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3일 제주 4·3평화공원을 찾아 참배하는 국민의힘 최고위원 후보 태영호 의원. photo 태영호 의원 페이스북
지난 2월 13일 제주 4·3평화공원을 찾아 참배하는 국민의힘 최고위원 후보 태영호 의원. photo 태영호 의원 페이스북

국민의힘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한 태영호 의원(서울 강남구갑)의 ‘4·3사건’ 관련 발언에 더불어민주당이 맹공을 퍼붓고 있다. 고위급 탈북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의원은 지난 2월 13일 제주 4·3평화공원을 찾은 자리에서 “4·3사건은 명백히 김씨(김일성) 일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라며 “김씨 정권에 몸담다 귀순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느끼며 희생자들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한다”고 밝혔다.

태영호 의원의 이 같은 발언에 제주 출신 민주당 정치인들은 일제히 발끈하고 나섰다. 오영훈 제주지사는 “태영호 의원은 제주 4·3이 북한 김일성의 지시로 촉발됐다며 색깔론에 기댄 거짓주장을 펼쳤다”며 “제주 4·3의 역사적 비극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국민의힘 태영호 국회의원은 4·3 희생자와 유족, 제주도민에게 사과할 것을 엄중히 요구한다”고 밝혔다.

 

태영호, “4·3 유발 장본인 김일성”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를 맡고 있는 위성곤 의원(제주 서귀포시)도 “지울 수 없는 아픔에 또다시 상처를 덧댄 망언에 대해 태영호 의원은 즉각 사과하고 최고위원직 후보를 사퇴하라”고 밝혔다. 위성곤 의원은 지난 2월 15일에는 같은 당 송재호(제주시갑), 김한규(제주시을) 의원과 함께 국회 윤리위에 태영호 의원 징계안까지 제출한 상태다.

제주 출신 이들 민주당 국회의원 3명은 공동입장문을 내고 “지난 2003년 제주 4·3 진상보고서에는 ‘제주 4·3은 군경의 진압 등 소요사태 와중에 양민이 희생된 사건’으로 결론을 내린 바 있다”며 “과거 남로당 핵심 주동자들도 제주 4·3이 김일성의 지시로 촉발되지 않았다고 밝혔다”는 입장을 내놨다.  

민주당 정치인들의 파상공세에 태영호 의원은 “나는 북한 대학생 시절부터 4·3사건을 유발한 장본인은 김일성이라고 배워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만일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이 김일성의 5·10 단선 반대노선을 집행한다며 무장폭동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아울러 “4·3사건 주동자인 김달삼, 고진히(희) 등은 북한 애국열사릉에 매장되어 있다”고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태 의원의 반박처럼, 북한 당국은 공식 백과사전인 ‘조선대백과사전’을 통해 제주 4·3사건을 김일성의 호소에 호응해 촉발된 사건으로 규정하고, 김달삼·고진히·강규찬 등 4·3사건 주동자들을 ‘통일애국열사’로 받들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제주 4·3사건을 ‘제주도 인민봉기’로 명명하고, “미제 침략자들이 조작한 5·10 망국 단독선거를 반대하여 주체 37(1948)년 4월 3일 제주도 인민들이 일으킨 반미(反美) 구국항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울러 조선대백과사전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북과 남의 전체 조선인민들에게 민족분열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조선인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조선 최고입법기관을 선거하고 전 조선적인 통일적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시었다”며 “위대한 수령님의 호소를 높이 받들고 남조선 노동계급과 함께 제주도 인민들은 ‘유엔 임시조선위원단’의 입국을 반대배격하는 주체 37(1948)년 2·7구국투쟁에 일어섰다”고 그 배경을 밝히고 있다.

북한에서 말하는 ‘2·7구국투쟁’은 1948년 2월 7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일으킨 ‘2·7총파업’을 뜻한다. 4·3사건이 김일성의 호소로 촉발됐다는 ‘2·7총파업’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실제로 조선대백과사전은 “주체 37(1948)년 3월 말부터 제주도 인민들은 2·7구국투쟁 때 탈취한 무기로 인민무장자위대를 편성하고 한나산(한라산)을 중심으로 하여 산악지대에 들어가 근거지를 꾸렸으며 4월 3일 새벽 무장항쟁으로 넘어갔다”며 “그들은 ‘미제를 타도하라’ ‘단선단정 결사반대’ ‘유엔 임시조선위원단은 철거하라’ ‘인민의 원쑤(원수) 반동 무리들을 처단하라’ ‘주권은 인민위원회로’ 등 구호를 외치며 도처에서 경찰지서들을 습격하고 경찰들과 주구(走狗)놈들을 처단하였으며 미제에 의하여 강제해산 당하였던 인민위원회들을 다시 복구하였다”고 사건 진행과정 역시 소상히 밝히고 있다.

