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0일 김일성이 즐겨 입던 베이지색 헌팅캡과 흰색 셔츠 차림으로 박격포 부대를 시찰한 김정은. ⓒphoto 뉴시스
지난 4월 10일 김일성이 즐겨 입던 베이지색 헌팅캡과 흰색 셔츠 차림으로 박격포 부대를 시찰한 김정은. ⓒphoto 뉴시스

김정은이 공식 연설을 처음 한 것은 2012년 4월 15일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이른바 ‘태양절’이라고 부르는 김일성 생일 100돌 경축 열병식 때였다. 당시 김정은의 목소리는 조부인 김일성처럼 중저음이었다. 김정은은 단조로운 톤으로 20분간 6600자의 연설문을 또박또박 읽었다. 김일성이 즐겨 입던 검은 인민복 차림을 한 김정은은 가끔씩 몸을 비트는 듯한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김정은의 이런 모습은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연설했을 당시의 판박이였다. 열병식에서도 김일성 시대를 그대로 본뜬 모습들이 연출됐다. 항일 빨치산 부대 군복 차림의 군부대가 등장하고, 열병식 사상 처음으로 기마부대까지 선보였다. 기수들은 만주벌판의 흰 눈을 상징하는 흰색 망토를 걸쳤다. 김정은과 함께 주석단에 도열한 군부 인사들도 흰색 군복 차림이었다. 김일성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직후 평양에서 열린 ‘전승 열병식’에 흰색 원수복을 입고 나타났을 때 최용건, 남일 등 측근들도 흰색 군복을 착용했었다.

김정은은 지금까지도 김일성을 연상시키는 옷차림과 발걸음, 몸매, 헤어스타일 등을 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지난 4월 10일 자로 보도한 박격포 부대 시찰 사진을 보면 김정은이 김일성과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김정은이 착용한 베이지색 헌팅캡과 흰색 셔츠, 베이지색 재킷은 김일성이 과거 즐겨 입던 스타일이다. 김정은의 이런 옷차림에는 북한의 최대 명절인 태양절을 맞아 ‘김일성 흉내 내기’를 통해 자신이 백두혈통의 후계자라는 점을 북한 주민들에게 보여주면서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최대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

김일성표 옷차림으로 박격포 부대 시찰

실제로 김정은은 후계자 지명 때부터 필요할 때마다 외모적으로 김일성을 흉내 내는 모습을 보여왔다. 김정은은 2010년 9월 28일 당대표자대회에 첫 공식 등장했는데, 그 자리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공식 후계자로 지명됐다. 당시 김정은이 등장하자 1994년 심장마비로 죽은 할아버지 김일성을 빼닮았다는 말이 회의에 참석했던 당과 군 간부들의 입에서 나왔다. 북한 주민들은 2010년 9월 30일 자 노동신문 1면 상단에 실린 김정은의 첫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이처럼 김정은이 김일성과 비슷하게 보이는 것은 ‘고도의 연출’ 효과라 할 수 있다. 옷 입는 스타일, 걸음걸이까지 일거수일투족이 유사한 것을 유전적인 요인으로만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코트를 입고 배를 약간 내민 채 골반을 흔드는 듯 걸어가는 모습 역시 김일성과 매우 비슷하다. 김정은이 자주 입는 단추가 두 줄로 달린 검은 코트는 김일성이 젊은 시절 즐겨 입던 스타일의 옷이다. 머리 윗부분만 제외하고 양옆을 짧게 자른 헤어스타일도 김일성과 똑같다. 김정은도 김일성처럼 검은 가죽장갑을 끼고 다닌다. 김정은이 주요 행사 때 입는 옷차림과 행동도 김일성과 흡사하다. 김일성은 외국 지도자들과 만날 때마다 과감한 스킨십과 함께 크게 웃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김정은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날 때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김정은이 지난해 4월 24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을 때 검은색 코트와 중절모 차림으로 전용열차에서 내렸는데 당시 김정은은 코트 안쪽으로 오른손을 넣는 김일성의 버릇을 그대로 따라했다. 김정은이 지난해 11월 19일 인민군 수산사업소를 시찰했을 때도 김일성이 자주 입었던 흰색 남방셔츠를 착용했다. 김정은이 쓰는 뿔테 안경도 김일성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스타일의 아이템이다.

