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의 두 주인공 유승호(오른쪽)와 박성웅은 살인을 저지른 재벌 2세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는 라이벌 변호사로 나와 열연을 펼친다. ⓒphoto SBS
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의 두 주인공 유승호(오른쪽)와 박성웅은 살인을 저지른 재벌 2세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는 라이벌 변호사로 나와 열연을 펼친다. ⓒphoto SBS

몇 년의 공백은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다른 연예인들과 달리 자신의 팬 카페에 짧은 인사만 남기고 입대했던 배우 유승호가 만기 전역하고 돌아와 펼친 연기의 세계는 다채로웠다. ‘상상 고양이’(MBC every1), ‘리멤버-아들의 전쟁’(SBS), 영화 ‘조선마술사’. 순수 로맨스, 범죄 추리, 사극까지 데뷔 16년 차 배우다운 선택이었다. 장르가 다른 세 작품을 거의 동시에 진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배우로의 삶에 전력 질주하겠다는 그의 다짐을 보여주는 듯했다.

복귀 첫 작품 ‘상상 고양이’. 까칠하면서도 도도하고 자기 세계가 강한 웹툰 작가 지망생 종현을 그는 섬세하게 그려냈다. 고양이와의 교감연기는 따뜻했다. 강아지와의 감동적 우정을 그렸던 영화 ‘마음이’(2006)의 꼬마 찬이가 청년 종현이 되어 온 듯했다.

두 번째, ‘리멤버-아들의 전쟁’. 그는 절대기억력을 가진 변호사 진우다. 보고 들은 것뿐만 아니라 그때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기억하는 그는 과잉기억증후군자다. 어린 시절 사고로 엄마와 형을 잃었을 때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그는 아버지와 둘이 사는데, 아버지는 알츠하이머 환자다. 그런 아버지가 살인 누명을 썼다. 진범은 재벌의 후계자. 자신의 약점인 절대기억력을 무기로 그는 22살 최연소 변호사가 되어 아버지의 무죄를 입증하기 시작한다. 돈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아무렇지 않게 부숴버린 자를 찾아내 응징해야 하는 그에게서 더 이상 소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 번째, 영화 ‘조선마술사’. 조선시대 최고의 마술사 환희가 된 그는 달콤한 매력을 한껏 뿜어냈다. 천한 신분의 마술사 환희와 공주 청명과의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판타지 로맨스다. 조선 최대의 극장 물랑루(勿朗樓)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기 위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그의 마술은 완벽했다. 오랜만의 현장이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고 말하는 그에게선 배우만이 가질 수 있는 살아 있는 기쁨이 보였다. 여심을 녹이는 눈웃음과 매력적인 목소리로 “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도 아니고, 대단한 놈도 아니야. 하지만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거야”라는 고백을 할 때 어떤 여인이 그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학을 가지 않고 현장을 선택하다

