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가 촉발한 프랑스대혁명을 묘사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루소가 촉발한 프랑스대혁명을 묘사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세기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인간불평등의 발견자’라고 불린다. 루소가 남긴 빛나는 말이 많으나 그중에서도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지금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사회계약론’)는 말이 가장 유명하다. 루소의 이 말은 시대를 관통해 영원한 생명력을 갖는다. 빈부 격차가 어느 때보다 세계적 이슈가 되어 있는 이때, 루소가 당대 유럽인에게 던진 메시지는 시공을 넘어 21세기에도 호소력을 갖는다. ‘1%’를 향해 ‘99%’가 과다한 빈부 격차의 부정의함을 말할 때 ‘불평등의 발견자’ 루소는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다.

제네바공화국 출신인 루소가 불평등에 대해 관심을 가진 건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나타난다. 루소는 이 글에서 “악의 근원은 불평등이다. 왜냐면 불평등에서 부가 도출되기 때문이다. 가난과 부라는 말은 서로 관련이 있어 평등한 곳에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을 것이다”(‘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라고 말했다. 왕이 외국의 학자에게 편지를 보내 토론을 했던 당시는 계몽군주시대라고 불리었다. 루소는 ‘학문과 예술의 진보는 풍속의 순화에 기여했는가’라는 디종 아카데미 현상공모 논문에서 “그렇지 않다. 문명의 진보는 오히려 도덕의 퇴보를 가져와 인류 역사를 불행과 악덕으로 넘쳐나게 했을 뿐이다”라는 요지의 주장을 해 1등을 한 바 있다. 이를 보고 스타니스와프 왕은 반박을 했고, 루소는 재반박문을 왕에게 보낸 것이다.

루소가 인간 불평등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디종 아카데미의 또 다른 현상공모 논문에서였다. 논문 주제는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였다. 프랑스어로 쓰든 라틴어로 쓰든 무방하며, 논문의 분량은 ‘읽는 데 45분이 넘지 않는 분량’이라고 명시됐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이라는 주제에 충격을 받았다. 부인 테레사와 함께 생제르맹의 숲에 들어가 인간사회의 착취에 대해 깊은 사유를 시작했다.

그러나 루소는 이번에는 수상하지 못했다. “사유재산제도가 인간 사이에 불평등을 초래했으며, 기존의 법과 정치 제도는 모두 그 사유재산을 보호하도록 만들어진 것이기에 변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 지나치게 급진적인 데다 절대왕정을 턱밑에서 비판”했기 때문이었다.(김중현, ‘세기의 전설’에서 인용) 우승을 차지한 현상공모 논문은 불평등을 원죄의 결과로 설명한 한 기독교 사제의 것이었다.

루소는 현상공모에서 낙선한 논문을 2년 뒤인 1755년 4월 ‘인간불평등기원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고, “이 작품은 그의 모든 작품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이 되었다.”(김중현, ‘인간불평등기원론’ 서문에서 인용) 루소 초기의 이 걸작은 말기의 위대한 저작인 ‘사회계약론’의 싹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루소는 프랑스혁명에 가장 크게 기여했고, 근대 사회과학의 창시자”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루소의 펜 끝은 ‘사회계약론’에서 더욱 예리해졌다. 그는 “법은 항상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롭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해롭다”고 지배계층이 숨기고 싶은 진실을 드러냈다. 그는 또 ‘백과전서’에 쓴 글에서는 “유력자가 자신의 채권자들로부터 훔치고 또 다른 나쁜 짓을 할 때, 그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확신하지 않는가?…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절도를 당하면 경찰 전체가 곧 행동에 들어가고, 그가 의심하는 죄 없는 사람들에게는 불행이 닥친다”라며 더 날을 세웠다. 18세기의 한 저술가는 “사회계약론의 대부분은 불량 소설이다. 군주국 안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정부는 공화정이고, 왕은 단지 ‘임무’와 ‘직위’를 가질 뿐이며, 그 안에서 왕은 ‘인민이 그에게 부여한 힘을 인민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인민의 일개 관리’에 불과하며, ‘인민은 자신들이 원할 때 이러한 권력을 제한하고 수정하고 회수하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주장을 출판했다는 걸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루소가 쓴 ‘사회계약론’은 시한폭탄이었다. 폭탄은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으로 시작된 프랑스대혁명에서 터졌다. 1762년 ‘사회계약론’ 초판이 나온 지 27년이 지나서였다. 프랑스대혁명 2년 후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1740~1814)는 ‘혁명의 최초 작가들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루소’라는 책을 냈고, 프랑스혁명 지도자들은 앞다퉈 루소를 혁명의 스승으로 모셨다. 이로써 루소는 프랑스혁명의 아버지란 영예를 얻었다.

루소의 급진적인 사회 비판은 한 세기 후 칼 마르크스에도 비교된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지금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문장은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처럼 들린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이라고는 그대들을 묶고 있는 쇠사슬뿐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루소가 사회적 불평등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던 건 그 자신이 처한 삶의 현실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명문가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수공업자 계급으로 떨어졌고, 토리노에서는 하인으로 신분이 더 낮아졌고, 사부아에서는 낮은 직위에서 일했고, 리옹과 파리에서는 상층 부르주아 계급과 지주 집에서 가정교사와 비서 노릇을 했다. 그는 주요 작품을 쓴 뒤 자신의 경력을 돌아보며 “사회적으로 주변부에 있었기에 사람을 신분에 따라 규정하는 문화에 특별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루소는 당대와 불화했다. 시대를 앞서 사는 사람은 당대와 화해하지 못한다. ‘루소,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리오 담로시 지음)를 번역한 이용철 교수(한국방송통신대 불어불문과)의 말을 인용한다. “루소는 ‘학문예술론’으로 과학과 예술, 기술의 발전을 포함한 문명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인류의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는 계몽주의의 낙관적 믿음을 공격하였으며,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는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음을 규명하였다. 또 ‘사회계약론’에서는 철학자들이 이상적인 정치 모델로 제시한 계몽군주제에 반대하여 자유와 평등을 모토로 삼는 급진적인 공화정을 내세웠다.”

결국 루소는 ‘학문예술론’으로는 계몽철학가들과 싸웠고, ‘사회계약론’이라는 칼을 들고 왕과 귀족, 성직자들과 갈등한 것이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다음과 같이 당대의 기독교를 비판하기도 했다. “기독교 정신은 전제 정치에 너무나 호의적이어서 전제 정치가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노예이게끔 되어 있다.” 루소의 동시대인이고 대표적 계몽사상가인 볼테르가 루소에게 보인 불쾌감의 표시는 유명하다. 볼테르는 루소로부터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증정받고서 책 여백에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거지의 철학을 보라”고 분노에 떨었다고 알려져 있다.

6월 28일은 장 자크 루소 탄생 300주년이다. 이 위대한 사상가의 탄생을 한국의 학자들도 기념한다. 한국정치학회와 한국정치사상학회는 6월 16일 ‘루소 사상과 정치의 새 지평’이라는 주제로 기념학술회의를 공동개최하고, 프랑스학회는 11월에 ‘사회계약론’을 중심으로 루소의 저작을 해석하는 학술회의를 예정하고 있다. 출판사 책세상은 루소전집을 내고 있다.

최준석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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