그런데 김정은은 김일성을 생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김정은의 생모인 고용희는 2004년 사망 전까지 사실상 고위층 내부에선 퍼스트레이디였으나 김정일과 공식 결혼한 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고용희는 일본에서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건너온 재일동포 출신이다. 고용희는 만수대예술단 무용수로서 김정일의 눈에 들어 동거하면서 강원도 원산에 있는 특각에서 김정은을 출산했다. 김일성은 김정일과 고용희와의 관계는 물론 김정은까지 손자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김정은은 자신이 백두혈통임을 강조해왔다. 심지어 북한의 대외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2017년 ‘백두대지가 끓는다’라는 제목의 영상물에서 김정은의 고향을 백두산과 인접한 양강도 삼지연군이라고 공식화했다. 행정구역 안에 백두산을 포함하고 있는 삼지연군은 북한 정권이 김일성의 ‘혁명 활동 성지’이자 ‘백두혈통’의 상징으로 선전하는 곳이다. 인근에는 북한 정권이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선전하는 ‘백두산 밀영(密營)’이 있다. 삼지연은 김정은이 정치·외교적으로 중대한 결정을 앞뒀을 때마다 찾던 곳으로, 집권한 이후 경제 분야 최다 방문 지역이기도 하다. 북한 정권은 지난해 12월 10일 삼지연군을 삼지연시로 승격했다.

김정은이 삼지연을 강조하는 것 역시 김일성 흉내 내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북한 정권은 1960년대부터 김일성과 빨치산 대원들의 항일 활동 무대라면서 백두산 일대의 7곳을 혁명전적지로 조성했다. 이들 지역은 보천보(양강도 보천군 일대), 삼지연, 무산지구(양강도 삼지연군 및 대홍단군 일대), 백두산 밀영(양강도 삼지연군 백두산 일대), 두만강 연안(함북 회령군·온성군·새별군·선봉군 일대) 등이다. 게다가 김정은은 지난해 10월 백두산을 백마 타고 올라가는 등 김일성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당시 노동신문은 10월 18일 자에 김정은의 백마 탄 모습을 추켜세우면서 “일제의 백만 대군을 쥐락펴락하시던 20대의 청년 장군 빨치산 김 대장(김일성)의 그 모습을 다시 뵈옵는 것만 같았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해 ‘백마 탄 항일유격대장 김일성 장군’의 그림 등을 대대적으로 선전해왔다.

북한이 지난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를 열고 코로나19 대책과 예산 조정 등을 승인했다. ⓒphoto 노동신문
북한이 지난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를 열고 코로나19 대책과 예산 조정 등을 승인했다. ⓒphoto 노동신문

백두산 대학과 백두산 정신 강조하는 이유

김정은은 또 지난해 12월 4일 백두산 혁명전적지를 둘러보고 “수령님의 혁명정신을 알자면 혁명전적지 답사를 통한 교양을 많이 받아야 한다”며 당과 군 간부들에게 백두산 혁명전적지 답사를 지시했었다. 이에 따라 북한에선 ‘백두산 대학’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백두산 대학 운동이란 혁명전적지 답사를 통해 ‘백두산 정신’을 배우는 것을 말한다. 노동신문은 지난해 12월 11일 자 ‘백두산 대학’이라는 제목의 정론에서 “백두산 대학에서 항일빨치산들이 지녔던 백두의 혁명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신문은 또 백두의 혁명정신에 대해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과 결사옹위의 정신, 혁명의 요구라면 맨주먹으로 폭탄도 만들고 대포도 만들어내는 자력갱생의 정신, 한 홉의 미숫가루도 천만 근의 양식처럼 나누며 고락을 같이하는 불 같은 동지애가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2월부터 지난 2월까지 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당 간부와 청년 지도자 등 5만여명이 백두산 혁명전적지를 답사했다.

김정은의 의도는 김일성 흉내 내기를 통해 ‘백두산 정신’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정면돌파전으로 코로나19와 미국 등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 조치를 극복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정은은 집권 후 처음으로 신년사를 생략하고 지난해 12월 28일부터 4일간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5차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정면돌파전을 선언했었다. 정면돌파전의 핵심은 자력갱생과 체제결속이다. 북한의 모든 선전 매체가 백두산 정신을 반복해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노동신문은 지난 4월 6일 2면 전체를 할애한 ‘백두산 정신’이라는 제목의 정론에서 “백두산 대학은 우리 세대를 향해 쉼 없이 외치는 가장 절절한 부름이며 당이 호소한 정면돌파전에서 우리가 무장해야 할 최강의 정신”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노동신문은 김정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김정은이 김일성 흉내 내기로 엄혹한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김정은이 백두산 대학을 통한 백두산 정신을 강조한 것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빨치산이 어려웠던 일제강점기를 돌파한 것처럼 미국 등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에 따른 북한의 경제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주민들에게 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김정은이 김일성을 내세운 것은 장기적인 제재와 경제난에 지친 주민들의 사상이완 현상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들은 대부분 김일성 우상화 정책에 속아왔기 때문에 김일성이 일제에 맞서 독립 투쟁을 통해 민족을 구원했다고 믿어왔다. 김정은으로선 세계 최강인 미국에 맞서고 있는 자신을 일제와 투쟁했던 김일성과 동일시하면서 북한 주민들에게 자력갱생과 체제수호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의 생전 모습. ⓒphoto 평양타임스
김일성의 생전 모습. ⓒphoto 평양타임스

