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를 돌아 만주평원을 가로질러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의 시발점에 섰습니다. 7년 전에 이곳을 다녀가면서는 내 인생에 다시 올 기회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다시 왔네요!” 박한제 서울대 명예교수(동양사학)가 동굴 입구에 서서 촉촉한 가을비를 가려주던 우산을 내려놓고는 읊조리듯 감탄하듯 내뱉었다. 인솔한 나도 동반한 오무근님도 동굴 안쪽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20m 높이의 화강암 산 중턱에 있는 동굴이다. 동굴의 삼각형 입구는 서남을 향하고 있다. 동굴 내부는 최대 폭이 28m, 천장은 최고 20m나 된다. 안쪽으로는 깊이가 90m, 바닥 면적은 2000㎡. 사람이 운집하면 1000명은 수용할 수 있을 정도다. 바로 알선동(嘎仙洞)이다.

동굴 입구 바로 왼쪽 벽면에는 사람 키 정도의 철창이 캐비닛 모양의 보호용 철판을 둘러싸고 있고, 그 옆에는 비슷한 높이의 검은색 화강암 석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석비는 모조품이고, 철판 속의 화강암 벽면에 새겨진 석각 축문이 진품이다. 중국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후룬베이얼(呼倫貝爾)시 어룬춘족(卾倫春族)자치기(自治旗) 아리허진(阿里河鎭) 서북 10㎞, 다싱안링(大興安嶺) 산맥의 북단 동록이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이다. 인천에서 항공편으로 하얼빈까지 간 다음 승합차를 타고 786㎞, 꼬박 2박3일 걸려서 다다른 곳이다. 32일간 9300㎞를 주행하는 긴 답사여행의 시발점이 바로 이곳이다.

동아시아의 중원과 북방, 농경과 유목, 곧 호(胡)와 한(漢)을 융합한 새로운 체제로 세계 제국을 이룬 대당(大唐)의 발원지가 바로 이곳 알선동이다.

선비족(鮮卑族) 탁발부(拓跋部), 즉 탁발선비는 아득한 옛날에 이곳에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수렵·어로 생활을 하던 이들은 중원으로 남하하여 5호16국의 혼란기에 북위(北魏)를 세웠다. 탁발선비의 북위는 중원의 한인들을 받아들이며 강력한 통치력을 구축해 나갔고, 문화적 융합을 추구했다. 이들이 이룩한 이른바 호한(胡漢)체제는 수(隋)나라를 거쳐 대당(大唐)제국의 건설이라는 위업의 기반이 됐다.

대당제국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호한융합의 실체로서, 인류 역사의 위대한 진보로 기록되었으니 ‘장안의 봄, 장안의 밤’이 바로 그것이다. 사방으로 문을 걸어 닫았던 고대의 옹색한 중원에서, 남북이 융합된 새로운 차원의 개방된 세계 제국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유라시아 전체가 장안을 중심으로 소통하고 교류하고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위대한 동아시아의 시대를 열었다. 그것은 훗날 몽골제국이 동양과 서양을 융합하는 위대한 역사로 이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천년에 걸친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이었고, 그 소박한 상고시대 출발점이 바로 알선동이다.

이 오지의 동굴을 다시 찾은 인연을 되짚지 않을 수 없다. 박한제 교수는 1980년대 초반 알선동의 축문을 박사학위 논문에서 자신의 학설인 ‘호한체제’를 증명하는 중요한 논거의 하나로 제시했다. 20년 후인 2001년 8월 이곳을 답사하여 실물을 직접 확인하고는 2003년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이란 기행서에 답사기를 발표했다. 나는 6년 후에 답사기를 통해 북방 역사에 눈을 뜨고는 곧바로 배낭을 싸서 베이징에서 기차를 타고 30시간, 다시 2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알선동을 찾아왔었다. 다음해에는 ‘북방기행’이란 TV다큐멘터리에 알선동을 고스란히 담았다. 나는 그 이후에도 다싱안링산맥의 알선동과 후룬베이얼 초원을 답사하려는 사람들을 인솔하여 다섯 차례 더 다녀갔다. 그때마다 알선동에서 후룬호와 흉노고지를 거쳐 낙양까지, 그리고 수당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지금의 시안)까지 수천㎞에 달하는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 전체를 내 발로 답사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다가왔다. 놀라운 것은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의 저자인 박한제 교수가 자비로 동행에 나서주셨다는 것이다.

