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있는 일본 국가 기미가요 작곡가 프란츠 에케르트의 묘.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있는 일본 국가 기미가요 작곡가 프란츠 에케르트의 묘.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지난 2월 18일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의 무덤 앞에는 분홍색 꽃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서울 양화진의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있는 독일 출신 음악가의 무덤이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일본 국가 ‘기미가요(君が代)’의 작곡가다. 그의 무덤을 찾은 건 일본인들이 국가의 작곡가를 찾는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희망의 날개’와 같은 한·일 우호 프로그램을 제작한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의 TVK 등 지방 방송사의 고위 관계자와 주한 일본대사관의 관계자들도 조만간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묻힌 에케르트의 묘역을 참배할 예정이다.

기미가요는 일제강점기에 국기인 ‘히노마루(일장기)’와 함께 일본 군국(軍國)주의의 양대 상징이었다. 하지만 기미가요 작곡가가 한강과 강변북로가 훤히 내다보이는 마포구 양화진에 누워 있는 것을 아는 일본인과 한국인은 많지 않다. 당산철교와 양화대교 사이 한강 북단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서 그의 무덤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묘원 입구에 비치해 둔 한글 지도와 묘역 설명서에도 ‘프란츠 에케르트’란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1만3224㎡(약 4000평) 규모의 묘원은 A부터 H까지 알파벳 순으로 8개 구역으로 나눠져 있는데 각 구역 입구마다 꽂혀 있는 묘역 설명에도 그의 이름은 없었다.

결국 양화진에 묻힌 417기의 무덤을 A구역부터 H구역까지 일일이 찾기로 했다. A구역의 ‘A-8번’ 무덤에서 ‘에케르트’란 이름을 찾아냈다. 사각형의 화강석 기단 위에는 어른 키 높이의 검정색 오벨리스크 형태의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묘비 정면에는 ‘Franz Eckert’란 이름과 ‘R.I.P’란 문구가 선명했다. R.I.P는 ‘편히 잠드소서’란 뜻의 영어(Rest in Peace) 줄임말이다.

묘비 옆에는 팻말이 서 있었다. ‘에케르트(埃巨多·1852~1916)’란 이름과 함께 ‘프란츠 에케르트는 독일 출신의 음악가, 작곡가, 그리고 지휘자로서 한국과 일본에 서양 음악, 특히 독일 군대음악을 소개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란 문장으로 시작해, 망자(忘者)의 약력이 한글과 영문으로 소개돼 있었다. 하지만 망자의 소개글에도 ‘기미가요’란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로부터 외국인 고문으로 초청받아 1879년 3월 일본에 왔으며 이후 20년 동안 활동했다’란 언급만 등장할 뿐이었다. 일본에서 20년간 머물며 무슨 일을 했는지는 묘지 옆 소개글만으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기미가요는 1880년대 일본 궁내성(현 궁내청) 아악과 직원인 하야시 히로모리(林廣守)가 선율을 붙인 것을 프란츠 에케르트가 완성한 것이다. 에케르트는 당시 일본 해군 측으로부터 “국가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일본 국가 작곡에 착수했다. 당시만 해도 한·중·일에 국가가 없었다.

일본 해군의 부탁으로 에케르트의 손을 거쳐 태어난 일본 기미가요는 1880년 메이지(明治) 천황의 생일 축가로 처음 연주됐다. ‘임(천황)의 치세’란 뜻의 기미가요는 ‘천황의 통치시대는 천년 만년 이어지리라. 모래가 큰 바위가 되고 그 바위에 이끼가 낄 때까지’란 노랫말을 가지고 있다. 이후 기미가요는 사실상 일본의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1945년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 직후 공식 국가 자리에서 내려왔으나, 1999년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다시 일본 국가의 지위를 회복했다.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에 따르면, 에케르트는 구한말 주불(駐佛)공사를 지낸 민영찬(1874~1948)의 초청으로 1901년 한국에 건너와 대한제국 군악대 악장으로 일했다. 최서면 원장은 1957년 일본으로 건너가 1988년까지 약 30년간을 일본 대학에서 강의해 온 한·일 관계에 정통한 학자다. 민영찬은 을사조약 체결(1905년) 때 자결한 민영환(1861~1905)의 동생이다.

에케르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상제(上帝·하느님)는 우리 황제(皇帝)를 도우소서, 성수무강(聖壽無疆)하사’란 가사로 시작하는 대한제국의 애국가는 민영환이 가사를 쓰고, 에케르트가 곡을 붙였다. 1902년 8월 15일 당시 대한제국의 공식 국가로 지정된 사실상 우리 역사상 첫 번째 국가로, 국가 작곡에 따른 공을 인정받아 태극 3등급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1948년 정부 수립 후부터 우리나라 국가로 쓰이는 안익태 작곡의 대한민국 애국가와는 다른 곡이다.

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불량창가(不良唱歌)’로 격하됐다가, 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금지곡’으로 지정됐다고 한다. 또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던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독일 출신인 그의 입지도 좁아졌다고 한다. 이후 에케르트는 1916년 8월 8일 인후암(癌)으로 한국에서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자 한일병합 후 이왕(李王)으로 강등돼 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1874~1926)은 당시 돈으로 거금인 100원을 쾌척해서 그의 죽음을 위로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지금의 마포구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안장됐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은 조선 말기인 조영(朝英)수호통상조약 4조5항에 따라 1890년대부터 외국인 전용 묘지로 조성된 곳. 선교사와 그 가족 145인 외에도 미군 참전용사 등 외국인 417명이 묻혀 있다. 최서면 원장은 “그의 큰딸(아멜리아)과 결혼한 맏사위가 경성제대(서울대의 전신) 프랑스어 교수였던 에밀 마르텔(마태을·1874~1949)이고 다른 사위는 조선호텔 지배인으로 일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한국 땅에 묻히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케르트의 맏사위인 에밀 마르텔의 묘지도 에케르트의 묫자리와 지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1930년대 군국주의가 강화되면서 사실상 에케르트를 내팽개쳤다고 한다. 최서면 원장은 “일본에서 처음에는 전통 아악(雅樂)에 ‘콩나물’ 음표를 붙이고 서양식 4박자까지 붙여줘서 ‘독일 출신 에케르트가 기미가요를 작곡했다’는 사실이 신문에도 많이 실리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군국주의가 강화되면서 외국인인 에케르트가 자신들의 국가를 작곡한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 숨겨왔다”고 지적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의 한 관계자는 “일본어 설명서를 비치하고 있지만, 일본인들이 이곳을 많이 찾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 한·일 간 우정을 다룬 ‘그때 우린 열세 살 소년이었다’란 자서전을 출간한 나일성 연세대 명예교수(천문학)는 “한·일 관계가 악화된 요즘 에케르트와 같은 소재로 TV프로그램을 만들어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일본인들이 한국을 좀 더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최서면 원장은 “지난 30년간 일본에서 강의하면서 한국에 기생관광만 가지 말고, 기미가요 작곡가(에케르트)의 무덤이나 찾아보라고 하니까 다들 한 방 얻어맞은 표정이었다”며 “대학교수나 신문기자들은 이 말을 듣고 당장 달려가는데, 일본의 일반 시민들은 기미가요 작곡가의 무덤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아직 잘 모르는 만큼 새로운 관광코스로 개발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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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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