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애인사 운영진들과 찍은 사진.(1952. 5. 17) ‘경천애인사아동원’ 간판이 선명하다. 아랫줄 맨 왼쪽이 장홍기씨이고 그 옆이 경천애인사 창설자 장시화 목사다. 사진 속 운영진 대부분이 세상을 뜨고 두세 명만 남았다고 한다. 장홍기씨가 소장한 이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는 건 최초다.
경천애인사 운영진들과 찍은 사진.(1952. 5. 17) ‘경천애인사아동원’ 간판이 선명하다. 아랫줄 맨 왼쪽이 장홍기씨이고 그 옆이 경천애인사 창설자 장시화 목사다. 사진 속 운영진 대부분이 세상을 뜨고 두세 명만 남았다고 한다. 장홍기씨가 소장한 이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는 건 최초다.

이 글은 발굴 스토리다. ‘경천애인사(敬天愛人社)’라는, 6·25전쟁 당시 500여명의 전쟁고아들이 거쳐간 생존 터전이었으나 3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한 고아원에 대한 이야기다. 이야기의 원천은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1919~2005)과 경천애인사 창설 멤버 중 한 명인 장홍기씨다. 재미(在美)언론인 한우성씨가 김영옥 대령의 육성을 담아 공들여 쓴 책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북스토리)을 날줄로, 경천애인사의 주역 중 한 명이자 장혁 청와대 국방비서관(육군 소장·육사 39기)의 아버지인 장홍기씨의 이야기를 씨줄로 삼아서 직조했다.

장홍기(83)씨의 부인 김정옥(79)씨도 경천애인사 출신이다. 장씨는 종전 후 고향강원도 철원으로 돌아가 철원군 동송읍장을 지내는 등 30년간 공무원으로 봉직하다 1993년 퇴직했다. 동향 출신의 부인 김씨 역시 종전 후 장씨를 따라 철원에 정착해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철원에 거주하는 노부부를 김영옥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만났다. 김영옥평화센터 이영만 이사장이 두 분의 운전사를 자처했다. 덕분에 참혹한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들의 안식처인 경천애인사를 만든 영웅들, 경천애인사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키다리아저씨처럼 도와준 김영옥 대령의 영웅담을 다소 입체적으로 살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은 미완성이다. 500명 고아들의 그 후, 경천애인사 창설의 또 다른 주역인 장시화 목사와 앤더슨 선교사 이야기는 큰 여백으로 남아있다. 시간 여력 상 곁가지 이야기를 다 담아내지 못했다. 경천애인사 관계자들, 또 다른 전쟁고아원들 이야기를 추가 발굴해 ‘전쟁 중 휴머니스트’ 이야기를 이어갈 예정이다.

사진으로 조우한 경천애인사의 두 영웅

지난 6월 16일 전쟁기념관 2층에서 김영옥 사후 10주년 기념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사진전’을 찾은 노부부는 한 컷의 사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진 속 60여년 전 기억을 좇는 노부부의 눈빛이 흐려졌다. ‘한국전쟁 당시 김영옥이 돌보던 전쟁고아들’이라는 제목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네댓 살짜리 꼬마부터 10대 중반 아이들까지 서른 명 정도의 짧은 머리 고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는 19살, 이 사람은 15살에 여기에 왔어요. (사진 속 인물을 가리키며) 이분이 경천애인사 창설의 주역인 장시화 목사님의 부인이에요. 고아원 터가 어마어마하게 넓었어요. 광복 후에도 헐리지 않고 남아있던 일본 신사(神社)를 활용했으니까. 처음 빈터에 찾아왔을 때 일본인 이름이 쓰인 유골함과 유골이 잔뜩 쌓여 있었어요. 고아원 부지는 경사지에 크게 3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진에 보이는 여기는 2단계예요. 옆에 보이는 건물은 주지스님의 살림집이었을 거예요.”

장홍기씨의 나이는 83세.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고, 발음도 또렷했다. 세월의 더께를 걷어내고 64년 전으로 돌아간 그의 기억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선명했다. 고유명사와 사건발생 연월일도 정확하게 기억해냈다. 그는 20년 전부터 자서전을 쓰고 있다고 했다. 후손을 위해서다. “손주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내가 죽은 뒤 손주들이 내 나이가 되어서 한가할 때 보며 ‘할아버지가 이렇게 사셨구나’ 알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책으로 낼 게 뭐 있나요. 가족들만 보면 되지.”

