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북한행 소련 수송선에 승선하는 재일동포들. ⓒphoto 일본 정부 사진공보
1960년대 북한행 소련 수송선에 승선하는 재일동포들. ⓒphoto 일본 정부 사진공보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新瀉)항.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조선총련)계 재일동포 234가구, 975명이 옛 소련 군함을 개조한 수송선 쿠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에 올라 북한 청진항으로 떠났다. 재일동포 북송선 제1진이었다. 당시 재일동포들은 일본인들의 차별에서 벗어나 ‘지상낙원’을 간다는 기쁨과 설렘으로 들떠 있었다. 북송사업이 가장 활발했던 해는 1960년으로 48회에 걸쳐 1만2460가구, 4만9036명이 이주했다. 이후 북송은 1984년까지 계속됐으며 총 186차례에 걸쳐 9만3340명이 북한 땅을 밟았다.

소련 배로 재일동포들을 실어 나르던 북한은 1971년 만경봉호를 제작해 북송을 전담시킨다. 이 때문에 만경봉호는 재일동포들에게 끔찍한 북송사업을 상징했다. 3500t 규모로 정원이 300명이었던 만경봉호는 북송사업이 중단된 1984년 이후에는 화물선으로 사용됐다. 만경봉은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부근의 낮은 언덕(45m) 이름이다. 여기에 오르면 대동강과 주변의 만 가지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만경봉호와 만경봉 92호의 역사

북한 정권은 만경봉호가 낡아서 더 이상 운항할 수 없게 되자 1992년 만경봉 92호를 제작했다. 1992년 4월 김일성 80회 생일을 맞아 조총련계 상공인들이 40억엔을 모아 제작비를 냈다. 9700t급으로 최대속도는 23노트, 탑승인원은 350명이다. 만경봉 92호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북한 응원단을 싣고 다대포항까지 내려왔다. 만경봉 92호는 니가타항 등 일본을 오가기도 했다. 그러다 일본은 2006년 7월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시험을 강행하자 만경봉 92호의 입항을 금지시켰다. 그랬던 만경봉 92호는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맞아 북한 예술단을 태우고 강원도 묵호항에 왔었다.

북한 정권의 재일동포 북송사업이 2019년으로 60주년을 맞는다. 이 사업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국가적인 사기(詐欺)’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북송된 재일동포들은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차별대우에 시달렸다. 이들 가운데 재일동포 배우자를 따라간 일본인 처와 자녀 등 일본 국적자도 6000여명이 있었다. 북송사업이 시작될 당시 북한 정권은 재일동포의 노동력과 재력을 필요로 했다. 재일동포를 흡수해 한국과의 체제 경쟁에서 앞서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일본 정부로선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끌려와 불만을 가진 한국인을 내보낼 필요가 있었다. 일본과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북한 정권의 지원을 받은 조총련은 온갖 감언이설로 재일동포들을 속여 북송선을 타도록 했다. 일본에서 차별대우를 받던 재일동포들은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면서 북한으로 떠났다.

하지만 재일동포들은 북한에서 ‘째포’ ‘반쪽발이’라고 불리며 무시와 괄시의 대상이 됐다. 특히 재일동포 중 상당수는 폐쇄된 독재사회에서의 낯선 삶이 너무 힘들어 불평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자본주의에 물들었다”며 이들을 정치범수용소에 감금했다. 북한 정권은 또 재일동포들을 ‘일본의 스파이’로 취급하며 최하층인 ‘적대계층’으로 분류해 감시했다. 요덕수용소에서 10년간 감금됐던 북송 재일동포 3세 강철환 전 조선일보 기자는 북송된 재일동포들 중 20%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고 밝혔다. 이들이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된 이유는 탈북 기도, 일본인 처의 고향 방문 청원서 제출, 당 지시 불응, 불건전한 사상 표출 등 다양했다. 재일동포들은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당·정·군 간부가 될 수 없다. 이들 중 97%가 남쪽 출신으로 북한에서 살아본 경험도, 친척도 없었다.

2018년 8월 19일 도쿄지방재판소 앞에서 북한을 탈출한 재일 한인 납북자들이 북한 정부에 피해 보상과 납북자 송환을 요청하는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photo 휴먼라이트워치
2018년 8월 19일 도쿄지방재판소 앞에서 북한을 탈출한 재일 한인 납북자들이 북한 정부에 피해 보상과 납북자 송환을 요청하는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photo 휴먼라이트워치

충성헌금 강요받은 ‘째포’들

북한 정권은 이들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친인척에게 송금받는 것을 허용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받는 돈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북한 정권은 북송된 재일동포들을 사실상 인질로 활용한 셈이었다. 실제로 북한 정권은 이들의 일본 거주 친인척들에게 정치범수용소 석방과 상봉 대가로 5000만〜1억엔의 기부금이나 물품 등을 요구했었다. 북한 정권은 또 김일성과 김정일 생일 등 주요 행사 때마다 일본으로부터 송금을 자주 받는 재일동포들에게 각종 훈장을 수여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충성 헌금’을 강요하기도 했다.