그는 일곱 살에 데뷔했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엄마 치맛자락 잡고 또래 친구들과의 놀이에 빠져 있을 때, 그는 ‘어떤 다른 사람’이 되어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보여주는 배우가 되었다. 차돌멩이같이 단단하고 자그마한 아이는 어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연기를 잘했다. 발성도 또렷했고 몸의 움직임도 정확했다. 특히 내면의 감정을 보여주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아역으로 시작한 배우들은 성인 연기자가 되기 위해 일정 기간 공백을 갖기도 하지만 그는 달랐다. 자신의 나이에 맞는 연기를 하며 작품 속에서 성장해갔다. 데뷔작이었던 ‘가시고기’(2000)나 영화 ‘집으로’(2002), 영화 ‘마음이’에서의 그는 순수한 아이 그 자체였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는 작품 하나를 할 때마다 소년이 되어갔다. ‘불멸의 이순신’(2004), ‘슬픈 연가’(2005), ‘왕과 나’( 2007), ‘태왕 사신기’(2007) 등에서 그는 김명민, 권상우, 배용준 등 ‘대단한 배우’들 못지않은 연기력으로 그들이 연기하는 인물의 어린 시절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변성기를 지나자 그의 목소리는 굵어졌고, 눈빛은 깊어졌다. 누구누구의 어린 시절 연기는 ‘태왕사신기’가 끝이었다. 시청률 견인을 위한 최종병기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그의 등장이 화제였던 ‘선덕여왕’(MBC, 2009)에서 김춘추 역을 훌륭히 소화해낸 그는 배우 유승호 앞에 붙어 있던 ‘아역’이란 이름표를 떼어냈다. 그리고 ‘무사 백동수’(2010)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장해나갔다. 태어날 때부터 살성(殺性)을 갖고 태어나 죽는 순간까지 단 하루도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날이 없는 슬픈 살수(殺手) 여운이 된 그는 액션 배우로도 손색이 없었다. 특히 최고의 살수 최민수와의 대결 신에서 그는 최민수의 카리스마에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절제된 움직임과 폐부를 찌를 듯한 날카로운 눈빛, 들리는 것은 부딪치는 날카로운 칼 소리뿐, 숲은 고요했다. “제가 선택한 길입니다. 하여 이젠 제 방식대로 할 것입니다. 마음이든 목숨이든 저는 모든 걸 가져야겠습니다.” 마치 배우의 길을 선택한 자신의 다짐을 말하는 듯했다.

성장기 작품의 상당수가 사극이었던 그의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공백 없이 성인 배우로 변신하는 데 ‘시간의 차이’만큼 유용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의 신분으로 현대극에서 성인 연기를 시작했다. 인간의 욕망과 파멸, 부와 권력에 대한 탐욕을 그린 ‘욕망의 불꽃’(2010)에서 그는 사랑하는 여자의 추악한 과거를 연민으로 감싸안아야 하고, 출생의 비밀까지 감당해야 하는 역이었지만 ‘소년’의 이미지를 다 지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번은 넘어야 할 고개였기에 ‘남자’가 되기 위한 그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그 정점에 ‘보고 싶다’(2012)가 있었다. 26세의 개인자산운용가 해리 보리슨 강형준이 된 그는 복수의 화신이었다. 부자 아버지와 후처 엄마,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엄마를 정신병자로 만든 이복 형, 그에 대한 복수는 집요했다. 엷은 웃음, 섬뜩한 미소, 주체할 수 없는 감정 폭발을 통해 복수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상처는 얼마나 깊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치유되기에는 또 얼마나 벅찬 노정을 거쳐야 하는지, 날선 연기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대학을 가지 않았다. 연기는 이론보다 현장에서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그는 대학 대신 현장을 택했다.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가능하면 늦게 가거나 짧게 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군대를 가는 나이에, 대부분의 친구들처럼 일반 부대로, 대부분의 친구들처럼 가족의 환송을 받으며 조용히 입대했다.

그는 열두 살 때 장애인 연기를 했다. 배우 김희애의 아들로 출연한 ‘부모님 전상서’(2004)에서 그는 발달 장애아로 나왔다. 어른도 장애인 연기는 쉽지 않은 터인데 그는 배역이 결정되고 나서 장애아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며 그들의 행동을 익혔고, 장애아 교육기관을 찾아가 함께 생활하며 그들이 되고자 했단다. 연기라는 것이 ‘그런 척’하는 것이라 하지만, 그는 ‘그런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그런 어떤 것’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사랑 나눔에 대한 실천도 꾸준하다. ‘닥터스’(2009), ‘공부하는 인간-호모 아카데미쿠스’(2013)와 같은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출연료 전액을 사회단체에 기부하기도 하고, 스리랑카 지역 난민 구호나 아동센터 건립 등의 활동도 멈추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한다. 남자가 된 소년, 그의 내일은 분명 오늘과 다를 것이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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