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로 물(勿) 자는 재미있다. ‘아니다’라는 뜻이다. 불(不) 자와 같이 쓰기도 한다.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고 하기도 하고 ‘비례물동(非禮勿動)’이라고 하기도 한다.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경남 산청군에 가면 ‘법물’ 김씨가 있다. 법물이 무슨 뜻인가 해서 살펴보니까 ‘勿(물)’이 관련되어 있었다. ‘勿’이 법이라는 이야기이다. 4가지 ‘勿’ 자가 들어가는 글귀는 비례물동(非禮勿動), 비례물언(非禮勿言), 비례물청(非禮勿聽), 비례물견(非禮勿視)이다.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전남 강진(康津)읍에 가보니 읍내의 주산(主山)이 우두봉(牛頭峰)이었다. 소대가리 봉이라는 의미이다. 큰 소의 머리가 강진만 바다 쪽을 바라다보고 있는 형국이다. 그냥 우두봉이 아니라 소 머리 주위에 여러 가지 ‘보조 장치’가 장착된 봉우리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어떤 장치? 우선 소 머리의 오른쪽 위치에 고성사(高聲寺)라는 절이 배치된 점이다.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세운 비보(裨補)사찰에 해당한다. 소의 오른쪽 귀에는 종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그 종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서 오른쪽 귀에 해당하는 부분에 절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척판암(擲板庵)이라는 뜻은? ‘擲(척)’은 던지다라는 뜻이다. 판자를 던졌다라는 의미이다. 참 희한한 이름의 암자이다. 무슨 판자를 던졌길래 이런 명칭을 가진 암자가 되었을까? 그 주인공은 바로 원효대사이다. 원효대사가 이 암자에서 중국 쪽으로 판때기를 던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원효대사. 한국에서 지난 2000년 동안 배출된 인물 중에서 손꼽을 만한 인물이 바로 원효이다. 어떤 점 때문에? 바로 ‘영발’과 ‘학문’이라는 두 가지 능력을 동시에 갖추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도력을 지녔던 대도인이면서도 불교의 깊이 있는 저술들을 남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패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승자의 비결만 연구한다. 패자에 대한 관심은 없다. 패자도 살아야 할 것 아닌가. 패자가 그 쓰라림과 고독, 그리고 세상에 대한 원망심을 삭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고독과 원망심을 달래는 것이 인생의 관건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승자는 극히 일부분이고 대부분은 패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승자는 소수이고 패자는 다수파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패자에 대한 대책이 훨씬 현실적인 삶의 지침으로 작동한다. 과거에는 어땠을까? 조선시대는 당쟁(黨爭)의 시대였다. 조선이 당쟁으로 망조 들었
바위 속에 신(神)이 있다. 이것이 고대 신화와 종교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가장 단적인 예를 든다면 마애불(磨崖佛)이다. 커다란 바위 평면에 새겨놓은 부처 또는 신상(神像)을 마애불이라고 하자.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마애불이 있다. 거의 다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 이유는 바위 속에 부처가 살고 있다고, 또는 산신령이 살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살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왜 믿냐? 왜 바위 속에 신령(神靈)이 거주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냐? 꿈에 나타나기 때문이다.그러한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밑에서 기도를 하거나 잠을 자보면
전남 광양의 백운산. 섬진강에서 올라오는 물안개와 남해 바다 쪽에서 올라오는 해무가 둘러싸는 산. 그래서 백운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나 싶었다. 도선국사는 이 안개와 해무를 사랑하였나! 인생 후반부 전부를 백운산에서 머물렀으니까 말이다. 어떤 점이 명당이기에 한국 풍수의 비조는 이 산을 사랑했는가!자료를 조사해 보니 백운산의 과거 이름은 닭 계(鷄) 자를 써서 백계산(白鷄山)이라고 불렀음을 알게 되었다. ‘흰 닭산’이라는 뜻이 된다. 흰 닭이라! 요즘 감각으로는 특이한 산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마도 ‘백계산’이라는 이름은 도선국사가
