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민씨가 기획해 독일 작가 토비아스 레베르거와 협업한 MCM 플래그십 스토어.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정상민씨가 기획해 독일 작가 토비아스 레베르거와 협업한 MCM 플래그십 스토어.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4월 21일 저녁 서울 강남구 청담동 성주그룹의 MCM 플래그십 스토어에 국내외 패션리더들이 총출동했다. 세계 패션 업계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는 수지 멘키스 보그 에디터, 주얼리 브랜드인 마커스 랭거스 스와로브스키 회장 등을 비롯해 국내 패션 관계자, 모델, 연예인 등 참석자는 700여명에 달했다. 패션계의 다보스포럼이라고 할 수 있는 제2회 컨데나스트 럭셔리 콘퍼런스(4월 20~21일) 서울 행사의 마지막 일정이 이곳에서 열린 것이다. 이 날 파티의 주연은 재단장한 MCM 하우스였다. 독일 작가인 토비아스 레베르거의 설치작품이 전시된 공간은 그 자체가 예술이었다. 최근 기업의 키워드는 MCM처럼 브랜드에 예술을 입히는 것이다. ‘아트’와의 협업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기업들마다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여줄 작가 모시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해 9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한복디자이너 이영희의 ‘바람-바램’전은 전시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며 화제를 불렀다. 이 전시는 다양한 퍼포먼스와 화려한 전시공간을 통해 한복을 예술 차원으로, 이영희를 아티스트로 끌어올렸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복합공간 ‘올 어바웃 컨텐츠’(대표 나디아 위). 옷도 팔고 가구도 팔고 소품도 파는 매장 한쪽에 입체와 평면을 넘나드는 윤정원 작가의 그림과 샹들리에 작품이 걸려 있다. 물건과 예술 작품이 경계 없이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살롱 같은 공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젊은 예술가들이 오다가다 들러 예술과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실험적인 공간으로 3개월마다 새로운 작가의 전시가 열린다.

미술이 전시장만 지키던 시대는 지났다. 물건, 문화, 공간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기업도 지자체도 융합·창조를 외치고 예술이 일상이 된 시대, 삶과 미술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아트디렉터이다. 글로벌 시대 ‘K컬처’를 만드는 ‘숨은 손’이다. 앞에 소개한 세 프로젝트는 예술기획회사인 AMM의 정상민(37) 디렉터의 작품이다. 그는 기획력 하나로 무장하고 뛰는 독립군 아트디렉터이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작가를 섭외하고 다양한 요소들이 시너지를 일으키게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그를 통해 아트디렉터의 세계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가치에 대해 들어보자. 창조산업의 미래는 기술보다 예술이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이력을 알면 아트디렉터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 그는 서울대 조소과를 석사까지 마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 RCA(왕립예술학교) 입학 면접을 앞두고 서점을 갔는데 예술경영 서적들만 눈에 들어오더란다. 그는 면접에 가는 대신 책을 몽땅 사들고 와 읽기 시작했다. 토니 블레어 정권이 시작되면서 1999년부터 창조산업을 외치기 시작한 영국은 해외의 수많은 문화를 수용한 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세계에 팔고 있었다. 한국의 창조산업이 IT를 먼저 생각한다면 영국은 영화, 광고, 춤, 요식업까지도 창조산업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영국도 미술시장을 개방하면서 ‘우리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많았다고 합니다. 문화예술은 결국 수많은 사람의 생각이 모여 꽃을 피웁니다. 영국의 창조산업은 개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으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그 가능성이 너무 재미있고 직접 해보고 싶었습니다.”

작품창작이 아닌 예술경영으로 방향을 바꾸고 킹스칼리지런던(KCL)에 입학했다. 추상적인 예술과 현실적인 비즈니스, 두 개의 극과 극을 이어주는 것이 예술경영이었다. 공부를 하면서 그는 자신의 DNA에 두 개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형문화재 이수자로 선화(禪畵)를 그리는 어머니와 사업가인 아버지의 피였다.

“그동안 두 개의 피가 부딪치면서 혼란스러웠던 것이 이해가 됐어요. 나를 만나기 시작한 거죠. 검정과 흰색 중에 힘든 선택을 하기보다 가운데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내 일이구나, 검정과 흰색의 본질을 섞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는 솔루션은 뭘까, 그것을 고민하는 일이 지금 제가 하는 일입니다.”

아트디렉터는 가장 적절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시대와 상황을 이해하고, 만들어내고, 유통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는 미술에서 세계화, 국제화, 글로벌화는 목적이 다르다고 말했다.

“세계화는 일방향, 국제화는 핑퐁처럼 쌍방향입니다. 요즘에 외치고 있는 글로벌화는 경계 구분 없이 함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장구가 양쪽에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다름을 어우러지게 하는 것, 화폭에 여러 개의 시점이 있듯 입체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술은 기억을 갖고 경험을 갖는 것

그는 미술이 더 이상 시각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고 했다. 명품 브랜드 가방에 작가의 패턴을 집어넣는 것은 표피적인 협업이라는 것. 가방 브랜드인 MCM 플래그십 스토어에 가방은 진열하지 않고 예술, 음악, 여행 등을 체험하게 하는 것, 즉 경험을 팔고 문화를 파는 것이야말로 진짜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협업이다. 그는 예술을 만드는 것은 지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이우환 작가의 단순한 작품이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그 안에 시간의 유산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동안 그는 현대미술 전문기획사인 ‘숨’의 아트디렉터로, 독립군으로 수많은 작업을 해왔다. 삼성, 현대차 등 대기업의 아트마케팅을 맡기도 했고, 인천 송도 아트시티 프로젝트로 건물 외벽에 영국의 설치작가인 리처드 우즈의 작품을 씌우는 작업도 했다. 중국 시안에 한국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곧 개관을 하는 복합문화센터 ‘플랫폼 L’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에게 수익구조를 물어보니 “영업비밀”이라면서 이렇게 답했다. “돈보다는 경험과 기억을 갖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움직이다 보니 일반인은 상상도 못하는 프라이빗한 파티에 초대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숫자나 돈으로 환산할 순 없죠.”

아트디렉터에 대한 이해가 아직은 부족하다 보니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빈손으로 물러날 때도 있다. 몇 년 공들인 프로젝트가 기업의 변심으로 엎어지는 경우도 허다하고 작가와 기업 사이에서 줄다리기 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결국 독립군으로 살아남지 못하고 갤러리나 기업 안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그에게도 대기업에서 몇 차례 손을 내밀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이 전부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직업인이 아닌 ‘작가’로 남고 싶은 것이다. “돈은 많아도 작을 수 있고 작아도 많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의 자산은 휴대폰에 저장된 4000여개에 이르는 전화번호이다. 그의 바람은 기업들이 자신을 찾지 않는 것이다. 기업들이 예술에 대한 가치를 이해하고 기업이 스스로 예술경영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K팝·한류 드라마에 이어 ‘K컬처’가 세계를 흔들 수 있다고 믿는다.

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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