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30여년간 한국과 해외를 망라해서 1000군데가 넘는 사찰, 기도터, 명당을 연구했다. 이 연재의 초점은 ‘영발(신의 영감을 받은 데서 나타나는 어떤 힘)’에 있다. 왜 영발이냐? 인공지능(AI)이 대체할 수 없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영발은 땅에서 올라오는 지기(地氣)에서 시작된다. 강력한 지기가 올라오는 곳에 사람이 머무르게 되면 우선 건강해지고, 그 다음에는 자연과 교감하는 능력이 생긴다. 대자연과의 교감이 시작될 때 인간은 성스러움을 느끼고, 인생의 허(虛)함이 치유되고, 영성(靈性)이 개발된다. 대지의 신인 가이아(Gaia) 여신의 은총을 받는 것이다. 이런 신령스러운 장소들을 찾아 그 사연을 소개하는 순례이다. 여러 가지 여행이 있지만 기를 받을 수 있는 영지(靈地) 순례가 여행의 마지막 단계가 아닌가 싶다.
도솔암 바위 절벽에 새겨진 미륵불.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도솔암 바위 절벽에 새겨진 미륵불.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불교 국가인 고려가 망하고 유교 국가인 조선이 들어서면서 불교는 찬밥 신세가 되었다. 삼국시대 이래로 1000년 넘게 브라만 계급으로 대접받고 살았던 승려들은 졸지에 하층민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조선조의 억불 정책에 반발하는 승려들이 있었다. 이 승려들은 깊은 심산유곡으로 들어가 도시에는 안 나오면서 반체제 지하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 비밀결사 승려 집단을 ‘당취(黨聚)’라고 부른다.

당취들의 거점은 첫 번째가 금강산이요, 두 번째가 지리산이었고, 세 번째가 전북의 변산반도였다. 금강산파는 조선조가 들어서자 싹수가 없다고 단정하고 일찌감치 금강산에 들어간 승려집단이다. 지리산파는 조선 초기에는 정권이 어떻게 하는가를 지켜보다가 성종 무렵에 불교탄압이 본격화하자 ‘안되겠다’ 생각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지리산의 깊은 계곡에 자리 잡은 원통암(圓通庵)에서 머리를 깎은 서산대사는 지리산 당취의 정신적 지주가 아니었을까 하고 필자는 추측하고 있다. 금강산에 거점을 두었던 당취들이 가장 강경파였고, 그 다음으로 지리산 당취, 마지막으로 변산 당취가 있었다.

당취들은 탐관오리나 지역사회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부자들이 잡히면 ‘참회’를 시키고 타격을 가했다. 금강산 참회는 바로 사형을 시켰고, 지리산 참회는 ‘병신’을 만들었고, 변산 참회는 갈비뼈나 다리뼈를 분지르는 형벌을 가했다고 전해진다. 어느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1980년대 초반 필자가 대학생이던 시절에 지리산이나 변산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80~90대의 노장 스님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이다.

변산반도는 한반도에서도 특수한 지형이었다. 반도로 툭 튀어나온 지형에다가 동쪽으로 붙은 개암사(開巖寺) 부근의 폭 2㎞ 정도만 육지로 연결되어 있고 나머지 삼면, 즉 360도 가운데 330도 범위는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수한 지형이다. 한마디로 개암사 쪽만 방어하면 외부에서 변산에 접근하기 어려운 요새지형이라는 이야기이다.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은 자연적인 해자(垓字)로 둘러싸여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 변산반도 내부 지세도 독특하다. 장광(長廣·가로 세로) 70리가 온통 300~500m 높이의 산봉우리들로 채워져 있다. 이 산봉우리들도 대략 300개가 넘는다. 산봉우리들이 빽빽하게 솟아 있으므로 지형이 미로와 같다. 양의 창자, 즉 구절양장처럼 복잡하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변산반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밀림에 들어온 것처럼 어디가 어딘지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변산반도는 반체제 세력이 숨어 있기에는 천혜의 조건이었다. 논밭이 있어서 곡식도 충당되고 배를 타고 바로 서해안의 섬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다. 더 좋은 것은 세금을 실은 세곡선(稅穀船)들이 서해안의 변산반도 앞바다를 지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배들을 당취들과 노비도적들이 가로챌 수 있었다. 해상과 육상에서 모두 식량과 물자들을 ‘슈킹’(‘돈을 거둬 모은다’는 뜻의 일본어 ‘슈킨’에서 나온 말)할 수 있는 자연조건에다가 관군이 공격을 해오더라도 방비할 수 있는 험악한 지세를 갖춘 곳이 바로 변산이었다. 그래서 조선왕조 쪽에서는 “토벌이 쉽지 않다”고 판단했던 지역이다.