무협지나 도사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폭포가 나온다. 물이 떨어지는 폭포는 영험한 장소로 여겨진다. 특히 정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폭포는 적당한 장소였다. 떨어지는 폭포 밑에 앉아 머리 위로 물을 맞는 자세,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하는 자세는 정신통일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여겨져 왔다.왜 폭포 밑이 영험한가? 우선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면 머리 위로 상기되었던 열기가 아래로 내려간다. 수기가 화기를 제압하는 구조이다. 신경을 많이 쓰고 걱정 근심으로 공황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폭포 밑에서 머리 위로 물을
전라도는 무엇인가? 전라도의 기질은 무엇인가? 이는 나의 오래된 화두였다. 선가(禪家)의 화두라는 게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니듯이, 이 화두도 쉽게 풀리는 문제가 아니다. 점수돈오(漸修頓悟)의 길을 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밑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공부해 나가다가 자료와 지식이 쌓이면 어느 순간에 깨달음이 폭발하리라고 짐작해 본다.전라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자료가 음식 맛이 아닌가 싶다. 돌비석에 새긴 글씨는 세월이 지나면 인멸되고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지만 인간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음식 맛은 인멸되지 않는다. 아직도 이어지는 게
당취(黨聚)가 있었다. ‘땡추’의 어원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승려들의 지하비밀 조직을 가리킨다. 왜 머리 깎은 불교의 승려가 비밀조직을 만들었나? 조선조의 유교체제에 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승려가 브라만 계급, 즉 성직자 계급으로 대접받다가 조선에 들어와서 하층민 신분으로 전락하였다. 푸대접을 견디지 못한 승려들은 조선왕조가 들어서자마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가장 강성 승려들이 결성한 단체가 금강산 당취이다. 100년 정도 더 조선 유교체제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결성한 당취가 지리산
기후변화의 원인을 과도한 탄소배출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과학자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탄소배출과는 다른 맥락에서 원인을 생각하는 노선도 있다. 19세기 말엽부터 한국에서 시작된 거대담론인 후천개벽설이 그것이다. 후천개벽이 되니까 기후변화도 동반된다고 보는 입장이다.이 관점은 20세기에 들어와 불교계의 탄허 스님(呑虛·1913~1983)이 주장하였다. 스님이 1983년에 돌아가셨으니까 벌써 40년이나 되었다. 탄허는 1970년대 후반쯤에도 일본 열도가 물에 잠겨 침몰한다는 예언을 하였다. 당시에는 너무도 황당한 예언으로 느껴져서 ‘
지리산의 전설이 3명 있다. 고운 최치원, 남명 조식, 그리고 우천(宇天) 허만수(許萬壽·1916~1976)다. 신라 말기의 인물인 최치원은 지리산의 신선이 된 인물이다. 조식은 조선 4대 학파 가운데 하나인 남명학파의 수장이다. 현대의 인물인 우천 허만수는 이들에 필적할 만한 업적이나 내공을 갖고 있을까? 최치원과 남명에게 비유하는 것은 좀 과대포장 아닌가?하지만 21세기 지리산을 좋아하고 주말에 시간을 내서 지리산을 등산하는 등산 매니아들에게는 아득한 시대의 전설인 고운이나 남명보다는 우천 허만수가 훨씬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영지순례를 연재하면서 지리산의 이곳저곳을 많이 소개하는 이유는 ‘산중(山中)의 산(山)’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산 가운데 지리산만큼 깊고 그윽한 맛을 주는 산은 없다. 도시의 시멘트 건물에서 월급 몇푼 받는다고 붙잡혀 노비처럼 살고 있는 장삼이사들에게 무위(無爲)의 해방감을 맛보게 해주는 산이다. 출퇴근이 없고 노비처럼 살고 있지는 않는 필자 같은 문필가는 지리산을 어떻게 보는가? 박물관이요 이야기책으로 본다. 가로 40㎞, 세로 30㎞의 뚜껑 없는 박물관이다. 골짜기마다 주저리주저리 신화, 전설, 구전이 박혀 있고 매달려 있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의 7부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 법계사. 이 법계사의 산신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다. 여산신이다. 그 표시가 절에 들어가는 입구의 기둥에 그려져 있다. ‘법계사’라고 쓴 현판을 걸어놓은 입구의 양쪽 기둥에 하얀 옷을 입은 여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왼쪽 기둥에 흰옷 입은 중년 여자가 그려져 있고, 오른쪽 기둥에는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법계사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이 두 기둥에 그려져 있는 여산신과 호랑이의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보통 산신은 흰 수염이 난 할아버지의 모습인데 여기는 할아