200쪽 정도까지 썼다는 장씨의 자서전에는 ‘경천애인사 아동원’ 부분이 꽤 길게 서술돼 있다. 해당 부분을 보면 경천애인사 창설 당시의 스토리가 상세하게 나온다. 장씨는 고아들 200명을 모아 경천애인사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경천애인사 출신 부부의 아들은 장혁 청와대 국방비서관이다. 전쟁고아를 보살피던 청년이 자라 공무원이 되고, 그의 아들이 나라를 위해 일하는 국방비서관이 됐다.

이들의 관계를 발견한 것은 김영옥평화센터 이영만 이사장이다. 이 이사장이 두 달 전쯤 장혁 국방비서관을 찾아가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을 기리는 사업을 하고 있다. 국가에서도 많은 관심 부탁한다”고 하자, 장 비서관은 “우리 부모님 역시 김영옥 대령의 은혜를 입으셨다. 두 분 다 김영옥 대령이 보살핀 고아원 경천애인사 출신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주간조선은 장혁 국방비서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는 “내가 부각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부모님 인터뷰 다음날(6월 17일) 짧은 전화 인터뷰에 응했다. 군인 출신다운 절도 있는 목소리였다. 장 비서관은 “아버지께서는 공직에 몸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며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은 경천애인사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본인들이 그곳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으셨고, 그곳에서 뜻있는 일을 하셨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으셨습니다. 전쟁의 아픔을 딛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신 후 고향을 위해 나라를 위해 일하신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장혁 비서관은 작년에 부모를 모시고 서울 삼각지 경천애인사 터를 찾아갔다고 했다. 장 비서관의 부모로서는 60년 만이었다. 찾기는 쉽지 않았다. 나무 계단의 일부가 삼각지 천주교회 오른쪽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오른쪽으로는 자동차 도로가 생겼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500여명의 전쟁고아가 거쳐간 역사적인 시설이 있었던 자리에는 작은 표지석 하나 없었다. 전쟁기념관에서 보면 남쪽으로 불과 수백m 거리다. 국방부 건물을 바라보고 오른쪽 안쪽 동네에 있다.

경천애인사는 김영옥 대령이 이끄는 미국 7사단 31연대 1대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서울에서 가장 탄탄한 고아원 중 한 곳이었다. 서울 최대의 고아원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무수한 스토리를 품은 이 고아원은 창설 3년 만인 1954년 8월 해체되고 만다. 사찰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 때문이다.

천호동 피란민 연락소의 고아들

장홍기·김정옥 부부. 이들 부부 모두 경천애인사 출신이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장홍기·김정옥 부부. 이들 부부 모두 경천애인사 출신이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노부부와의 인터뷰는 전쟁기념관 2층 카페에서 진행됐다. 이영만 이사장도 동석했다. 부부는 앉자마자 낡은 흑백사진 뭉치를 꺼냈다. 통장 지갑에 고이 보관된 구깃한 사진들. ‘敬天愛人社兒童園(경천애인사아동원)’ 간판이 선명하게 새겨진 고아원 입구, 고아원 내부에서 찍은 장시화 목사를 비롯한 운영진들, 미군 부대를 방문해 위문공연을 하는 10대의 김정옥씨 등의 사진이었다. 고아원 측에서 장홍기씨에게 준 표창장 원본도 있었다. 교육부장으로 고아들을 돌본 데 대한 표창장이었다. 표창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표창장/ 장홍기/ 우(右)는 본사직속 아동원 발전을 위하여 공헌이 지대하므로 이에 표창하나이다./ 단기4386년 8월 10일/ 사단법인 경천애인사/ 이사장 이규갑/ 사장 장시화’

강원도 철원이 고향인 두 사람은 어쩌다 서울 삼각지에 있는 고아원에 오게 됐을까?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은 왜 하필 경천애인사를 지원하게 됐을까? 두 분은 경천애인사 고아들의 아버지 같은 김영옥 대령에 대한 기억이 있을까? 숱한 물음을 안고 시작한 본격 인터뷰는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경천애인사 이야기는 19세 청년 장홍기씨가 고향 철원을 떠나는 데에서 시작된다. 1951년 6월 9일 장씨는 가족을 고향에 두고 혼자 미 군용차에 올랐다. UN군과 중국군이 철원을 놓고 뺏기고 빼앗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반공 가정이라고 괄시받던 장씨 가족은 고향을 떠나기로 계획했다. 7남매 중 둘째였던 그가 가족이 살 곳을 물색하려 서울로 향했다. 그가 고향을 떠나던 그날, 아버지가 폭격으로 돌아가셨다. 장씨는 어머니와 동생 다섯과 함께 서울 천호동에 있는 피란민 연락소를 임시 거처로 삼았다.