북한 정권은 재일동포들을 일본 내 친인척의 송금액에 맞춰 차등화해서 대우했다. 재일동포들의 일본 거주 친인척이 북한에 투자를 하거나 연간 1만달러 이상을 송금하는 경우, 이들에게 평양 시내 아파트에 거주토록 하는 등 호화스러운 생활을 보장해주었다. 연간 1만달러 미만을 송금하는 경우에는 기본적인 의식주와 월 1〜2회 육류 및 수산물을 지급했다. 반면 일본으로부터 전혀 송금을 받지 못하는 제일동포들은 일반 북한 주민보다도 훨씬 가혹하게 다루었다. 북송된 재일동포의 절반 정도인 이들은 대부분 탄광 등 힘든 직장에 배치돼 고된 노역에 시달리면서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북한 정권은 탈출을 우려해 보위부를 통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감시했고 평양과 개성 및 군수공장 밀집지역 등에는 이들의 거주를 엄격히 제한했다. 물론 조총련 간부 출신의 경우 일부 극소수는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내는 등 출세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송금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일본 거주 친인척들의 송금은 1990년대 들어 바닥을 드러냈다. 북송된 재일동포와 가까운 친척들이 사망하면서 그 아래 세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북한의 친척들에게 더 이상 돈을 보내주지 않았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송금이 끊어진 재일동포들 중 상당수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리게 됐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2000년대 들어 북한 정권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대한 제재조치로 조총련의 대북 송금을 대폭 제한했다. 일본 정부는 2016년 2월 북한으로의 현금 반입신고 하한금액을 기존 100만엔 초과에서 10만엔 초과로 하향 조정했다. 또 인도적 목적의 10만엔 이하를 제외하고 북한에 대한 송금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이에 따라 북한 정권에 그동안 ‘꿀단지’ 역할을 해왔던 조총련과 일본 거주 친인척들의 송금이 사실상 끝나게 됐다.

조총련 송금액 1조엔 규모

조총련은 1955년 5월 25일 도쿄에서 북한 노동당의 사주에 따라 초대 한덕수 의장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광복 이후 일본에 남은 동포 60만명 중 50만여명은 서로 돕고 살자는 선전·선동에 속아 조총련에 가입했다. 재일동포들은 조총련의 실체를 모르고 신용조합을 만들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데 기부했다. 조총련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반까지 말 그대로 ‘평양행 현금 파이프’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평양에 있는 ‘안택상 거리’와 ‘김만유 병원’은 북한에 돈을 보낸 조총련 기업인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북한 ‘노동당의 일본 지부’로 활동해온 조총련이 지난 수십 년간 북한 정권에 갖다 바친 돈이 1조엔은 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조총련은 북송사업으로 드러난 북한의 실상, 북한 정권의 일본인 납치 사건, 북한의 잇따른 핵과 미사일 실험,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3대 세습 독재에 염증을 느낀 재일동포들의 탈퇴로 회원 수가 5만여명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유명무실해졌다. 일본 정부도 각종 대북 제재 조치를 통해 북한과 조총련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조총련이 2013년 일본 금융기관에서 빌린 7억8000만달러의 대출금을 갚지 못하자 압류당한 도쿄 중심지에 있던 조총련의 본부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기도 했다.

북송됐던 재일동포들 중 일부는 2000년대 초부터 북한을 탈출해 한국 또는 일본으로 건너오고 있다. 최근까지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 탈북자는 250여명에 달한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앞장서 북한 정권의 차별대우와 비인간적인 탄압 사례를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알리고 있다. 특히 이들은 북송사업을 주도한 조총련을 해체시키기 위한 활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실제로 재일동포 2세인 가와사키 에이코(75) 일본 시민단체 ‘모두 모이자’ 대표는 2018년 2월 조총련과 북한이 주도한 재일동포 북송사업이 반인도적 범죄라고 주장하면서 국제형사재판소가 직접 조사해줄 것을 요청했다. 가와사키 대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를 방문해 김정은과 허종만 조총련 의장의 처벌을 위한 조사요청서를 제출했다. 교토 출신인 가와사키 대표는 조총련이 설립한 조선인학교 고급부 3년생이던 1960년 17세의 나이에 북송선에 올랐다. 하지만 지상낙원으로 선전했던 북한의 실정은 딴판이었다. 김일성 사망(1994년) 이후 고난의 행군 때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어 가는데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금수산태양궁전을 짓는 북한 정권을 보면서 북한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탈출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가와사키 대표는 2003년 중국과의 국경을 넘어 2004년 일본으로 돌아왔다.