변산은 도망노비들의 해방구

변산반도 내에는 수백 군데 이상의 사찰과 암자, 그리고 토굴들이 있었다. 여기에 당취들이 은신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변산 내에서 ‘중 장터’가 설 정도였다. 오로지 ‘중’들만이 모여 물건을 교환하는 장터였다. 얼마나 중들이 많았으면 중을 위한 장터까지 생겼겠는가! 더군다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로 신분질서가 일정 부분 와해되면서 노비들이 주인의 통제권에서 벗어나 외지로 도망을 가는 풍조가 만연했다. 이 도망노비들의 최종 목적지 가운데 하나가 변산이었다. 변산은 도망노비들의 해방구였던 셈이다. 당취들과 도망노비들이 섞여서 사는 치외법권 지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산 바닷가 가까운 쪽에 자리 잡은 절이 내소사(來蘇寺)이다. 조선시대 어느 추운 겨울에는 노비도적들이 절에 몰려와 “이번 겨울은 몹시 추워서 우리가 여기서 지내야겠다. 중들은 절을 좀 비워줘야겠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국에서 도망나와 집단을 형성한 노비도적 세력과 당취들 간의 긴장과 혼거(混居)를 암시해주는 대목이다. 변산을 거점으로 삼았던 당취들은 배를 타고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는 방법을 선호하였다. 배를 타는 것이 육지에서 수십 개의 고개를 넘어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편한 방법이었고, 혹시나 노획한 물자를 운반하기에도 선박을 이용한 해상루트가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서해안의 바닷가에 가까운 사찰들은 당취들의 중요한 징검다리이자 거점 사찰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고창의 선운사 도솔암은 당취들이 거처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변산반도 남쪽에 줄포만이 있다. 서해안에서 육지 쪽으로 쑥 들어온 지점이 줄포만이다. 배를 타고 들락거리기에는 아주 좋은 지정학적 조건이다. 이 줄포만을 남북으로 사이에 두고 위쪽에는 변산반도가, 아래쪽에는 선운사가 있다. 해상교통의 요지이다. 또한 선운사는 그 자체로 요새지형에 해당한다. 지금은 터널과 자동차도로가 뚫려 있어서 지형이 변했지만 옛날에는 산으로 삼면이 막혀 있고 서쪽만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다. 서쪽이라 하면 소금을 굽던 마을인 월산리 사등마을을 가리킨다. 사등마을에서는 8세기 무렵부터 뻘밭에서 소금을 구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소금은 고부가가치 물품이었다. 이 바닷가의 사등마을에서 접근하여 걸어가면 연화리가 나오고, 연화리에서 다시 300m 높이의 고개를 넘어야만 선운사 참당암(懺堂庵·대참사(大懺寺)라고도 함)에 들어갈 수 있다. 선운사 역시 요새지형이라 외부에서 공격하기 어려운 지형이라는 것을 설명해준다.

구전에 의하면 선운사는 당취들의 훈련도장이었다고 한다. 줄포만을 통해 배를 타고 물자를 운반하기도 쉽고, 외부의 관군 공격을 방어하기에도 좋고, 변산반도 전체를 통어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도 갖추고 있었다. 변산반도가 닭의 몸뚱이라면 선운사는 닭의 대가리에 해당하는 셈이다. 변산에 거주하였던 당취들도 훈련할 때는 선운사에 모이기도 편리했다. 말하자면 ‘논산훈련소’ 역할이라고나 할까.