먹고살 일이 막막해진 그는 ‘대궐할머니’로 불리던 할머니를 찾아 창덕궁으로 무작정 향했다. 구한말 황실의 어차운전사였던 할아버지를 따라 창덕궁에 살고 계시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이 길목에서 그는 훗날 경천애인사의 창설자인 장시화 목사를 만났다. 창덕궁으로 향하던 중 종로 거리에서 ‘기독교신문사 서울지국’이라는 간판을 보고 장씨는 대책 없이 들어갔다. 종교 관련 기관이니 살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서였다. 신문사에 들어간 그는 “북에서 온 피란민입니다. 일자리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잠시 기다리라는 직원의 말에 쌓인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반가운 이름을 발견한다. ‘발행인 장시화’. 철원 출신의 목사이자 이상향을 다룬 소설 ‘촌(村)’과 ‘그는 이렇게 떠났다’란 단편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했다. 장 목사와의 인연은 또 있다.

저녁 무렵 날씬한 체구에 미군복을 입은 장시화 목사가 등장했다. 장홍기씨는 “장시화 목사님이 생각보다 너무 젊으셔서 깜짝 놀랐다”고 회상했다. 동향과 동지로 엮인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다. 두 사람은 그날 밤을 새다시피하면서 고향 이야기, 가족 이야기, 소설 이야기를 나눴다. 장 목사는 그를 수습기자로 취직시켰다. 경험은 없었지만 선배들의 도움으로 교회 관련 현장 취재를 다녔다.

수습기자 생활 두 달 후, 장 목사는 미국인 선교사 앤더슨씨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들려줬다. 거리에서 방황하는 전쟁고아들을 위한 구호대책을 구상 중이며, 구호에 필요한 물자는 미국 구호단체와 주한미군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것이란 얘기였다. 문제는 고아들을 어떻게 모을지, 수용시설은 어디로 할지였다. 장씨는 그때 귀가 번쩍 뜨였다고 한다.

“내가 제안했습니다. 단번에 고아 백 명도 데려올 수 있다고요. ‘천호동에 있는 피란민 수용소(연락소)에 가면 전쟁고아들이 얼마든지 있다, 내 동생도 다섯이나 된다’면서 말입니다. 목사님은 믿을 수 없어 하시며 ‘허풍 떨지 말라’셨어요. 고아를 모으는 것도 문제지만 수용시설부터 찾는 것이 급선무였죠.”

며칠 후 딱 맞는 수용시설을 찾아냈다. 서울 용산의 삼각지에 있는 일본 신사 터였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헐리지 않고 남아있는 이곳은 고아원 시설로 딱이었다. 장씨는 이곳의 구조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길가에 있는 병원 건물은 2층으로 돼 있고, 석탄을 연료로 하는 난방시설이 된 방이 여럿 있어 고아들의 침소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어요. 병원 건물 옆 돌계단을 오르면 왼편엔 넓은 마당과 사원의 부속 건물이 있었지요. 계단 오른편을 오르면 넓은 마당을 지나 사원 본당과 부속건물(넓은 식당과 취사장)이 있고 본당 좌측엔 일식으로 지은 일반 주택이 있었어요.”

200명 고아 이끌고 천호동에서 삼각지까지

경천애인사의 옛 일본 신사 계단에 앉아있는 고아들. 위에 서 있는 여성은 장시화 목사의 부인이다.
경천애인사의 옛 일본 신사 계단에 앉아있는 고아들. 위에 서 있는 여성은 장시화 목사의 부인이다.

