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호 교수가 재배 중인 홍쌈추(붉은 쌈추)밭에 앉아 품종개량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관호 교수가 재배 중인 홍쌈추(붉은 쌈추)밭에 앉아 품종개량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3월 3일은 숫자 ‘3’이 겹친다 해서 이른바 ‘삼겹살데이’로 불린다.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정육업계의 상술로 치부하는 이도 있지만 어쨌든 이날은 대형마트와 동네 정육점에서 평소보다 많은 삼겹살이 판매된다. 이때 덩달아 판매가 증가하는 품목이 있는데, 삼겹살을 싸 먹는 채소류다. 상추, 치커리, 청겨자, 케일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반적인 쌈채소다.

이런 일반적인 쌈채소와 달리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아주 특별한 채소가 있다. ‘쌈추’다. 쌈추는 배추와 양배추의 교배를 통해 만들어진 쌈 전용 채소다. 2000년대 초반 시장에 선보인 쌈추는 삼겹살과 가장 잘 어울리는 쌈채소로 한때 인기를 끌었다. 시장에서의 인기는 쌈추의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는데, 당시 2㎏ 한 상자에 4만원을 호가할 정도로 수요가 폭증했다. 동일한 크기의 상추 1상자 가격이 2000원 정도일 때였다. 쌈추는 배추와 양배추의 장점을 살려내 그 맛이 달고 영양소가 풍부하다. 쌈추가 처음 시장에 등장했을 때 채소업계는 이를 일종의 혁명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쌈추는 불과 1년 만에 전국 농산물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쌈추 종자의 판매를 맡았던 A종묘사가 쌈추 품종 개발자와의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종자 생산 자체가 중단됐기 때문이다. 당시 종묘사는 1홉(종이컵 크기·180mL)의 쌈추 종자를 50만원에 판매하며 고수익을 거뒀지만 이 품종의 장기적 투자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다. 특허 등록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종자를 확보하고 나서는 쌈추 개발자와 결별하는 ‘악수’를 뒀다. 만약 당시 종묘업체가 제대로 전략을 짰다면 쌈추는 대량생산으로 이어져 농민들의 큰 수익원이 됐을 거라는 게 개발업자의 말이다.

쌈추의 개발자는 한국농수산대학교 이관호(58) 교수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 생각해도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20일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 있는 농수산대 실습장에서 ‘쌈추박사’ 이 교수를 만났다. 이 교수는 “최근 크고 작은 종묘업체들이 찾아와 쌈추류의 시장 판매를 재추진하자고 제안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종자전쟁이 한창인 요즘 순수 국내 개량종인 쌈추가 채소류 시장에서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 그는 이날도 어김없이 학내 하우스 농장에 나와 쌈추 종자의 육종에 매달리고 있었다.

“2000년대에 쌈추가 처음 시장에 나왔을 때 정말 인기가 대단했어요. 없어서 못 팔 정도였으니까요. 쌈추를 시장에 내놓은 건 A종묘업체였어요. 이 업체에서 처음 종자사업을 하자고 제안했고 전남 해남에서 150㎏ 정도를 채종할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그런데 이 업체가 종자값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종자를 고가에 팔아 이득을 챙기는 데만 급급했어요. 생산 및 판매신고를 하겠다고 해서 허락했는데, 1년이 지나 뒤늦게 특허출원을 받으려고 할 때 시기를 놓쳐 특허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됐어요. 이 업체 때문에 쌈추가 시장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겁니다.”

국내 종자산업법에는 상품의 생산·판매가 시작되고 나서 1년 이내에 특허를 신청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당시 연구 이외의 행정업무를 잘 몰랐던 이 교수는 뒤늦게 특허신청을 했고 결국 불허됐다.

“특허를 받으면 그건 내 것이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나라의 부를 늘릴 수 있는 종자가 되는 겁니다. 게다가 저는 국립대학의 교수이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특허를 낸다고 해도 결국 소유권은 국가가 갖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서 특허를 받긴 했지만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교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연구개발에 더욱 매진했다. 쌈추의 종자 개량과 돌연변이를 유도하는 방식을 통해 지금은 쌈그라, 통쌈추, e삼추, 홍쌈추, 청유채, 로얄채, 홍경채 등 13가지 신생 품종을 추가로 개발해냈다. 업그레이드된 일부 쌈추류는 특허등록을 마쳤다.

“어느 날 쌈추 농사를 짓는 농부가 제게 ‘빨간색을 입힐 수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때 ‘맞다. 색깔을 입힐 수 있다면 고부가가치 쌈추를 만들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만든 게 바로 홍쌈추 등 업그레이드된 쌈추죠. 파란색 쌈추가 아니라 빨간색 쌈추를 만들었고 같은 방식으로 케일, 청경채 등과 쌈추를 교배해 새 품종을 만들었습니다.”

쌈추는 근본적으로 양배추보다 배추의 성질에 더 가깝다. 쌈추를 개발할 때 그만큼 배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쌈추는 배추와 양배추의 단순 교배로 나온 게 아닙니다. 새로운 품종으로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단순 교배로 나온 결과물에 다시 배추를 여러 차례 교배해 준쌈추를 얻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배추와 양배추의 암수를 바꿔서 다시 같은 방식으로 준쌈추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 두 준쌈추를 교배해 최종적으로 쌈추를 얻게 됩니다. 우리 식생활에 필수품이 된 배추의 성질이 강할 수밖에 없죠.”

