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용유담
지리산 용유담

영지순례를 연재하면서 지리산의 이곳저곳을 많이 소개하는 이유는 ‘산중(山中)의 산(山)’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산 가운데 지리산만큼 깊고 그윽한 맛을 주는 산은 없다. 도시의 시멘트 건물에서 월급 몇푼 받는다고 붙잡혀 노비처럼 살고 있는 장삼이사들에게 무위(無爲)의 해방감을 맛보게 해주는 산이다. 출퇴근이 없고 노비처럼 살고 있지는 않는 필자 같은 문필가는 지리산을 어떻게 보는가? 박물관이요 이야기책으로 본다. 가로 40㎞, 세로 30㎞의 뚜껑 없는 박물관이다. 골짜기마다 주저리주저리 신화, 전설, 구전이 박혀 있고 매달려 있다. 그런가 하면 바위 봉우리마다, 계곡마다 영발이 뿜어져 나온다. 세상에 이만한 놀이터가 없다.

이야기와 영발. 나를 구원하는 것은 바로 이야기와 영발이다. 이야기에서 깨달음을 얻고, 영발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서 휴천면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임천(엄천)계곡이 흐른다. 이 계곡물의 한 구간을 용유담(龍遊潭)이라고 부른다. 용이 노는 물이라는 뜻이다. 한국의 토속 영발은 3가지 축이 있다. 칠성, 산신, 용왕이다. 3대 축이다. 산신은 산의 바위에서 온다. 바위 속의 철분과 광물질에서 지구의 자기장이 솟아 나온다. 이것을 인간이 받으면 대자연과 합일되는 느낌을 받는다. 산신의 동물적 상징은 범이다. 호랑이가 이 에너지를 표상하는 심벌이기도 하다.

그다음에 용왕이다. 이건 물에서 온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도 생명은 물에서 왔다고 주장하였다. 동양의 상수학(象數學)에서도 물은 1로 표시된다. 제일 첫 번째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인간이 매일 먹는 것도 물이고 곡식과 채소도 물을 먹고 자란다. 가뭄 들면 다 죽는다. 물은 이러한 실용적 기능 외에도 그 어떤 근원적 기능이 있는 것 같다. 정신에 미치는 어떤 영향 말이다. 종교적 기능이라고나 할까.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무당들은 이걸 용왕기도라고 표현한다. 용왕으로부터 오는 어떤 영험이다.

나는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를 마실 때마다 그 향과 맛에 감탄하면서 용왕의 힘을 생각한다. 어느날 ‘위스키’가 무슨 뜻이냐고 이 방면의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라틴어 어원이 ‘물의 정수(精髓)’라는 뜻이라고 한다. 

 

스코틀랜드 위스키와 용왕의 힘

스코틀랜드 토속종교의 사제는 드루이드였고, 이 드루이드들이 마시던 술이 위스키다. 드루이드는 참나무를 숭배했다. 참나무 오크 통의 향기가 배어 있는 술이 위스키이므로, 이 위스키에는 켈트족 드루이드의 영발이 담겨 있다고 추측된다.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그 향과 맛. 이것이 물의 정수가 지니는 효과가 아닐까. 마찬가지로 용왕이 주는 영적인 파워도 인간을 취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닐까. 취한다는 것은 합일된다는 것이다. 합일은 근심·걱정을 잊게 만들고, 만물과 서로 하나가 되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근심·걱정을 잊게 만들려면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자기 앞에 닥친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돈 문제, 승진 문제, 건강 문제, 인간관계의 파탄에서 오는 문제들을 해결할 때 마음의 평화가 오고 대자연이 다가온다. ‘물의 정수’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고, 부지런히 용왕에게 빌고 기도하는 무속신앙이다. 용왕기도인 셈이다.

