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4월 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중국을 방문한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photo AP·뉴시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4월 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중국을 방문한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photo AP·뉴시스

지난 5월 30일 중국 외교부 정례 브리핑에서 한 외신기자가 맨 먼저 다음 질문을 던졌다. “보도에 따르면, 일본과 북한이 스웨덴에서 협상을 벌여 북한은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재조사하기로 하고, 일본은 부분적으로 대북제재를 해제하기로 합의했다. 중국은 이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친강(秦剛) 외교부 대변인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짧게 답했다. “우리는 관련 보도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일본과 북한이 대화를 통해 피차 관심 분야를 해결하고 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이 지역 평화와 안정에 유리하다.”

친 대변인의 발언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정부의 외교정책을 강하게 질타하던 종전의 태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중국 언론도 이 뉴스를 작게 취급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人民日報)는 지난 5월 30일자에서 조선중앙통신 발표를 인용해 사실(팩트)만 보도하고 평가나 분석은 일절 내놓지 않았다. 다른 매체는 인민일보 보도를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 중국이 자국 안보에 큰 영향을 미칠 북·일 합의에 대해 이처럼 ‘큰일 아닌 듯이’ 취급하는 이유는 뭘까.

한국에 체류 중인 한 중국학자는 기자에게 “그 문제에 대한 검토가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했다. 중국 정부 내에서 이 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아 대변인이 ‘정부 입장’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북·일 합의 1주일이 지나도록 국책 연구기관이나 언론이 분석을 내놓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태도는 역설적으로 중국이 북·일 합의 내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 된다.

동북아시아의 역학관계로 볼 때 ‘스톡홀름 합의’는 아베가 김정은의 손을 잡고 시진핑에게 ‘역습’을 가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중·일의 아시아 패권 경쟁은 최근 해양분쟁(조어도·센카쿠, 남중국해)과 역사갈등(난징대학살 논쟁, 안중근의사 기념관 등)에서 군사·외교전(중·러 연합훈련, 북·일 접근 등)으로 확산되는 추세에 있고, 일본의 대북 접근은 아베 정부에 의해 대중 외교전의 새로운 돌파구로서 준비돼 온 것이기 때문이다. 아베는 그동안 북한을 ‘군사위협국’의 하나로 거론하며 재무장의 명분으로 삼아왔으나 이번 스톡홀름 협상에서는 오히려 ‘북핵강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독자 제재를 풀기로 했다. 또 두 나라가 수교 단계로까지 간다면 수백억달러의 식민시대 보상금이 북한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러한 외교적 급선회는 아베의 목적이 다른 곳, 즉 ‘중국 견제’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베의 ‘중국 때리기’는 시진핑의 ‘일본 무시 외교’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시진핑 정부는 2~3년 전부터 미국과의 경쟁과 협력을 통한 새로운 질서 형성을 뜻하는 ‘신형대국관계론’을 들고나왔다. 미국이 중국을 G2로서 대우하고 중국의 핵심이익을 존중해 준다면 중국도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협력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 외교전략을 표방하면서 일본을 ‘주변국 외교’ 범위에 포함시켰다. 즉 일본을 더 이상 ‘(강)대국’으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국의 하나로 ‘강등’시켜 버린 것이다.

이에 두 나라 정상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사사건건 부딪쳤다. 시진핑은 5월 21일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에서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 인민이 지켜야 한다”며 미국의 ‘아시아 회귀’를 비판한 뒤 “다른 나라의 희생으로 자신의 안보를 도모해선 안 된다. 카자흐스탄 속담에 ‘남의 촛불을 불어서 끄면 자기 수염이 타버린다’는 말이 있다”며 일본의 도발을 꼬집었다. 중국은 또 러시아와 10년 이상 끌어온 천연가스 협상을 타결했을 뿐만 아니라 동중국해에서 러시아와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해 미·일동맹에 대항하는 ‘중·러연합’을 과시했다.

이에 대해 아베는 5월 30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3차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아베 독트린’을 통해 “(중국의) 힘에 의한 일방적 현상변경 시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맞받아쳤다. 그는 “전후 70년을 앞둔 일본의 역사는 평화국가로서의 행보”라며 “앞으로 일본이 국제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아베는 또 미국과 함께 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지갑’이 비어버린 미국을 대신해 아시아에서 중국 견제의 비용을 대겠다는 것이다. 미국이 아베의 재무장을 눈감아주는 까닭이 여기 있다.