기독교신문사 직원들이 몰려와 고아원 청소를 도왔다. 마당에 무성한 잡초를 제거하고 건물 안팎을 청소했다. 그리고 며칠 후 미군 트럭에 실린 구호물자가 도착했다. 이제 고아들 모으는 일만 남았다. 장홍기씨는 앤더슨 선교사가 발급해준 한강 도강증을 가지고 천호동 피란민 수용소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수십 명의 고아가 있었고, 헐벗고 굶주린 전쟁고아는 수용소 밖에도 넘쳐났다. 그는 수용소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고아들을 더 모아달라고 요청했다.

이틀 후 다시 천호동 피란민 수용소를 찾은 그는 기절할 뻔했다. 200명에 가까운 고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서 데려갈 일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동네 어른들의 의심 섞인 눈초리였다. 이들은 “생판 모르는 청년 한 명에게 어떻게 이 많은 아이들을 믿고 맡기냐?”며 질문 공세를 해댔다. 그는 좌중 앞에서 큰소리로 연설했다.

“저는 철원에 있는 원시당 시계점의 둘째 아들 장홍기라고 합니다. 형은 철원극장의 배우 장윤기이고, 내 가족도 이곳에 있습니다. 거리에서 방황하는 고아들을 데려다가 키우려고 왔습니다. 전쟁 중에 아버지를 잃은 우리 가족과 사촌동생 둘도 데리고 가겠습니다. 이 아이들이 살 곳은 삼각지에 있는 경천애인사 아동원입니다. 원장님은 기독교신문사 사장이신 장시화 목사님입니다. 자리가 잡히면 아이들을 학교에도 보낼 계획입니다. 믿고 맡기셔도 됩니다. 아이들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 오실 수 있습니다.”

그의 일장연설 후 좌중이 조용해졌다. 그는 “모인 아이 중에는 엄마가 있는 아이도 꽤 있었다”며 말을 이었다. “양 부모가 없어서 고아가 아닙니다. 내 눈에는 다 전쟁고아로 보였습니다. 누구에게나 먹고사는 게 막막했죠. 어떻게 고아만 데려가 키웁니까. 부모가 있어도 배고픈 아이들이 너무 많은데.” 경천애인사가 ‘고아원’이 아니라 ‘아동원’을 표방한 이유다. 경천애인사에는 실제로 엄마가 있는 아이들이 꽤 있었지만 있어도 고아나 다름없는 아이들이었다.

그 다음은 아이들을 천호동에서 삼각지까지 데려가는 게 문제였다. 혼자서 200명을 경천애인사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모해 보였다. 당시 그의 나이 19세. 고등학교 3학년(철원고급중학교)에 불과한 청소년이었다. 자신만 바라보는 400개의 눈동자 앞에서 그는 겁이 났다.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이 아이들을 무사하게 고아원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 가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섰고 ‘왜 이런 상황을 예측 못했을까? 참 어리석구나’ 하는 자괴감도 컸어요.”

그는 전열부터 가다듬었다. 200명을 5개조로 편성, 40명을 한 조로 짜고 중학생급 아이를 각 조의 조장으로 배치했다. 사열종대로 세우되 맨 앞과 옆, 뒤에는 조금 큰 아이들을 세워 어린 동생들을 보호하도록 대열을 짰다.

200명 행렬은 천호동을 떠나 한강을 건너가야 했다. 곧 광나루에 있는 미군 초소에 이르렀다. 초소의 미군들이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그가 미리 준비해둔 영어로 몇 마디 했으나 미군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미군이 아니라 누가 봐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한참 후 한국어 통역관이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상황을 들은 통역관은 “이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걸어서 삼각지까지 갈 계획이었소?”라며 기막혀 했다. 통역관은 한참 동안 어딘가와 통화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밝은 표정으로 나와 그의 어깨를 잡으며 소리쳤다. “걱정 끝! 부대 차가 와서 태워 가기로 했어요.” 장씨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 기쁨과 안도가 뒤섞인 눈물이었다. 잠시 후 육중한 미군 트럭 3대가 도착했다. 미군들이 아이들을 번쩍 안아서 탑승을 도왔다. 덩치 큰 미군들에게 배고픔에 지친 아이들은 너무도 가뿐했다.

경천애인사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저녁 5시. 아이들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은 상태였다. 당장 한 끼의 밥이 문제였다. 지원받은 안남미를 주방에 있는 큰 가마솥에 앉혔다. 빈집을 돌아다니며 구해온 무청 시래기와 된장이 구세주였다. 여기에 미군에 보내준 햄과 소시지, 통조림을 넣고 끓인 국적 없는 요리로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웠다.