블로그를 통해 나의 장기답사 계획을 알게 된 오무근님은 30일간의 휴가를 내고 동행했다. 그는 경기도시공사의 간부다. 한국의 공사 풍토에서 평사원도 아닌 간부사원이 30일짜리 휴가를 낸 것은 기네스북에 올릴 사건이 아니었을까. 당사자도 대단하지만 그것을 기꺼이 허락한 사장도 대단하다. 이런 사연을 품은 이번 여행이 알선동이란 출발점에서 시작하게 됐으니 나 역시 감회가 깊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출발이다. 그런데 알선동의 축문은 어떤 내용이었기에 한국인은 거의 오지 않는 오지까지 찾아와 출발점으로 삼은 것일까. 노학자의 도움을 받아 나와 오무근님이 한 글자씩 짚어가면서 읽어나갔다.

‘維 太平眞君四年 癸未歲七月卄五日 天子臣燾 태평진군 4년(443년) 계미년 7월 25일 하늘의 아들인 신 탁발도(태무제)는, 使謁者僕射 庫六官 中書侍郞 李敞 傅菟, 用駿足 一元大武 柔毛之牲, 敢昭告于 알자복야 고육관과 중서시랑 이창 부토 등을 시켜, 말과 소와 양을 제물로 감히 고합니다. 皇天之神, 啓辟之初 祐我皇祖 于彼土田 歴載億年 聿來南遷 황천의 신에게 고하건대, 개벽 초기에 우리 황조를 그 토전(알선동 일대)에서 도우셨고, 억년을 거친 후에 마침내 남천을 하였습니다. 應受多福 光宅中原 惟祖惟父 拓定四邊. 많은 복을 받은 덕분에 중원을 널리 안정시킬 수 있었고, 오직 우리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만이 동서남북을 개척하여 안정시켰습니다. 慶流後胤 延及冲人, 闡揚玄風 增構崇堂, 剋憝凶醜 威曁四荒 경사로움이 후대까지 이어져 어리석은 저에게 미치게 되어 도교(玄風)를 찬양하고, 높은 묘당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흉악한 무리들을 이겨 없애니, 그 위세가 사방까지 미쳤습니다. 幽人忘遐 稽首來王, 始聞舊墟 爰在彼方 悠悠之懥 希仰餘光, 유인(태무제에게 조공을 하러 온 오락후국의 사람들)이 멀기를 마다않고 머리를 조아리고 내조하여 칭왕을 해옴으로써 선조가 살던 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역사에 더욱 광명이 있기를 우러러 바랍니다. 王業之興 起自皇祖 綿綿瓜瓞 時惟多祜 歸以謝施, 推以配天 子子孫孫 福祿永延 薦于 왕업이 일어남이 황조로부터 시작되어 면면히 이어지기가 오이 덩굴과 같게 되었던 것은 적시에 많은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늘에 바치는 제사 음식을 차렸습니다. 자자손손에게 복록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며 皇皇帝天 皇皇后土以 皇祖先可寒配 皇妣先可敦配 尙饗 東作帥使念鑿 위대한 하늘의 신과 위대한 땅의 신에게 황조 선가한과 황비 선가돈께서 차린 제수를 진헌합니다. 상향. 동작수사 염이 글씨를 새기다.’