김 교수가 쌈추 개발에 나서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일본 쓰쿠바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부터다.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그는 유학을 가기 전 경기도 가평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 문부성에서 실시한 유학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그의 지인은 일본 농업 분야의 선두 격인 쓰쿠바대를 추천했다.

청경채와 홍쌈추를 교배해 만든 ‘홍경채’.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청경채와 홍쌈추를 교배해 만든 ‘홍경채’.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기왕 문부성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갈 바에야 도쿄대로 가고 싶었죠. 그런데 아는 분이 내 전공을 살리라며 쓰쿠바대를 권했고 저도 그 조언을 수용했습니다. 6년간 이 대학에 있으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연구했어요. 오죽하면 ‘스몰 수퍼맨’이라는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그때 사실은 식물의 진화과정을 증명해 노벨상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연구를 하다 보니까 노벨상은 단순히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이때부터 이 교수는 28년 동안 오직 채소 연구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쌈채소는 이런 연구의 성과물로 지난 2000년 세상에 첫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쌈추의 염색체가 몇 개인지 아십니까. 40개예요. 배추는 20개고 양배추는 18개입니다. 유채가 38개인데요, 배추와 양배추가 섞인 유채는 우장춘 박사가 교배를 통해 만들어낸 배추과 품종이죠. 염색체 40개의 새로운 배추과 품종인 쌈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겁니다. 비록 인위적으로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냈지만 자연 상태에서도 이런 변이가 계속 일어나며 식물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쌈추, 로얄채 등 이 교수가 만든 새로운 채소들은 염색체 숫자가 늘어난 만큼 비타민 등 영양소 또한 풍부해졌다. 쌈추의 경우 비타민C 함유량이 일반 상추에 비해 3배 이상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쌈추는 또 쌈을 싸기에 유리한 원형 모양이다. 육류와 잘 어울려 먹어본 사람은 다시 손길이 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초기 쌈추 버전은 작은 솜털이 있었는데 다시 개량을 해 솜털도 없앴다. 그러나 쌈추는 더위에 약한 단점이 있다. 그래서 쌈추류는 고랭지 농사가 적합하다.

이 교수는 1997년 농수산대학이 개교할 때 이 대학 채소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그 전에는 호남대 교수로 있었다. 농수산대에 오고 나서 약 17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대학 내 농장으로 출근을 해왔다고 말했다. 불가피하게 해외 출장을 다녀와야 했던 시간을 제외하면 명절 때도 하우스 농장에 나와 쌈추의 개량 품종을 관리했다.

“농장에 어느 것 하나 제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습니다. 17년 동안 하우스를 관리하고 채소를 가꾸어 왔으니까 제겐 자식만큼 소중한 공간입니다. 자다가 새벽 2시에 빗소리를 듣고 10㎞나 떨어진 집에서 달려와 하우스 덮개를 닫기도 하고 태풍이 왔을 때는 바람에 날아가는 하우스를 잡고 밤새 씨름했죠. 얼마나 어렵게 만들고 지켜온 곳인데, 제아무리 태풍이라도 함부로 허물게 내버려둘 순 없는 일 아니겠어요.”

그는 농장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챙기고 있었다. 인터뷰 중간에 기온이 상승하자, 말을 끊고 하우스 덮개를 열고 왔다. 잠시 뒤 다시 인터뷰를 중단한 이 교수는 옆동 하우스에 가서 쌈추에 물을 주고 돌아왔다. 그의 몸은 온전히 쌈추의 입장에서 날씨의 변화를 느끼고 또 그에 따라 움직이는 듯했다.

하우스 농장에는 쌈추에서 파생된 새로운 채소들이 품종별로 관리되고 있었다. 대형 하우스 농장 안에 다시 작은 하우스를 지어 쌈추에서 파생된 품종을 모두 구분했고 작은 하우스마다 양봉 벌을 넣어 꽃의 화분이 자연스럽게 섞여 종자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했다. 물론 벌이 다른 품종으로 이동할 수 없도록 작은 하우스는 모두 촘촘한 천으로 둘러쌌다.

이 교수는 앞으로 2년 내에 자신이 개발한 모든 쌈추류가 실용화 단계에 이를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농림수산식품부 산하 기관인 농수산대는 공공기관 지방 이전의 일환으로 2015년 전북 전주로 옮기기로 돼 있다.

“학교 안팎에서 진행해온 모든 연구는 지방 이전을 하기 전에 모두 끝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부쩍 바쁘게 살아요. 집사람도 포기했죠. 그전에 마케팅을 하겠다는 제대로 된 종묘업자가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쌈추로 쌈밥정식을 하는 집이 장사가 잘되는 걸로 보면 상품성이 있습니다. 먹어본 사람은 이게 어린 배추인지, 쌈추인지 다 압니다. 확연하게 차이가 나거든요. 지금도 몰래 유사 품종의 종자를 파는 사람들이 있는데, 종묘업계도 좀 바뀌어야 합니다.”

이관호 교수는 일본에서 유학을 시작한 이래로 28년간 쌈추 연구만을 해왔다. 농수산대가 지방 이전을 하기 전까지 2년 동안 자신의 연구를 마무리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채소에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던 이 교수의 30년 연구 성과물이 기대된다.

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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