 

‘통일애국열사’ 김달삼·고진히·강규찬

조선대백과사전은 4·3사건의 주동자로 꼽히는 김달삼·고진히·강규찬 등에 대해서도 각각 ‘통일애국열사’라는 부제를 달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우선 김달삼에 관해서는 “주체 37(1948)년 4월 제주도 인민봉기와 5·10 단선 반대투쟁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며 “주체 37(1948)년 8월 남북총선거 당시 제주도 대표로 공화국 북반부에 들어왔고 그 후 조국통일을 위한 책임적 위치에서 어려운 혁명임무를 담당수행하였으며 조국해방전쟁 시기에 적구(敵區)에서 활동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어 희생되었다”고 적고 있다.

북한에서 말하는 ‘8월 남북총선거’는 1948년 8월 25일 북한에서 실시한 ‘제1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뜻하고, 조국해방전쟁은 ‘6·25전쟁’을 말한다. 4·3사건 주동자인 김달삼이 이 과정에서 모두 핵심적 역할을 했음을 밝힌 것. 아울러 조선대백과사전은 김달삼에게 “주체 82(1993)년 7월 15일에 공화국 영웅 칭호가, 주체 79(1990)년 8월 15일에는 ‘조국통일상’이 수여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태영호 의원이 김달삼과 함께 4·3사건 주모자로 지목한 ‘고진히(희)’에 대한 항목 역시 비슷하다. 조선대백과사전은 고진히에 대해 “주체 34(1945)년 8·15 후 남조선노동당에 입당하였으며 제주도당부에서 부녀부장으로 사업하였다”며 “미제가 조작한 ‘유엔 임시조선위원단’을 반대배격하며, 5·10 망국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 인민들의 투쟁에서 남편(강규찬)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김일성이 직접 이들 부부(강규찬·고진히)를 만나 격려했다는 대목이다. 조선대백과사전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1차 회의에 참가한 그들 부부(강규찬·고진히)를 회의장 휴게실에서 친히 만나주시었으며 제주도에서 잘 싸운 부부 대의원이 장하다고 높이 치하해 주시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위대한 수령님(김일성)의 온정으로 중앙고급지도간부학교(인민경제대학의 전신)에서 공부하였으며 평양시 인민위원회 보건부 부부장으로 사업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고진히의 남편인 강규찬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 역시 마찬가지다. 조선대백과사전은 “강규찬과 그의 안해(아내) 고진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위원회의 제1기 대의원”이라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그들 부부에 대하여 싸우는 부부 대의원이라고 하시면서 높이 평가하여 주시었다”고 김일성의 평가를 소개하고 있다.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강규찬·고진히 부부는 주체 80(1991)년 1월과 주체 84(1995)년 8월에 각각 공화국 영웅칭호와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강규찬·고진히 부부가 조국통일상을 받은 1995년은 김일성이 이미 사망(1994년)하고 아들 김정일이 공식 집권한 직후다. 이들 부부에 대한 평가가 김정일 대에까지 이어진 셈. 조선대백과사전은 김달삼을 비롯한 강규찬·고진히가 모두 애국열사릉에 묻힌 사실 역시 확인하고 있다.

다만 북한 당국이 제주 4·3사건이 결과적으로 실패한 원인 중 하나를 박헌영 탓으로 돌리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조선대백과사전은 “제주도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은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의 야수적 폭압과 미제의 고용간첩인 박헌영 도당의 간첩행위로 말미암아 계속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7총파업, 4·3사건, 여순사건 등은 모두 박헌영이 당수로 있던 남로당 주도로 일어난 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대백과사전에서는 김일성의 라이벌이었던 ‘박헌영’이란 이름 자체가 통째로 빠져 있다.

태영호 의원은 “남로당의 다른 지도자들은 박헌영과 함께 처형되거나 숙청되었지만 김달삼·고진히 등 무장폭동 주모자들은 북한으로 올라가 영웅으로 대접받다가 후에 애국열사릉에 매장됐다”며 “남로당의 무장폭동을 잘 다루어주지 않는 김일성이지만 다부작 드라마 ‘한나(한라)의 메아리’를 만들어 김씨 일가에 대한 충실성 교양에까지 이용했다”고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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