알선동 석각은 북위 황제 태무제 탁발도(拓跋燾)가 북중국을 통일한 지 4년 뒤인 443년 이곳에 대신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축문을 석벽에 새긴 것이다. 대신을 보낸 것은 그해 봄 알선동 동남쪽 넌강(嫩江) 유역에 있던 오락후국(烏洛侯國)에서 북위로 조공사를 보내온 것에서 비롯된 일이다. 자신들이 사는 곳의 서북쪽에 북위 황제의 선조가 살던 옛터(舊墟) 또는 묘당(廟堂) 석실이 있는데, 석실의 신령이 영험하여 백성들이 찾아가 기도를 한다고 알린 것이다. 이런 사실은 북위 역사를 기록한 ‘위서(魏書)’에 실려 전해져 왔다. 그런데 축문 실물이 1500여년이 지난 1980년 여름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후반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놀라운 발견의 하나였다.

이것을 통해 탁발선비, 즉 선비족 탁발부의 발상지가 다싱안링산맥 북단이고 그곳에서 남천하여 흉노고지, 지금의 네이멍구자치구 수도인 후허하오터(呼和浩特) 일대의 초원으로 이동했다는, 대국(代國)과 북위(北魏) 이전의 역사가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단지 탁발선비의 이동경로를 밝혀줬을 뿐 아니라 박한제 교수가 일생을 연구해온 호한체제론의 주요한 단서도 제공해 준 것이었다.

박한제 교수가 알선동 축문을 한 자씩 짚으며 해석하고 있다.
박한제 교수가 알선동 축문을 한 자씩 짚으며 해석하고 있다.

박한제 교수는 이 석벽의 축문에서 무엇을 찾아낸 것일까. 사서에는 없으나 석각에는 있는 문구의 하나는 ‘선가한 선가돈(先可寒先可敦)’이란 표현이다. 가한(可汗)은 칸인데, 기존의 역사학에서는 북방 유목국가 가운데 가한이란 칭호를 처음 사용한 자는 402년 유연(柔然)의 구두벌가한(丘豆伐可汗)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축문에서 보듯이 가한이란 칭호는 탁발선비에서 시작된 것으로 수정됐다. 또한 북위의 황제가 중원의 황제이면서 북방의 가한이란 칭호를 함께 사용했다는 것이 명백하게 나타났다. 즉 호한(胡漢)을 아우르는 융합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는 것이 박한제 교수의 논지다. 알선동은 탁발선비 조상의 터전이란 것을 넘어 호한융합의 세계관을 돌에 새겨 후손에 전한 역사의 메시지가 담겼다는 것이다. 이 축문이 발견됨으로써 사서에 기록된 탁발선비의 시원을 둘러싼 논란의 상당 부분이 시원스레 밝혀졌다.

“역사학은 문헌만은 아닙니다. 고고학, 인류학, 민족학, 언어학 등이 함께 조응할 때 사실을 충실하게 규명해 낼 수 있지요. 내가 평생을 연구해온 호한융합의 호족(胡族), 즉 북방민족은 중국의 정사에서는 대단히 홀시되었고 왜곡되었던 게 많습니다. 위서는 예사(穢史·穢는 더럽다는 뜻)라고 할 정도로 논란이 많았습니다. 한족의 시각에서 서술한 대표적인 정사의 하나지요. 이런 왜곡을 바로잡는 데에는 알선동의 발견과 같은 고고학이 크게 기여합니다. 최근에 중국에서 대규모 토목공사가 빈번해지면서 땅속에 묻혀 있던 묘지명(墓誌銘) 등의 석각이 많이 발굴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그동안 잘못 기록된 역사가 새로 기술되는 것이 많습니다. ‘위서’ 서기가 기술한 탁발선비의 남천에 대해 기존에는 황당하다고까지 무시하는 학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선동 축문과, 우리가 다음 여정으로 찾아가게 될 후룬베이얼 곳곳에서의 고묘 등을 발굴한 고고학 성과는 ‘위서’의 서기(序紀)가 허황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알선동 앞에는 수미터 폭의 알선하가 흐르고 있었다. 남으로 흘러 간하(甘河)로 합류한다. 이곳은 북위 50도나 되는 곳이라 여름에도 물이 차갑다. 이 물이 그때도 흘렀다면 탁발선비의 선조를 먹여살린 물이었을 것이다. 맑고 차가운 물이 면면히 흐르는 곳에서 역사 이야기가 이어졌다.