선운사 산내에 있는 참당암에서 다시 20여분을 더 걸어가면 도솔암이 나온다. 도솔암은 그 지형 자체로 특별한 느낌을 준다. 10m 정도의 바위 언덕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바위는 지기(地氣)가 용출(湧出)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바위나 암벽, 암산을 주목해야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의 모든 종교적 성지는 암반에 자리를 잡고 있거나 아니면 바위산을 끼고 있다. 유럽의 영험한 수도원이나 성당들도 대부분 바위산에 자리 잡고 있다. 성모 마리아가 눈물을 흘리는 성당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암산이나 암벽에 자리 잡고 있는 성당이다. 바위에서 기도발이 나온다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기도발이 나와야 종교체험을 한다. 병이 낫거나, 계시를 받거나, 원하던 일이 이루어진다. 이런 종교체험이 있어야만 신앙심이 생겨난다.

도솔암은 바위산에서 내려온 맥이 사람의 주먹처럼 우뚝 솟아 있는데, 이 주먹 위에다가 암자를 지었다. 더군다나 이 암자터는 10여m 높이에 있어서 절벽과 같았다. 옛날에는 사람이 올라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바위 틈새로 계단을 설치하였지만 계단이 없었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무협지의 장문인이 살 만한 터였다. 필자는 도솔암에 들를 때마다 무림의 비급을 연마하는 장소로 딱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주먹처럼 솟은 바위 위에 올라앉은 도솔암에 오르는 계단.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주먹처럼 솟은 바위 위에 올라앉은 도솔암에 오르는 계단.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바위산이 둘러싸 기운 안 빠져나가

도솔암이 기도터로 알맞은 또 하나의 조건은 암자 주위로 바위산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다. 병풍처럼 암자를 돌아가면서 둘러싸고 있다. 이처럼 그 터를 앞에서 산이 둘러싸야만 기운이 빠지지 않는다. 앞이 터져 있으면 김이 빠진다. 도솔암은 옆에서부터 터를 중심으로 빙 둘러서 암산이 감아주고 있다. 이런 조건을 갖췄기 때문에 도솔암은 조선의 3대 지장기도처로 이름이 났다. 불교의 지장보살은 땅속에 있다. 땅속에 있던 지장보살이 지상으로 출현하면 미륵불이 된다.

미륵불은 어떤 부처인가? 조선 당취들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은 혁명의 부처님으로 믿었다. 어떤 혁명? 양반·상놈 차별을 없애주는 신분해방의 부처님이 바로 미륵불이다. 미륵불은 혁명불(革命佛)이었다. 조선조의 승려들은 천민계급이었다. 무당, 노비, 상두꾼 등의 팔천(八賤) 가운데 하나가 승려 계급이었다. 미륵불이 나타나면 천민 계급인 중들과 노비들이 해방되는 날이었다. 도솔암의 바위절벽에는 7~8m 크기의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아주 위엄 있고 당당한 모습이다. 내가 보기에는 미륵불이다. 국내에 조각된 미륵불 가운데 대형 사이즈에 속한다. 이 도솔암의 바위절벽에 새겨진 미륵불이야말로 천민 계급을 해방시키는 부처님이었다. 변산 일대의 요새지형에 숨어 살았던 대략 1만명 이상의 노비도적과 당취들이 이 미륵불 앞에서 신분차별이 철폐되는 용화회상(龍華會上)이 오기를 빌었다. 반체제 당취들과 노비도적의 염원을 들어주는 부처님이 이 도솔암 미륵불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도솔암 미륵불 앞에서 동학의 실세였던 손화중이 수천 군중을 모아 놓고 미륵불 배꼽에 숨겨져 있었던 비기(祕記)를 꺼내는 의식을 연출했다. 미륵불 배꼽에서 꺼낸 비기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동학혁명의 폭발은 바로 이 배꼽 비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반에 둘러싸여 있는 영험한 기도처이자 당취들의 성소였고, 동학혁명의 시발처가 바로 도솔암 미륵불이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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