 나무리뻘 쌀만 먹었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밥을 하면 워낙 기름져서 파리가 앉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지요.”

코미디언 배삼룡씨가 세상을 떴을 때 많은 감회가 드셨을 텐데요.

“제가 배삼룡·구봉서 선배보다 두 살 아래죠.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 몰랐어요. 그날 빈소에 갔더니 보도진은 많이 기다리고 있는데, 빈소는 쓸쓸했어요. 안되겠다 싶어 이용식과 엄용수에게 연락해 후배들을 데리고 오라고 했죠. 엄용수랑 이용식이 제일 애를 썼어요.”

코미디언 배삼룡을 희극배우로서 평가해 주시지요.

“배삼룡 선배는 한국 희극의 길이요, 개척자요, 할아버지였죠.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서 고생고생하고 간 거요.”

이렇게 말했을 때 송씨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송씨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망가지는 연기, 거 영리하지 않으면 못해요. 정극(正劇)과 비극을 모르면 희극은 절대로 못해요. 우리는 정극과 비극을 다 배운 뒤 희극을 한 거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찰리 채플린의 말이 떠올랐다. 찰리 채플린은 비극을 연기할 줄 알아야만 비로소 희극을 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과 비교하면 당시 희극인들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말이 아니었죠.

“그때는 집안에서부터 외면 받으면서 배우를 시작했어요. 희극배우들은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이 힘든 세월을 살아온 겁니다. 배삼룡 선배는 무대 뒤에서 자장면 한 그릇을 셋이 나눠 먹던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죠. 요즘은 나오자마자 돈이에요. 물질만능이 각계각층을 병들게 만들었지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지금의 코미디를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 보는 사람에 따라 각도가 다르겠죠. 요즘 세대에 맞는다고 보니까 그렇게 하겠죠. 하지만 정통 코미디는 아니죠. 딴 걸 하고 있는 거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배삼룡 선배가 말년에 그렇게 적적하고 외로웠던 것은 무대 출신 희극배우들의 맥이 끊어졌기 때문이었어요. 임하룡이가 마지막 세대죠. 지금은 희극이 뭔지도 모르는 후배들이 많죠.”

정치권의 유혹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뿌리쳤습니까.

“유혹을 많이 받았죠.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쪽이 내 전공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또 내가 이북사람이라 (지역적) 근거도 없었고. 내가 정변(政變)을 얼마나 많이 겪었수? 그러니까 그쪽 안 쳐다봤지.”

조성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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