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블리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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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진리를 알 수 없을지라도 저 무한함에 도전하는 무모함을 감내”하는 것이 숙명이라 생각했던 장영실.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의 일대기를 그린 ‘장영실’(KBS)은 ‘대하 과학 사극’이다.

과학의 존재가 미미했던 시대, 세상의 이치를 찾아내기 위해 평생 과학에만 몰두했던 자신의 운명을 뒤돌아보며 생을 마감하는 노년의 장영실로 포문을 연 송일국은 이미 ‘장영실 그 자체’였다. 양반인 아버지와 관노(官奴)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친인척들에게 멸시받으며 살아야 하는 천한 신분이었지만 장영실은 당당했다. 자신을 귀한 존재로 인정해 주는 아버지가 있었고, 아버지를 닮아 조선의 하늘을 무한히 사랑했기 때문이다. 별을 볼 때 그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투명한 기쁨으로 빛났다.

성격이 온순하고 손재주가 뛰어나 야장(冶匠) 어른은 호미며 낫이며 대장간의 많은 일을 그에게 시켰지만 투덜대지 않았다. 그러나 귀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비의 신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조선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 앞에 그는 분노했다. 초반이라 그가 등장하는 장면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은 송일국으로 가득 찼다. 역시 ‘사극 본좌’다웠다.

대본이 나달나달하게 연습 또 연습

송일국은 김좌진 장군의 증손자, 배우 출신 국회의원 김을동의 아들이다. 먹성 좋은 그는 어린 시절 100㎏이 넘는 거구였으나 피나는 노력으로 살을 뺐고, 끊임없는 운동과 식단 조절로 근육질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미대를 지망했으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인생항로를 바꿔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그는 1998년 MBC 27기 공채 탤런트가 되었다. 배우인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준하’라는 예명으로 공채 시험에 응시했고 이후에도 한동안 예명으로 활동했지만 2세 연기자임을 숨길 수는 없었다.

신인 시절, 그의 연기는 규범적이었다. 교과서 중심의 학습에 충실한 학생처럼. 그래서였을까 단역에서 벗어나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데뷔 5년차인 2002년, 첫 주인공이 되었다. ‘TV소설-인생화보’에서 야망의 사나이 신형식으로 출연한 그는 사나이 순정을 갖고 있는 악인이었다. 대본이 나달나달해질 정도로 연습을 거듭했고, 다른 배우들의 움직임, 발성, 표정 연기를 참고하기 위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았다. 그 결과 ‘2002년 KBS 연기대상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연기자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불륜과 혼전동거를 신파조로 그렸다 하여 화제가 되었던 주말연속극 ‘애정의 조건’(2004)에선 혼전동거 사실을 숨기고 결혼한 아내와의 갈등 끝에 그녀를 용서하는 품 넓은 남편이었다. 원래 그의 비중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 주인공의 중도하차로 중반 이후의 시청률은 오롯이 그의 몫이 되었다. 어쩌면 침몰했을 수도 있었던 ‘애정의 조건’은 최고 시청률 42.2%를 기록했다. 아내의 과거 때문에 가슴 아파 흘린 그의 눈물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흠뻑 적셨다. 사랑은 변할 수 없는 지고지순한 것임을 그는 남자의 눈물을 통해 뜨겁게 보여주었다. 이후 ‘로비스트’(2007)에선 국제적 로비스트 해리로 출연하여 블록버스터급 액션 연기를 펼쳤고,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2010)에선 복수를 위해 권력과 재력을 악착같이 거머쥔 최강타로 열연했다.

현대극에서의 그는 평면적이었다. 뚜렷한 선을 갖고 있는 얼굴, 운동으로 단련된 탄탄한 몸, 무언가 결기가 느껴지면서도 선한 웃음으로 따뜻함을 표현하는 눈과 입은 어떤 땐 세련된 로맨티스트로, 또 어떤 땐 고도의 두뇌활동을 동반한 서늘한 악인으로 그를 변신시켰다. 단역이든 조연이든, 선한 역이든 악역이든 그의 변신은 예상 가능했다. 그런 그가 입체적이 되기 시작한 것은 사극에 출연한 이후였다. 그 시작은 ‘장희빈’(2003)이었다.

인현왕후의 복위와 장희빈 축출에 중요한 역할을 한 김춘택으로 출연한 그에게 한복은 편안해 보였다. 모진 고초를 당하면서도 의로운 일 앞에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조선의 지략가 김춘택을 그려낸 그에게 대중들은 ‘장희빈’의 시청률을 견인해준 구원투수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성공적으로 사극 신고식을 마친 그는 ‘해신’(KBS·2004)에서 염장 역으로 사극 배우의 입지를 굳혔다. 그가 연기한 염장은 실존하는 인물로 해상왕 장보고와 각을 세우는 냉혈한이었다. 목표한 바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악인인 동시에 사랑하는 여인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애절한 사랑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우수에 젖은 카리스마는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 시청자의 마음까지 앗아갈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주몽’(2006)의 주인공이 되었다.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한껏 고조되어 고구려와 관련된 사극을 경쟁적으로 방송하던 때였다. 하지만 고구려에 대한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에 작가의 상상력과 감독의 연출력, 배우의 연기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무리 ‘해신’에서 연기파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고 하지만 20회 내외의 미니시리즈가 아니라 81회의 대하드라마였기에 드라마 전체를 이끌어가야 했던 주몽 역은 그에겐 도전이었을 것이다. 유약했고 철없는 어린 시절의 주몽이 고구려 건국의 주체로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는 밀도 있게 그려냈다. 스물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들어선 배우의 길이었지만 부단한 노력은 단숨에 벌어진 시간의 간극을 메워나갔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그의 꿈은 ‘바람의 나라’(2008)에서 이뤄졌다. 주몽의 손자이나 부모 형제와 자식을 죽일 운명이라 하여 신분을 모른 채 벽화공으로 살아야했던 시절의 무휼을 연기하며 그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었다. 극중 그의 사랑이었던 부여 공주 연의 초상화는 배우 송일국이 직접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생 한 번밖에 받을 수 없다는 신인상 수상 후 10년 동안 현대극와 사극을 넘나드는 그의 발걸음은 바빴다. 그리고 잠시 긴 휴식에 들어갔나 싶었던 어느 날, 삼둥이와 함께 수퍼맨이 되어 아빠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하나도 둘도 아닌 셋’씩이나 되는 ‘대한, 민국, 만세’는 인화초(人華草)였다. 또래보다 작지 않은 아들 셋을 한꺼번에 안고 달리고, 송국열차를 매달고 자전거 페달을 밟고, 먹성 좋은 아이들의 밥과 간식을 챙기고, 그러다 지쳐 잠들기도 하는 아빠의 일상은 주몽도, 염장도 아닌 송일국 자체였다.

수퍼맨의 망토를 벗고 장영실로 돌아온 그가 전해줄 ‘과학적 희망’이 기대된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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