장홍기씨는 20년 전쯤 장시화 목사와 극적인 해후를 했다. 철원교회에 설교차 온 장 목사가 철원 토박이인 그를 수소문해 찾아온 것. 장씨는 그때의 심경에 대해 “반가우면서도 슬펐다”고 표현했다. 경천애인사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컸기 때문이다. 장씨는 소장하고 있던 경천애인사 관련 사진 뭉치를 꺼냈다. 장시화 목사는 감격하며 “어떻게 이 많은 사진을 가지고 있었냐?”며 놀랐다 한다. 장 목사는 “복사하고 돌려주겠다”며 간 후 연락이 끊겼다. ‘기다리면 언젠가 오겠지’ 하며 연락처도 묻지 않은 채 헤어졌다 한다.

아내 김정옥과의 인연

일본 신사 터에 있었던 경천애인사(왼쪽)와 현재 모습(오른쪽). 일본 신사가 헐리고 삼각지성당이 들어섰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일본 신사 터에 있었던 경천애인사(왼쪽)와 현재 모습(오른쪽). 일본 신사가 헐리고 삼각지성당이 들어섰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아내 김정옥씨도 강원도 철원이 고향이다. 교회 장로이자 민족주의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신탁통치반대운동을 하다 끌려갔고, 가족은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같이 살던 새어머니 또한 전쟁 후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전쟁통에 고아가 된 김씨는 철원에서 미군차를 타고 천호동 피란민 연락소로 왔다. 그곳에서 경천애인사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김정옥씨의 말이다. “경천애인사에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거기에 가면 밥도 꼬박꼬박 주고 학교도 보내준다고요. 그해 겨울 오빠 친구를 따라 나섰어요. 얼어붙은 한강 위를 걸어서 건너고, 광나루에서 동대문까지 전철을 탔죠. 물어물어 찾아간 경천애인사는 천국 같았어요.”

개원 후 처음 맞는 1951년 크리스마스, 김정옥씨는 경천애인사의 미군부대 위문공연단에 뽑혔다. 김씨는 철원 중앙여고 재학 당시 무용부였다. 유명 무용수 최승희가 이 학교 무용단을 방문해 특강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미군에 대한 보답의 차원에서 시작한 경천애인사의 위문공연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다. 가까이에 있는 미군부대부터 전방에 있는 부대까지 숱하게 방문했다. 김씨는 “앤더슨 선교사가 풍금을 치며 캐럴을 가르쳐줬다. 신나게 따라부르며 배웠다”고 하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그때 배운 캐럴을 흥얼거렸다.

동향인 두 사람은 철원에서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교회 장로인 김씨의 아버지가 아들 친구이자 심성 곧고 믿음직한 장씨를 예뻐하셨다 한다. 경천애인사의 선생 다수가 철원 교회 청년부 학생들이었다. 이들을 끌어들인 이 역시 장씨다. 김씨는 장씨를 ‘경천애인사에서 가장 인기 많은 선생님’으로 기억했다. 경천애인사의 교육부장이었던 장씨는 자격 있는 아이들을 골라 학교에 입학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한글, 산수 등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건 기본이었다. 김씨의 말이다. “아이들이 이 사람을 많이 따랐어요. 진짜 사랑으로 대해줬거든요. 친구 동생이라고 특별히 나를 귀여워해 주진 않았어요.” 듣고 있던 장씨는 “마음은 갔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빵 하나도 슬쩍 갖다주지 못했어요”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경천애인사가 탄탄히 자리를 잡은 1952년 11월, 장씨는 군입대를 위해 고아원을 떠나야 했다. 첫 휴가 때 그는 경천애인사를 찾아와 동료 조석진과 결의를 다졌다. “동료들이 하나둘 군대를 가면서 초심이 흔들리는 것 같다. 혈육은 아니지만 우리는 형제자매 같은 마음으로 이곳을 지켜왔다. 휴전도 되고 나도 곧 제대할 거다. 제대 후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올 거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흩어진 동료들을 모아 초심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이날이 경천애인사와의 영원한 이별이 됐다. 사찰 소유권 문제가 불거지면서 경천애인사가 해체되고 소속 아이들은 북한산 교양원을 비롯한 다른 고아원으로 분산 수용됐다.