“왜 지리산을 방호산(方壺山)이라고 하느냐? ‘壺(호)’는 호리병이라는 뜻이다. 방호산은 ‘사방이 호리병이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왜 지리산을 호리병에다가 빗대었을까. 물론 도가에서 은둔하는 별천지를 호리병에 비유하는 전통이 있다. 호리병은 세속과 격리된 또 다른 세계를 상징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지리산의 산세를 호리병으로 볼 수 있는 것인가?”지리산 치밭목 산장에 30년간 상주하면서 지리산의 역사와 유적, 골짜기와 봉우리, 샘물 등을 환히 꿰고 있는 민병태(68) 선생은 필자의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었다.“호리병이라고 충분히
힘이 있을 때 산에 들어가서 사는 게 좋다. 되도록 젊었을 때 입산해서 사는 게 어떨까 싶다. 힘이 쇠약해지면 산에서 사는 게 힘들다. 우선 일상생활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는 산중턱에 위치한 거처에까지 올라 다니는 게 힘이 들었다. 물건을 하나 사는 것도 그렇고, 일상생활이 산속에 살면 불편하다. 힘 떨어지면 도시에 사는 게 좋다고 본다.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도시에서 약간 부대끼면서 사는 것도 괜찮다. 도시의 대학 근처에서 사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식사하고 대학 캠퍼스 산책하는 것도 좋고, 각종 문화 행사
서양 중세시대 전쟁영화를 자주 보는데, 그 압권은 공성전이다. 예를 들어 성 안에는 5000명의 수비 병력밖에 없지만 성 밖의 적군은 5만명이 포위하고 있다. 절대 불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마지막에는 성을 탈출해야 한다. 탈출할 때 지하로 땅굴이 파여 있어서 성 밖으로 아무도 모르게 피신할 수 있는가. 나는 공성전 영화를 볼 때마다 최후의 피신처, 즉 적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탈출할 수 있는 지하 통로가 있는가 여부를 아주 눈여겨본다. 인생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포위된 인생이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가? 36계를 생각해
서울은 글로벌 도시이다. 첨단문명이 작동하는 대도시인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는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이 유지되고 있다. 평창동의 보현산신각이 그것이다. 이 산신각은 불교사찰의 부속 건물이 아니다. 산신 그 자체만 독존으로 모셔져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보현(普賢)이라는 이름은 북한산의 보현봉(普賢峰) 자락이 내려온 곳에 자리 잡았다고 해서 붙여졌다.21세기에도 이 산신각은 기능이 작동되고 있다. 박물관 유물이 아니고 주변의 동네 사람들과 타지의 신봉자들에 의하여 아직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를 끈다. 아직도 유지
무속은 모든 종교의 원형이다. 2만~3만년 전의 원시상태에서는 초자연적인 힘을 숭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속이 체계를 갖추고 이론을 정비하면 종교가 된다. 종교의 원료는 무속이다. 무속은 못 배우고 투박하지만 파워가 있다. 제도화된 종교는 영적 파워가 약해진다. 종교가 제도화되고 체계화될수록 영발은 사라진다. 영발이 없는 종교는 식은 감자와 같다. 제도화는 껍데기만 남게 만들 수 있다. 무속은 거친 영발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에게 물질세계 너머의 그 어떤 힘을 느끼게 해준다. 무속을 인수분해하면 세 가지 갈래가 있다. 한민
결국(結局)이란 단어가 있다. ‘마지막에 이르러’라는 뜻이다. 이건 원래 풍수 용어이다. 산줄기의 마지막 부분에 정기가 뭉쳐서 국(터)을 만든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 에너지가 집결되어서 자리 또는 명당을 만든다. 그러니까 산꼭대기에는 명당이 드물다는 이야기이다. 호박이 가지 끝에 열매를 맺듯이 풍수에서는 산줄기의 아래쪽 끝자락에 제대로 된 터가 형성된다고 본다. 이런 ‘결국’의 관점에서 산을 바라다보면 산의 정상보다는 낮은 쪽의 끝자락을 유심히 보게 된다. 일반 등산객과 풍수가의 산을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결국의 관점에서 지
조선시대 승려들은 묘한 위치였다.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승려는 학자 계급이자 브라만 계급이었다. 성직자로 대접받던 계급 아닌가. 그런데 조선시대로 들어와서 갑자기 천민으로 강등되었다. 팔천(八賤) 중의 하나였다. 기생, 상여꾼, 백정, 노비와 같은 8가지 천민 중 하나에 속했다. 이런 대접이 있나!그런데 임진왜란과 같은 커다란 전쟁이 일어나자 최일선에서 나라를 지키는 정규군으로 활약하였다. 핍박받던 천민이 무슨 지킬 나라가 있다고 전쟁터에 나가서 자기 목숨을 바치나. 국방의 의무는 그 체제에서 가장 혜택받던 계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