‘위서’는 북위와 북제에 걸쳐 살았던 위수(魏收·505~572)가 저술한 사서다. 서기란 황제의 일대기를 기록한 본기(本紀)의 첫 번째라는 뜻이다. 두 번째 본기는 북위를 개국한 도무제 탁발규(珪)에 대한 것이다. 서기에서도 앞부분은 탁발선비의 상고사다. 탁발시균(始均)을 1대로 하여 67대인 탁발모(毛) 이전까지를 역사학자들은 전설의 시기라고 구분한다. 대부분의 상고사와 마찬가지로 까마득한 조상의 전설이거나 역사 편찬 당시 정권의 정당성을 윤색하기 위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탁발시균이 중원의 시조인 황제(黃帝)의 스물다섯 번째 아들 창의(昌意)의 후예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북위의 중원 지배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는 정치적 언술일 뿐이다.

알선동 유적지 입구
알선동 유적지 입구

BC 200년 전후로 추정하는 67대 탁발모 이후 2세기 중엽의 80대 탁발힐분(詰汾)까지는 전설 시대에 비해 역사적으로 구체성을 인정받는 시기다. 탁발모는 알선동 일대에서 36국과 99성을 아울러 부락연맹의 수장으로 올랐다. 72대인 탁발추인(推寅)에 이르러 큰 변화가 일어난다. 바로 다싱안링이란 삼림을 떠나 후룬베이얼 초원으로 1차 남천을 한 것이다. 수렵 어로에서 유목으로 생태환경 자체를 바꾼 것이니 엄청난 변화다. 탁발힐분은 후룬호 일대를 떠나 흉노고지로 2차 남천을 한다. 81대 탁발역미(力微)부터는 역사기록이 더욱 명확하다. 탁발역미의 손자가 대국(代國 315~376)을 세웠고, 역미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인 탁발규(珪)가 북위(386~534)를 세웠다.

‘위서’ 서기에는 조상의 근원지에 대해 ‘국유대선비산(國有大鮮卑山), 인이위호(因以爲號)’라고 기록하고 있다. 선비라는 족칭은 이 대선비산이란 지명에서 온 것이다. 선비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선비곽락(鮮卑郭落)이란 것이 비교적 긍정적으로 인정받는다. 선비는 상서롭다는 뜻이고, 곽락은 사슴 종류의 동물, 곧 선비족의 토템이다. 알선동 지역에서 상서로운 사슴은 순록이다. 이 지역의 토착 소수민족인 어룬춘족이나 어원커족은 고래로 순록 유목을 해왔고, 헤이룽강(黑龍江)을 넘어 시베리아로 올라가면 순록 유목이 더 광범위하다.

대선비산의 위치에 대해 여러 주장이 있었으나 알선동 축문이 발견되어 다싱안링산맥 북단인 것으로 정리가 됐다. 선비산이 아니라 대선비산이라고 한 것은 탁발선비가 북중국을 통일한 이후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한 수사일 것이다. 다싱안링산맥에서도 어느 특정한 산을 지칭할 수 있다는 추론도 있다. 김영환 남서울대 교수는 지리적 환경 등을 고려하여 알선동 북쪽 80㎞ 지점에 있는 대백산(大白山)이 유력하다고 주장한다. 이 산은 해발 1529m로 다싱안링산맥 북단에서 가장 높고, 남쪽으로 흘러 넌강(嫩江)에 합류하는 간하(甘河)와, 서쪽으로 흘러 후룬베이얼 초원을 적시는 건하(根河)의 발원지라는 것이다. 아직은 가설인 것으로 생각해 이번 답사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알선동이 위치한 다싱안링산맥 삼림.
알선동이 위치한 다싱안링산맥 삼림.

