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흑해함대가 진주해 있는 우크라이나 세바스토폴.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권이 들어설 경우 우크라이나의 목을 죌 러시아의 거점이다. ⓒphoto 연합
러시아 흑해함대가 진주해 있는 우크라이나 세바스토폴.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권이 들어설 경우 우크라이나의 목을 죌 러시아의 거점이다. ⓒphoto 연합

“세바스토폴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새 크림전쟁의 진원지가 될 것이다.” 러시아 신문 모스콥스키예 노보스티는 지난 2월 25일자에서 이같이 진단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크림반도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친러시아와 친서방으로 나뉜 우크라이나 혼란의 파장이 우크라이나 남단 크림반도의 요충지 세바스토폴로 밀려드는 형국이다.

크림전쟁(1853~1856년)은 19세기 중반 팽창주의에 젖어 있던 러시아가 당시 자국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발판 삼아 발칸반도 쪽으로 뻗어가려다 영국·프랑스·터키 등 서유럽 열강들과 맞닥뜨려 치른 전쟁이다. 이 가운데서도 1854년부터 349일간 치러진 세바스토폴 공방전은 크림전쟁의 절정이었다. 당시 서유럽은 1만5000척의 전함을 세바스토폴로 보내 맹폭을 퍼부었다. 크림전쟁 기간 발생한 서유럽 연합군 측 사망자 30만명과 러시아 측 14만명 가운데 세바스토폴 공방전에서만 서유럽 측이 약 13만명, 러시아 측에서 10만명의 사망자를 냈다.

비록 세바스토폴 공방전에서 러시아가 패하기는 했지만, 그로부터 160년 만에 세바스토폴을 무대로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권과 러시아가 제2의 크림전쟁을 치를 수 있다는 우려가 엄습하고 있는 셈이다. 러시아 해군의 흑해함대 사령부가 세바스토폴에 있다는 점이 위기감을 한층 고조시킨다.

제2의 크림전쟁이란 표현은 주로 러시아 측이 사용한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1년 우크라이나가 옛 소련에서 독립한 뒤 2004년 ‘오렌지혁명’(우크라이나 민주화운동) 성공과 함께 2005년 세바스토폴에 주둔 중이던 흑해함대 임대료를 4배까지 인상하려 하자 당시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국방장관(현 대통령 행정실장)은 “새로운 크림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위협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이번 우크라이나 정국의 혼란 이후 러시아 외에 세바스토폴 현지 언론들 사이에서도 ‘크림전쟁’ 등 과격한 표현이 난무하고 있다. 인터넷 매체인 노브이 세바스토폴은 “새 정부가 들어설 우크라이나와 ‘투쟁’ ‘전투’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게재했다.

심지어 2만여명의 세바스토폴 시민들은 지난 2월 24일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은 우리 세바스토폴의 대통령이다’ ‘러시아여, 세바스토폴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 와중에 세바스토폴의 주민들은 러시아 크렘린(대통령궁)에 군대를 요청하고, 세바스토폴 의회는 지난 2월 23일 새 시장(市長)에 러시아 기업인인 알렉세이 찰르이(53)를 선임하는 ‘초강수’를 뒀다.

우크라이나로서는 세바스토폴이 ‘계륵’과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 있는 세바스토폴은 왜 줄곧 러시아 편에 서는 것일까.

사실 세바스토폴은 지리적 위치 말고는 인종, 역사, 문화, 군사 등 모든 면에 걸쳐 우크라이나보다는 러시아와 닿아 있다. 세바스토폴은 우리 대구광역시와 비슷한 면적(864㎢)에, 2014년 1월 현재 인구는 약 35만명인 작은 도시다. 면적과 인구는 각각 전체 크림반도의 3.3%, 18%에 불과하다. 세바스토폴 전체 인구의 72%는 러시아인이고, 인구의 91%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세바스토폴 시내를 행진하는 러시아 흑대함대 병사들. ⓒphoto 연합
세바스토폴 시내를 행진하는 러시아 흑대함대 병사들. ⓒphoto 연합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 자치공화국이다. 그중에서도 세바스토폴은 독특한 지위에 있다. 크림자치공화국의 일부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에서 수도 키예프와 동등하게 ‘특별시’ 지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경제도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 2013년 우크라이나 전체의 실업률이 8.1%인 데 비해 세바스토폴은 5%대를 기록했다.

요컨대 세바스토폴은 땅만 우크라이나에 있을 뿐, 우크라이나가 아닌 러시아의 일부나 마찬가지다. 필자는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시절인 2006년과 2009년 세바스토폴을 두 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다. 그때 받은 인상도 세바스트폴은 ‘우크라이나 안의 러시아’라는 것이었다.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인들이 세바스토폴에 대해 갖는 느낌도 세바스토폴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1273㎞,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686㎞ 떨어져 있다. 거리상으로는 우크라이나가 훨씬 가깝다. 하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인보다 세바스토폴을 더 친숙하게 느낀다. 모스크바에서는 세바스토폴 인근 심페로폴공항까지 매일 3편, 모두 21편의 직항이 있는 반면, 키예프에서는 주 4회 7편의 비행기가 다닐 뿐이다.

러시아 국영항공사 아에로플로트의 전직 기장 알렉산드르 미하일로프씨는 지난 2월 26일 필자와의 통화에서 “러시아 관광객을 태우고 세바스토폴을 수년 동안 다녔는데, 러시아인들이나 세바스토폴 사람들이나 그저 서로를 이웃처럼 대한다는 느낌을 늘 받았다”고 말했다. 반면 우크라이나 언론 키예프 포스트의 한 친러시아 성향의 기자는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익명을 전제로 “세바스토폴은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단언했다.