미국에서 한국인 2세로 태어나 2차대전, 한국전을 누비며 세계가 꼽는 전쟁영웅이 된 김영옥. 김영옥이 이끄는 1대대는 1951년 겨울부터 경천애인사를 지정해 재정지원을 시작했다. 대대 장병뿐 아니라 장병의 가족들까지 지원을 해준 덕에 경천애인사 고아들은 다른 고아원에 비해 물자가 풍족했다. 한국전쟁에서 일선 전투부대로서 고아원 한 곳을 지정해 재정지원했던 유엔군 부대는 김영옥 부대가 유일했다고 한다.

김영옥의 보이지 않는 지원

서울 용산 전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영옥 사진전을 찾은 장홍기·김정옥 부부. 경천애인사 고아들에게 김영옥 대령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서울 용산 전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영옥 사진전을 찾은 장홍기·김정옥 부부. 경천애인사 고아들에게 김영옥 대령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당시 전쟁고아를 수용하는 고아원은 전국 곳곳에 있었다. 김영옥 대대는 왜 이곳을 콕 집어 지원했을까. 이야기는 김영옥 대대의 군목이었던 샘 닐 대위와 연관된다. 1951년 크리스마스, 샘 닐 대위가 김영옥 대령(당시 대위)을 찾아와 ‘지미’라는 전쟁고아 이야기를 꺼냈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길에서 헤매고 있는 열한 살짜리 아이라며 지미를 위해 적당한 고아원을 찾아주고 그 고아원에 지속적으로 재정지원을 하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순간 김영옥의 머릿속에 부산역에서 본 풍경이 스쳐갔다. 흥남 철수 후 인원과 장비를 재편하고 있던 7사단으로 가는 길이었다. 눈 덮인 부산역에서 본 아이들의 모습은 참담했다. 다섯 살에서 열 살쯤 돼 보이는 천 명 가까운 아이들은 혹독한 추위에도 얇은 옷을 걸쳤고 옷에는 땟물이 흘렀다. 아이들은 기차 주위를 배회하다가 미군이 역 안으로 들어오면 몰려들어 먹을 것을 구걸했다. 아이들 사이를 지나 기차에 오른 그는 미군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육군 17연대로 가는 대위 김영옥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지요. 지금 저 밖에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이 우리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여기 쌓여있는 C레이션은 여러분 것입니다. 한두 끼쯤 배불리 먹지 않아도 죽지 않습니다. 한 사람 앞에 깡통 한두 개씩만 빼시고 나머지를 내게 주십시오. 아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는 이날을 2차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틀어 가장 참담한 순간으로 기억했다. 평생 그렇게 많이 울어본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고아들을 위해 나서려던 참이었다. 김영옥은 먼저 제안을 해준 샘 닐 대위가 고마웠다. 지미를 맡길 후보 고아원을 물색했고 현장 답사까지 마친 끝에 정한 곳이 바로 경천애인사였다. 감리교인 장시화 목사가 세웠고 같은 감리교인 레너드 앤더슨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는 곳. 닐 대위가 현장조사단을 이끌고 그곳을 찾았을 때 192명의 고아들을 수용 중이었고 아이들을 위한 세 끼 밥도, 겨울 옷도 변변치 않았다고 한다.

닐 대위는 경천애인사에 지미를 맡기면서 첫 지원금 145달러를 건넸다. 그리고 부대로 돌아와 고아들의 지원에 대한 부대원들의 뜻을 모았다.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경천애인사 고아들을 돕자는 편지를 썼고 얼마 후 옷이나 장난감 등이 경천애인사로 하나둘 배달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교회조직을 통해서도 경천애인사로 구호품이 전달됐다. 장홍기씨는 “구호품 상자를 풀다 보면 주머니에서 달러가 종종 나왔다. 영문으로 된 미군 가족들의 편지도 꽤 받았다”고 말했다.