남포항에 발 묶인 북한 밀수선들

하지만 김정은의 이런 의도는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의 최대 후원국인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19 때문에 실패할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김정은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육·해·공의 국경을 모두 폐쇄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이 때문에 미국 등 국제사회가 지금까지 압박해왔던 어떤 조치보다 코로나19가 가장 효과적인 대북 제재 수단이 됐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영국 안보 싱크탱크인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의 위성사진 분석 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남포항에는 지난 4월 3일 현재 총 139척의 북한 선박이 정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 달 전의 50척보다 대폭 늘어난 것이다. 남포항은 북한 선박들이 중국 등을 오가며 석탄, 정유 제품을 비롯한 금수품목을 밀거래하는 데 활용해온 핵심 항구로 국제사회가 지목해온 곳이다. RUSI는 유엔 안보리가 2019년 두 차례와 올해 1월에 각각 불법 활동을 해온 것으로 지목한 뉴 리젠트호를 비롯해 불법 밀거래에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어온 선박들이 대거 남포항에 정박해 있다고 밝혔다. 선박들이 항구에 묶여 있는 것은 북한 정권이 지난 1월 22일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단행한 국경봉쇄 조치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코로나19가 북한 선박들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유엔 안보리가 제재를 통해서도 해내지 못했던 것”이라면서 “북한에 대한 제재 측면에서만 본다면 코로나19는 미국의 가장 효과적인 동맹”이라고 강조했다.

북한 경제는 코로나19로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중국의 관세청 격인 해관총서에 따르면 중국이 1〜2월 북한에서 수입한 상품 금액이 1070만달러(133억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1.9% 감소했다. 중국의 1〜2월 대북 수출은 전년 동기보다 23.2% 줄어든 1억9740만달러를 기록했다. 이런 통계 수치는 북한 경제가 코로나19로 얼마나 타격을 입었는지를 입증한다. 게다가 중국의 1〜2월 대북 곡물 수출량이 급감하면서 북한의 식량난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중국 해관총서의 1~2월 대북 수출통계에 따르면 중국이 북한에 수출한 쌀과 옥수수는 지난해 11~12월 대비 90% 감소했다. 게다가 국경 폐쇄로 북한의 식량 밀수입조차 막혔다. 또 농사에 필요한 비료를 제대로 수입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올해 북한의 식량 사정은 자칫하면 최악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북한은 주요 외화벌이 사업인 외국인 관광이 석 달째 중단되는 바람에 엄청난 타격을 받고 있다.

4월 18일부터는 웜비어법도 발효

특히 미국의 새 대북 제재법인 ‘웜비어법’이 4월 18일부터 발효되었다. 이 법은 북한을 여행하다 정치 선전물을 훔치려 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체제전복 혐의로 노동교화형 15년을 선고받고 17개월간 억류됐다가 혼수상태로 귀국해 사망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성을 딴 대북 금융 제재법이다. 이 법은 불법 대북 거래를 돕는 중국 대형 은행과 같은 해외 금융기관의 미국 금융시스템 접근을 막는 금융 제재가 핵심 내용이다. 이 법에는 제재 대상으로 지정된 북한의 개인과 기업에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국 대형 은행 등 해외 기관에 ‘세컨더리 보이콧’을 확대 적용하도록 하는 조항이 들어 있다. 데이비드 맥스웰 민주주주의수호재단 선임연구원은 “웜비어법은 미국이 김정은과 북한 정권에 대한 최대 압박을 유지하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은 앞으로 웜비어법에 따른 제제 조치를 우려해 북한을 마음 놓고 지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경제가 이처럼 최악의 상황으로 빠지다 보니 김정은은 4월 11일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국가계획과 코로나19 사태와 경제 분야의 예산을 대폭 조정했다. 북한 정권은 현재의 경제적 어려움을 인정하고 김정은이 내세웠던 목표들을 수정했다. 이번 회의에서 채택된 당 중앙위원회, 국무위원회, 내각 공동 명의의 결정서는 “비루스(바이러스) 전염병이 전 세계적인 대재앙이 되고 있다”면서 “비루스 감염 위험이 단기간에 해소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의 투쟁과 전진에도 일정한 장애를 조성하는 조건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지난 4월 12일 정치국의 결정에 따라 보건 분야 증액 등 예산을 승인했다.

북한 최대 명절인 태양절은 올해 가장 초라하게 치러졌다. 축하행사들이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해 대거 취소되거나 축소됐기 때문이다. 북한 정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코로나19 환자가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무튼 경제난을 돌파하고 북한 주민들의 충성심을 끌어내기 위한 김정은의 ‘김일성 코스프레’가 북한 정권이 직면한 최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이 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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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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