재미있는 점은 세바스토폴이 러시아와의 끈끈한 군사적 유대를 강조하는 시가(市歌)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설의 세바스토폴’이라고 이름 붙여진 곡의 핵심 내용은 이렇다.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크림해안의 전쟁터에서 영광스럽게 싸웠다.…

당신의 자식들은 목숨을 던져 신성한 흑해함대를 숭고하게 지켰다.…

군함들은 결코 잠들지 않으며 우리 고향 땅을 굳건히 수호하고 있다.…

적에게 한 치의 도발도 허용치 않을 전설의 세바스토폴, 러시아 해군의 자랑이어라!’

이런 세바스토폴도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문학작품을 통해 세상밖으로 알리기 전까지는 낯선 곳이었다.

지난 2월 24일 세바스토폴항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 ⓒphoto 연합
지난 2월 24일 세바스토폴항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 ⓒphoto 연합

역사적으로 세바스토폴은 1783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가 군항(軍港)으로 건설한 뒤 1804년 흑해함대를 배치하면서 규모를 키웠다. 1854년 크림전쟁 당시 러시아군은 영국 등의 연합군에 맞서 전투를 치렀고 영국에서 ‘백의(白衣)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파견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톨스토이는 크림전쟁이 한창이던 1854년부터 1855년까지 세바스토폴 공방전에 포병 장교로 참전했다. 특히 1854년 10월 서방 연합군이 포격과 함께 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시작하고 러시아의 흑해함대가 병참선이 끊긴 가운데서도 1년여에 걸쳐 피땀으로 요새를 구축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흑해함대는 파벨 나히모프, 블라디미르 코르닐로프 같은 장교들의 지휘 아래 사력을 다해 요새를 방어했다. 하지만 연합군의 끊이지 않는 포격으로 요새는 폐허로 변했고 매일 수백 명이 죽어 나뒹굴었다. 톨스토이는 이 같은 참혹상을 불후의 단편 ‘세바스토폴 이야기(Севастопольские рассказы)’로 담아냈다.

러시아 군인들의 영웅적 모습에서부터 전쟁 허무주의에 이르기까지 3부작으로 쓴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에피소드들은 훗날 톨스토이의 명작 ‘전쟁과 평화’의 소재가 됐다고 한다. 세바스토폴 시당국은 이 같은 톨스토이의 기여를 인정, 1908년 그를 ‘명예 세바스토폴 시민’으로 추서했다.

세바스토폴은 전쟁으로 점철된 도시다. 2차 세계대전 때는 250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나치 독일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1942년 7월 독일에 함락됐다. 1944년 5월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인해전술로 되찾아 왔다.

그 이후 소비에트시대 세바스토폴의 별칭은 ‘닫힌 도시’였다. 러시아 해군에는 세바스토폴이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천혜의 부동항이었고, 이 때문에 보안상 세바스토폴 시민을 제외한 어떤 외부인에게도 출입이나 관람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였다.

1954년 니키타 흐루시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러시아·우크라이나 합병 300주년을 기념해 크림반도를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공화국에 양도하고, 1991년 소련 해체에 따른 우크라이나의 독립으로 크림반도 내 세바스토폴은 우크라이나 쪽으로 완전 편입됐다. 그러나 이때도 세바스토폴 시민들의 70% 이상은 ‘나는 러시아 국민’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2월 24일 친서방 우크라이나 시위 사태에 반대하며 친러시아 시위를 벌이는 세바스토폴 시민들. ⓒphoto 연합
지난 2월 24일 친서방 우크라이나 시위 사태에 반대하며 친러시아 시위를 벌이는 세바스토폴 시민들. ⓒphoto 연합

역사적 배경도 있지만, 우크라이나가 세바스토폴에 고심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이유는 이곳에 주둔 중인 러시아 흑해함대 사령부 때문이다. 러시아는 1997년 우크라이나와 1년에 9300만달러의 임대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2017년까지 20년 동안 세바스토폴 항구를 흑해함대 사령부로 사용하는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2004년 ‘오렌지혁명’을 통해 집권한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이 친서방 정책을 펼치며 러시아와 거리를 두자 갈등이 표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국 중심의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려는 유셴코 정부에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함대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러시아는 이런 유셴코 대통령의 행동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등도 잠시, 러시아는 2010년 2월 우크라이나에서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당선되자 불과 2개월 만인 4월, 2017년으로 예정됐던 러시아 흑해함대 철수 시한을 25년 뒤인 2042년까지로 연장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측에 임대료를 연간 1억달러로 올려주되, 세계 최대의 천연가스 수출국의 위상을 내세워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가스를 국제시세보다 할인된 가격에 제공한다는 ‘당근’을 제시한 결과였다.

문제는 세바스토폴 주둔 흑해함대 사령부의 미래다. 조약의 겉만 보면 2042년까지 흑해함대 사령부가 주둔하는 것으로 돼 있지만, 세부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추가 조항이 붙어 있다. 2042년부터 2047년까지 5년간 조약을 갱신하는 옵션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최소 2047년까지 흑해함대 주둔이 가능하다. 현재 세바스토폴 흑해함대 사령부에는 러시아군 1만6200명이 주둔하고 있으며 로켓순양함 모스크바호와 구축함 케르치호 외에 40여척의 함정들이 있다.

더군다나 러시아는 세바스토폴에 구축함 건조 시설을 설치하고 7척의 신형 스텔스 잠수함을 추가 배치할 계획을 갖고 있다.

앞으로 친서방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갈 것으로 보이는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정부 입장에서는 더욱 강한 송곳을 든 러시아에 턱밑(세바스토폴)을 내주는 모양새가 심화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여차하면 ‘새 크림전쟁의 진원지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단순히 예측에만 그치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권경복 전 조선일보 러시아 특파원·한양대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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