탁발선비는 알선동에서 대택, 즉 큰 호수로 1차 남천을 했다. 왜 고향을 떠나게 됐을까. 삼림에서는 수렵과 어로 그리고 순록 유목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식량채집으로는 인구증가를 감당하기 어렵다. 게다가 기원 1세기 중엽 기후변화로 기온이 내려가자 가축이 몰살하는 등 생존에 큰 위협을 받았다. 남쪽에서 전해오는 농경사회 중원의 산물(南貨)이 보여주는 정교함과 화려함도 유혹이었을 것이다. 다싱안링산맥의 남쪽 초원에서는 한나라의 집요한 공세 속에 흉노가 쇠락하는 큰 변화도 일어나고 있었다. 탁발선비는 이런 사정들을 종합해 남천을 결정했을 것이다.

알선동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번 답사의 출발점이자 탁발선비 천년 역사의 시원이고, 대당제국이라는 호한체제의 근원이라는 면에서 답사를 시작하는 걸음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제 알선동을 떠나 탁발선비의 1차 남천을 좇아가는 여정이다. 후룬베이얼 초원의 진주인 후룬호까지 가는 것이다. 우선은 다싱안링산맥을 동에서 서로 넘어서 건하(根河)시로 간다. 초원으로 나가기 전에 북방삼림에서 순록을 유목으로 키워 오던 어원커족 정착촌과 박물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알선동에서 나와 아리허진 중심에 있는 어룬춘족 박물관에 들렀으나 공교롭게도 월요일이라 문을 닫았다. 다음 날 보게 될 어원커족(卾溫克族)과는 동일한 민족으로 볼 수도 있으니 아쉽지만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박물관을 지나 허름한 식당에서 외관보다 훨씬 맛있는 국수로 점심식사를 하고는 건하를 향해 출발했다. 건하로 가는 301번 국도는 간하(甘河)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면서 다싱안링산맥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다싱안링산맥은 험준한 느낌은 별로 없다. 해발 1100~1400m로 남북 1200㎞를 넘지만 동서 폭도 200~300㎞나 되기 때문에 가파른 고갯길이 아니라 구릉을 지나는 느낌이다.

간하대교에 잠시 차를 세우고 강물을 구경했다. 40~50m는 됨 직한 강 폭에 물살도 센 편이었다. 오전 내내 내리던 가을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을 보여주고 있었다. 박한제 선생님은 예전에 사진을 찍었던 곳이라며 다시 한 장을 찍었다. 흐르는 강물이지만 수면에는 강가의 울창한 가을 나무와 함께 반짝이는 해와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한꺼번에 들어앉았다. 북위 50도의 9월 하순은 이미 서늘한 기운이다. 한참을 더 가는데 도로 옆 커다란 입간판에 ‘大嶺之南 甘河濱, 北魏先祖 發祥地(대령지남 감하빈 북위선조 발상지)’라고 쓰여 있었다. 마치 우리 답사팀을 안내하는 듯했다.

역사 지식

탁발선비족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탁발선비족은 AD 1세기 중엽 북방의 기후가 한랭기로 들어가자 알선동 삼림에서의 수렵·어로 생활을 떠나 남쪽의 대택(大澤), 즉 후룬호(呼倫湖) 인근 초원으로 이주, 초원의 유목민으로 변신했다. 북방초원에서 서서히 힘을 키워 나간 탁발선비는 2세기 중엽 다시 남으로 이동했다. 고난을 헤치면서 먼 길을 걸어 몽골고원 남쪽(漠南)의 초원, 곧 흉노의 옛 땅(匈奴故地)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따뜻하고 포근한 초원이 아니었다. 남하하려는 북방의 여러 유목 종족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중원의 농경 제국이 한데 엉켜 피 튀기는 생존 쟁투였다.

당시 중원의 적장자였던 서진(西晉·265~316)은 280년 오(吳)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했다. 북방유목민들 일부는 이미 중원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중원은 북방유목민들을 어느 정도 제어하고 있었다. 서진은 곧 오만과 퇴행 속에 스스로 무너졌다. 북중국은 4세기 초부터 135년 동안 5호16국이라는 전대미문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런 격류 속에서 탁발선비는 대국(代國)을 세웠다가 잠시 절멸의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386년 다시 북위(北魏)를 세웠다. 가장 늦게 진입한 탁발선비는 선착했던 다른 종족의 왕조들을 제압하고 439년 북중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뤄냈다.