김정은의 모친 고용희. 1973년 만수대예술단 무용수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모습. ⓒphoto 마이니치신문
김정은의 모친 고용희. 1973년 만수대예술단 무용수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모습. ⓒphoto 마이니치신문

북 상대 5억엔 손배소송

특히 가와사키 대표는 2018년 8월 재일동포 탈북자 4명과 함께 도쿄지방재판소에 북한 정권을 상대로 5억엔(당시 환율로 420만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북한 정권이 재일동포들을 속여 귀국하도록 유인한 뒤 굶주리게 했을 뿐 아니라 신분차별, 이동의 자유 등 가장 기본적인 인권까지 침해했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가와사키 대표 등 재일동포 탈북자들을 대변하고 있는 시라키 아츠시 변호사는 “도쿄지방재판소가 2019년 1월이나 2월 게시판을 통해 북한 정권의 대표인 김정은에게 언제 몇 시까지 출두하라는 호출장을 고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법률에 따르면 민사소송은 국가를 상대로 할 수 없지만 북한은 일본과 공식 수교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법률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때문에 북한을 하나의 법인처럼 상대해 소장을 송달할 수 있다. 또 피고소인의 주소지 등이 불분명할 경우 ‘공시송달’을 하는 제도가 있다. 일본 민사소송법 110조와 112조에 따르면 재판소가 게시판을 통해 공개적으로 소장이 접수됐다고 알리고 외국의 경우 6주가 지나면 송달됐다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시라키 변호사는 “승소하면 북한 정권에 인권 침해를 당한 수많은 피해자가 이 대열에 동참할 것”이라면서 “북한 정권은 정정당당하게 일본 법원에 나와서 반론을 제기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가와사키 대표 등은 또 일본 정부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2014년 최종보고서에서 북송사업을 납치로 분류한 바 있다. 보고서는 북송사업이 일본적십자사의 지원 속에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시라키 변호사는 “일본 형법 226조에 따르면 강제력을 동원해서 데려가는 약취(납치)와 속여서 데려가는 유괴란 조항이 있다”면서 “고소인들은 20세, 17세, 14세, 11세, 3세라는 어린 나이에 속아서 사실상 유괴돼 북한으로 갔다”고 지적했다. 시라키 변호사는 “일본 정부는 재일동포 북송사업을 지원했기 때문에 가해자란 무거운 짐이 있다”면서 “일본 정부도 사죄하고 일본인 납치와 동등하게 취급해 북한 정부에 해결을 촉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장 출세한 인물은 김정은 모친

북송된 재일동포 중에서 가장 출세(?)한 인물은 김정은의 모친 고용희다. 1952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고용희는 10세 때 만경봉호를 타고 가족과 함께 북한에 갔다. 제주에서 태어난 아버지 고경택은 조총련 간부 출신이다. 고용희는 평양에서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시절 김정일의 눈에 들어 결혼했다. 고용희는 2004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암 치료를 받다 사망했다. 북한 정권은 2016년 5월 제7차 당 대회를 계기로 조총련과 재일동포를 격려하는 등 띄우기에 나섰다. 그 이유는 조총련과 재일동포의 과거와 같은 자금 지원을 이끌어내려는 의도는 물론 김정은의 모친이 재일동포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생모의 출신이 일본이기 때문에 김정은에게는 일종의 뿌리라는 인식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정은이 북송된 재일동포 가운데 상당수가 비참하게 숨졌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모친이 재일동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는 많은 재일동포들을 석방하고 인권탄압을 중지해야 할 것이다. 김정은은 지금까지도 모친이 재일동포라는 사실을 북한 주민들에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할아버지 김일성은 백두산에서 활동한 적이 없다. 부친 김정일은 백두산 밀영(密營)이 아니라 러시아 하바롭스크 인근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김정은 집권 이후 ‘백두혈통’이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김정은은 ‘백두산 줄기’가 아니라 ‘후지산 줄기’라고 말할 수 있다.

고용희는 북한의 만수대예술단 무용수로서 유일숙이란 예명으로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만수대예술단은 1973년 7월 30일부터 9월 17일까지 사상 처음으로 도쿄, 나고야, 오사카, 히로시마 등 일본 전국을 순회공연했다.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공연은 재일동포들을 북한으로 많이 끌어오기 위해 교묘하게 기획된 것이었다. 만수대예술단의 공연을 보고 감동해 북한으로 건너간 재일동포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생존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지상낙원이라고 속여 끌고 간 재일동포들을 ‘인질’ 삼아 돈을 뜯어온 북한 정권이 진정으로 ‘우리 민족끼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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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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