중·일 갈등은 1972년 양국 수교 이후 계속돼온 동북아 평화협력질서에 큰 도전이 되고 있다. 42년 전 두 나라는 제국주의 일본이 뿌려놓은 갈등의 씨앗들을 봉합하고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합의했다. 이는 2차 대전 이후 아시아의 평화와 발전의 초석이 돼왔다. 한국의 경제발전도 중·일의 평화공존 위에서 꽃을 피웠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보통국가화’가 맞부딪치면서 ‘1972년 체제’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양상이다. 한동안 양국 관계를 표현하던 ‘정냉경열(政冷經熱·정치는 차갑고 경제는 뜨겁다)’ 용어는 ‘정냉경냉’으로 바뀌었다. 두 나라 사이에 ‘평화와 협력’을 촉진하던 요소는 급격히 약화되는 반면 ‘대결과 전쟁’을 야기하는 요소는 급증하고 있다. G2(중국)와 G3(일본)의 갈등은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것이어서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려우며 오히려 전방위적 대결구도와 전쟁 직전까지의 갈등 격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시진핑은 북한의 김정은으로부터도 ‘역습’을 당한 격이 됐다. 시진핑은 집권 직후 북한의 3차 핵실험에 크게 실망하여 대북제재와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한국의 박근혜 정부와 손잡아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는 전략을 펴왔다. 시진핑 정권의 ‘대북 현실주의 노선’은 북한의 핵 도발을 중국 국가 이익에 대한 침해로 간주하고 한반도 비핵화의 비중을 높인 외교노선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북한과 가까웠던 중국 군부조차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 노선에 따라 시진핑은 북한 김정은을 2년 반이 넘도록 초청하지 않았고, 북한을 먼저 방문했던 역대 지도자의 관례를 깨고 한국을 먼저 방문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올 들어 북한의 4차 핵실험 우려가 높아지자 대북 원유공급을 일시 중단해 압박 강도를 높였다. 중국 군부는 북한 붕괴에 대비해 국경지역에 난민수용소 건립까지 검토했다.

김정은은 이에 대해 시진핑과 기싸움을 벌이며 강하게 반발해왔다. 나진·선봉 지역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러시아 자본을 끌어들여 북·러 철도망을 재건했다. 고모부인 장성택을 숙청해 친중세력을 일소하는 한편, 장성택 시절 중국과 합의한 위화도·황금평 지역에 대한 개발도 사실상 보류했다. ‘스톡홀름 합의’는 이런 흐름에서 김정은이 아베와 손잡고 자신을 길들이기 하려는 시진핑의 뒷머리를 후려친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에 서버를 둔 중국어 매체 둬웨이(多維)는 “김정은이 시 주석의 방한을 앞두고 일본과 중대한 성과를 도출했다. 이는 중국에 대한 불만을 나타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일 합의는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보다 경제난에 처한 김정은 정권에 숨통을 틔워주어 체제 안정에 더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일성과 김정일도 과거 중·소(中蘇)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로 이득을 취하곤 했다.

‘스톡홀름 합의’는 중국의 대북정책을 다시 한 번 혼란에 빠뜨릴 가능성이 높다. 시진핑이 종전과 마찬가지로 김정은을 계속 압박할 경우, 북한은 일본·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미국과 외교적 돌파구를 만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미·일동맹에 대응한다는 중국의 중장기 외교전략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중국이 대북압박을 늦추고 유화정책을 취한다면 ‘대국(大國)외교’는 힘과 원칙을 잃고 시진핑의 체면도 구기게 된다. 이 정도 카드에 중국이 흔들린다면 김정은은 더욱 기고만장해져 대남도발 등 제멋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중국 외교전문가들 사이에 대북정책 논쟁이 한창이다. 추수롱(楚樹龍) 칭화대(淸華大) 공공관리학원 교수나 장롄구이(張璉瑰) 중앙당교 교수 등은 중·북 관계를 정상국가 관계로 전환하고 북핵 개발을 강력히 저지할 것으로 주문한다.

반면 전통적 북·중 관계 중시론자들은 북한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류쟈(劉佳) 연구원은 지난 4월 4일 화신망(和迅網) 기고문을 통해 “북·중 관계가 갈수록 소원해지고 있지만 북한이 중국에 큰 전략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의 경제발전 잠재력이 크고 지정학적 위치가 매우 중요하며, 한반도의 현상유지가 한국뿐만 아니라 모든 대국의 공통된 희망사항이고,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 이후 한·중 간 영토분쟁 발생 가능성이 있다”는 등 3가지 이유를 들었다. 북·일 합의 직후 중국 내에서 이 같은 ‘순망치한론’이 더욱 힘을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중국 외교팀은 쉽게 입장을 드러낼 것 같지는 않다. 옌쉐통(閻學通) 칭화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 ‘2023년’에서 향후 일본 경제가 10년 침체를 거듭할 경우 2023년에 일본의 GDP는 미국이나 중국의 3분의 1에도 못 미칠 것이며, 고령화 등으로 일본의 국제적 위상은 ‘글로벌 대국’이 아니라 ‘지역 대국’으로 전락할 것으로 예측했다. 시간만 지나면 일본의 위협도 크게 약화될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 북한이 일본을 발판 삼아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노린다고 해도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근본적인 북·미 관계 개선도 어렵다. 이런 점에서 중국은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보고 북·일의 협상과정을 지켜보며 대북·대일정책과 아시아 전략을 신중하게 재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는 1차 중일전쟁(청일전쟁)이 일어났던 1894년으로부터 120년이 되는 또 하나의 갑오년(甲午年)이다. “갑오년에 큰 재난이 일어났다”는 속설처럼 올해 중·일 갈등이 격화되고 거기에 한반도가 말려드는 양상이다. 120년 전 두 강대국이 한반도에서 격돌했듯이 북한 지역이 또다시 중·일 대결의 장이 되게 놔둘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는 수동적이고 사후대응식의 대북정책에서 벗어나 상상력을 발휘하는 창의적 대북정책으로 적극 일을 벌이고 국면을 주도해 나가야 한다. ‘창의적 대북정책’은 군인이나 공무원(외교관)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팀의 인적쇄신과 발상의 전환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지해범 조선일보 동북아시아연구소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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