탁발선비의 북위는 북방의 유목종족에서 중원의 정복자로 등장했으나 단순한 정복에 안주하지 않았다. 남과 북, 유목과 농경, 호와 한을 아우르는 진정한 대륙의 통치자가 되려고 했다. 이들은 북방초원의 첫 번째 패자였던 흉노(匈奴)가 침략과 약탈에 머물렀던 것과는 확실하게 달랐다. 백성이든 지식인이든 중원의 한인들을 자신들의 보호막 안으로 받아들였다. 중원의 정치와 북방의 무력을 결합해 강력한 통치력을 구축해 나갔다. 봉록제와 균전제, 삼장제 등을 통해 유목과 농경을 결합하는 사회경제적인 기초를 다졌다. 그 위에 한인과 통혼하고 복식은 물론 말과 성(姓)까지 바꾸면서 문화적 융합을 추진했다. 불교라는 제3의 외래종교를 새로운 규범과 가치로 진작시켜 운강석굴과 용문석굴, 현공사 등 화려한 불교 유적을 세웠다. 가장 극적인 융합은 천도였다. 초원과 중원의 경계선인 평성(平城·지금의 다퉁시 大同市)에 있던 수도를, 중원의 한복판인 낙양(洛陽)으로 옮김으로써 역사마저 융합하여 동아시아 역사에 완전히 새로운 장을 열었던 것이다.

이런 급진적인 융합정책은 탁발선비 내부의 강력한 반발과 분열을 불러왔다. 기존의 가치와 문화, 기득권까지 포기하고 새로운 가치와 문화를 창출하려는 호한융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탁발씨가 황제로 역사를 이끈 것은 북위와 동위(東魏), 서위(西魏)까지였다. 그러나 탁발선비는 탁발씨가 아닌 또 다른 탁발선비, 즉 관롱집단(關朧集團)을 후계자로 키워두고 있었다. 이들은 동위와 서위의 실권자로 통치역량을 다지다가 자신들이 탁발씨 대신에 전면으로 나섰다. 우문(宇文)씨가 북주(北周)를, 고(高)씨가 북제(北齊)를, 다시 양(楊)씨가 북주를 받아 수(隋)를 세워 남조의 진(陳)나라까지 멸하면서 대륙을 통일했다. 잠시 수나라가 비뚤어지자 이연과 이세민은 당(唐)을 세워 양씨를 대체함으로써 호한융합의 역사를 새로운 역사 궤도에 진입시켰던 것이다.

최종 결과는 대당(大唐)제국이었다. 탁발씨 이후의 징검다리가 되었던 우문·고·양·이씨 네 가문 모두 탁발선비다. 이들이 한족(漢族)이고 호한융합을 일방적인 한화(漢化)라고 우기는 것은 한인 사가(史家)들의 졸렬한 북방 콤플렉스에 지나지 않는다. 오바마가 아프리카의 후예지만 미국인이고,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나라는 아프리카 국가가 아닌 미국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북제 북주와 수당 제국 역시 탁발선비의 제국들이다. 관롱집단이라는 탁발선비의 이니셔티브 속에서 탁발선비의 핵심들끼리 정권을 교대하며 국호를 바꿨을 뿐이다.


윤태옥

다큐멘터리 제작자. 1984년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방송위원회 비서실장, M.net 기획국장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부사장, 팍스넷 팍스TV 총괄부사장, 팍스인슈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2006년부터는 중국 인문기행을 하면서 다큐멘터리를 기획 제작하고 있다. ‘개혁군주 조조 난세의 능신 제갈량’ ‘중국 식객’ ‘중국 민가기행 - 당신은 어쩌자고 내 속옷까지 들어오셨는가’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등의 저서가 있다. http://blog.naver.com/kimyto

윤태옥 다큐멘터리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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