군수품으로 나오는 캔맥주나 양담배는 경천애인사의 탄탄한 재정의 밑거름이 됐다. 술과 담배는 암시장에서 인기가 높았다. 김영옥 대대로 도착하는 캔맥주의 50%는 암시장 거래를 통해 다른 물자 형태로 경천애인사에 지원됐다. 김영옥이 경천애인사를 지속적으로 돕기 위해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직접적으로 장병들에게 지시하지 않았다. “맥주 보급량이 너무 많으니 보급량의 반을 버려라. 처분 방법은 알아서 하고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보고할 필요가 없다”며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그는 경천애인사로 가는 품목을 보고는 “아이들 이가 상하니 초콜릿과 캔디는 일정량만 주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김영옥은 한국계인 자신의 존재를 의식해 고아원을 돕는 게 아니라 장병 스스로 지속적으로 돕게 하도록 신경을 썼다. 경천애인사 지원 관련 의사결정에서 장교는 제외했고, 병사들 스스로 결정하게 했다. 물품전달 과정에서도 장교는 예외였다. 경천애인사 방문은 모범 사병들에게 며칠씩 외박과 함께 특전으로 주어졌다. 장병들은 자신의 순서를 학수고대했고 경천애인사로 향하는 날 지프에는 초콜릿, 캔디, 장난감, 야구공, 악기 등이 가득 실렸다.

김영옥은 경천애인사 고아들에 대한 애착이 깊었다. 2003년,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을 당시 그의 수상 소감은 “한국전쟁에서 보살폈던 고아들을 보고 싶습니다”였다. 뉴스를 통해 이 말을 전해들은 경천애인사 출신 고아들은 하나둘 연락을 해왔다. 하남시 선린신용협동조합 이사장을 지낸 문관욱씨, 서울 시흥동 시은산교회 최문경 목사의 부인 조영자씨 등이 그들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키다리아저씨처럼 500명 전쟁고아들의 아버지 역할을 한 김영옥. 하지만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딱 한 번, 경천애인사를 방문했을 뿐이다. 김영옥은 “말끔히 차려입고 자신을 맞은 고아원 아이들을 잊을 수 없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장홍기·김정옥 부부는 경천애인사에 있을 당시 김영옥의 존재를 알았을까? 장홍기씨는 “자세히는 몰랐다”며 말을 이었다.

“어느 한국인이 미군 장교가 됐는데, 그 사람이 우리를 많이 도와준다는 것을 앤더슨 선교사를 통해 들었어요. 보이지 않는 든든한 기둥 같은 존재로 느껴졌죠. 그가 김영옥이라는 것은 몇 해 전 책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을 읽고서야 알았습니다.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책을 보니 그분은 의도적으로 안 나타나셨더군요. 군목이나 앤더슨 선교사를 통해 고아들을 보살핀 그 깊은 심성이 읽혀져 더 깊은 감동과 감사로 다가왔습니다.”

전쟁영웅 김영옥(1919~2005)

2차 세계대전·한국전 참전, 불패신화 이뤄

김영옥은 미국에서 한국인 2세로 태어나 미군 장교가 됐다. 그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에 참전해 불패신화를 일궈낸 전쟁영웅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의 로마 해방전과 피사 해방전의 주역이다. 종전 후 세탁소를 운영하다가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자원입대해 한국전에 몸을 던졌다. 한국전에서는 미군 사상 최초로 유색인 야전대대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중부전선을 책임지던 미 육군 7사단의 선봉부대를 맡아 북쪽으로 60㎞를 치고 올라가며 현재의 휴전선을 긋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공적은 한국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더 조명받아 왔다. 미국의 포털사이트 msn.com은 2011년 미국 현충일을 맞아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16인을 선정했는데, 유색인으로는 김영옥을 유일하게 포함시켰다. 김영옥은 프랑스 최고무공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2005)을 받았고, 미국 은성무공훈장, 이탈리아 최고무공훈장, 프랑스 십자무공훈장, 한국정부 국민훈장 모란장 등 숱한 훈장을 받았다. 그는 공적을 내세우지 않았고 상에 연연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는 특별무공훈장(DSC)을 사양했다. 미국 무공훈장으로서는 명예무공훈장에 이어 두 번째 높은 것으로 주한미군사령관 직권으로 줄 수 있는 가장 높은 이 훈장을 사양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훈장은 받을 만큼 받았습니다. 훈장을 하나 더 받는다고 더 용감한 군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정히 훈장을 주시려거든 내 부하들에게 주십시오.”