지리산 용유담은 예로부터 성지였다. 용이 살고 있는 연못, 용왕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곳. 지리산 서쪽에는 구룡폭포(九龍瀑布)가 있다. 9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폭포인데, 전라도 남원 일대의 샤먼들이 모여서 용왕기도를 드리던 성지였다. 반면 경상도 함양 쪽에는 용유담이 있었다. 지리산 용왕기도의 양대 성지는 구룡과 용유담이었다. 모두 용이 들어간다. 영안이 열린 샤먼들에게 물어보았다. “요즘도 용유담에 용이 살고 있냐? 용이 다 죽은 것 아니냐?” “용이 아직 죽지는 않았다. 서너 마리 살고 있다. 그런데 용들이 힘이 없다. 상류 쪽에서 흘러오는 물이 오염되어서 용들이 힘이 없고 비실비실하다.”

지리산에서는 칠성·산신·용왕을 모두 만날 수 있는데, 용왕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 용유담이다. 물이 지닌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장소라는 말이다. 그래서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기도객과 유람객, 그리고 무당들이 이 용유담을 신성시했다. 용유담은 임천강의 계곡물이 천천히 흐르는 지점이다. 물이 빨리 흐르면 에너지도 빠져 나간다. 천천히 흐르는 지점에 에너지도 고인다. 그리고 물의 색깔도 파랗다. 파랗다는 의미는 블루가 아니다. 연녹색을 동양에서는 파랗다고 표현하였다. 블루는 남색이라고 하고 파랗다는 녹색인데 약간 연한 색을 가리킨다. 용유담은 파란 물 색이다. ‘청산리 벽계수(靑山里 碧溪水)’의 의미를 바로 연상하도록 하는 색깔이다. ‘벽계수’는 용유담의 물 색깔을 보고 하는 말이다.

용유담은 중간중간에 바위들이 돌출되어 있다. 공룡 이빨 같은 바위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공룡 이빨 같은 바위 사이를 계곡물이 흘러가는 셈이다. 그러니 바위와 물이 아주 이상적으로 어우러진 풍광을 연출한다. 바위만 있고 물이 없으면 건조하다. 물이 없으면 빡빡하고 유머가 없는 이치와 같다. 바위가 없으면 강강한 파워가 없다.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 그래서 동양의 식자층들은 바위와 물이 어우러진 지점을 승경으로 여겼다. 동양의 산수화를 보라. 바위와 물이 어우러진 계곡이 최고의 풍경이다. 용유담이 그런 곳이다. 그래서 많은 유학자들도 이 용유담을 찾았다. 무당들만의 전용 공간이 아니었다. 산수유람의 ‘산수’를 압축적으로 표현해 놓은 장소가 용유담이다.

 

돈 만지는 직업인들 힐링하기 좋은 곳

용유담 이쪽저쪽 바위의 평평한 곳에는 여기에 다녀갔던 많은 유람객들, 유생들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유·불·선과 무당들이 공유했던 성지이자 명승지가 용유담이었다. 유생들은 풍광을 즐겼고, 선가의 신선들은 물의 담담함과 상선약수(上善若水),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느꼈을 것이고, 무당들은 용왕의 영발을 얻었을 터이다. 불교의 선지식들에게는 화두수행(話頭修行)의 상기증(上氣症)을 달래주는 좋은 장소였다. 요즘은 금융기관에서 돈과 숫자를 많이 다루다가 에너지가 방전된 펀드매니저나 애널리스트가 이런 용유담에서 쉬면 힐링이 될 것이다. 금융기관이 ‘돈 놀이’ 직업이고, 돈 놀이는 숫자가 지배한다. 그 숫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물을 많이 봐야 하는 것이다.

물도 아무데서나 보는 게 아니고 용이 놀고 있고, 바위가 공룡 이빨처럼 포진한 용유담 같은 곳에서 보아야 한다. 공황장애도 일종의 상기증이다. 이런 상기증에 도움이 되는 곳이 물을 볼 수 있는 관수(觀水)의 포인트이다. 지리산 영발 순례 코스 중의 하나가 용유담에서 시작하여, 백무동의 백무당(百巫堂), 제석봉의 제석당, 그리고 천왕봉의 성모사로 이어지는 코스다. 지리산 동쪽의 샤먼들이 가장 애용하였던 코스이기도 하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훨씬 가깝다. 비행기표 안 끊어도 된다. 자주 가서 영발을 충전받았던 순례길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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