1972년 대령으로 예편한 뒤에는 미국 정재계의 숱한 제안을 물리치고 가정폭력 피해여성, 장애우, 노인, 청소년, 입양아, 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겸손과 헌신, 용기라는 정신적 유산을 남긴 그의 삶은 점점 부각되고 있다. 2001년 미국 LA에는 ‘김영옥 중학교’가 개교했고, 한국에서는 2011년부터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김영옥의 삶을 대대적으로 싣고 있다.


김영옥을 알린 주역들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낸 재미 언론인 한우성씨

묻힐 뻔한 김영옥의 영웅적 삶을 대중에게 알린 주역은 한우성씨다. 재미(在美) 언론인 한우성씨가 없었다면 한국인 대부분은 김영옥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김영옥 생전에 그를 6년 이상 꼼꼼히 취재하고 쓴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은 전기로서 완성도가 높다. 참전용사들의 증언ㆍ메모ㆍ회고록, 미군의 전투일지, 전장에서 발간된 신문, 김영옥을 다룬 각종 자료와 전문가 증언 등 확보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료를 섭렵하고 현장취재를 거쳐 쓴 책이다. 평전이라기보다 흥미진진한 영웅소설에 가깝다. 6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이 허구가 가미되지 않은 100% 팩트라는 사실이 놀랍다. 2005년에 초판이 발간됐고 5만권 가까이 팔렸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김영옥의 성격상 그의 업적 상당 부분이 감춰져 있었다. 한씨는 김영옥 취재를 통해 △한국전쟁 참전 △한국의 휴전선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 △한국전쟁 당시 최전방 대대장으로 있으면서 수백 명의 전쟁고아를 보살핀 업적을 발굴해냈다.

한씨는 “침묵과 겸손은 김영옥의 인품에 향기를 더하지만, 취재하는 나에게는 참으로 커다란 장애물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편한 점도 있었다고 한다. 김영옥에 대한 전기를 쓰겠다고 하자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고 한다.

한우성씨는 연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했다. 부모형제가 다 이민을 떠났지만 혼자 한국에 남아 군대 생활을 두 번이나 했다. 이후 이민길에 올라 LA에서 발행되는 한국일보 기자가 됐다. 한국기자상, 미국 소수계 기자상, AP통신 기자상을 받았고, 퓰리처상 후보에도 올랐다.

‘김영옥평화센터’ 세운 이영만 이사장

이영만 김영옥평화센터 이사장은 김영옥의 영웅적 삶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해 12월 ‘김영옥평화센터’를 창립한 주역이다. 이영만 이사장은 지난해 4월 공군사관학교장 보직을 마지막으로 퇴역한 예비역 공군중장(59·공사27기)이다. 그는 ‘김영옥 영웅 만들기’에 남은 인생을 걸었다. 퇴역 후 외국계 기업 CEO, 대사 등의 제안이 있었지만 다 거절했다고 한다.

이영만 이사장은 “김영옥은 20세기 한민족이 낳은 전설적 전쟁영웅이자 위대한 인도주의자인 동시에 인권운동가였다. 그가 남긴 겸손과 헌신, 용기라는 정신적 유산을 차세대 지도자들에게 널리 계승해야 한다”고 평화센터의 필요성을 밝혔다.

△김영옥의 나라사랑 정신과 리더십 보급 △청소년 학생 및 교사 대상 교육연수 지원 △국내외 평화정책 연구 △국가유공자·유가족·사회적 약자에 대한 봉사활동 등이 평화센터가 추진하는 사업이다. 6월 말까지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리는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사진전’도 평화센터가 주최했다.

이날 장홍기·김정옥 부부의 인터뷰를 주선하고 끝까지 동석한 그는 인터뷰가 끝나자 이렇게 말했다. “오늘 두 가지 과제가 생겼다. 김영옥 대령이 돌본 고아원인 경천애인사 터에 표지석을 세우고, 김영옥 대령이 한국전쟁 당시 거쳐간 격전지를 ‘김영옥 유적지’로 되살리는 일이다.”

평화센터는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운영된다. 창립 당시 180명이었던 회원은 6개월 만에 두 배에 가까운 340여명으로 늘었다. 매달 1만원의 회비를 내는 ‘김영옥평화센터’ 회원은 한국 사회 각계각층을 막론한다.

문의 (02)597-5510

김민희 기자 / 윤수정 인턴기자·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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