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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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한복판에서 길을 잃었다. 도심의 불빛 사이로 빠르게 오가는 사람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는 기억나지 않았다. 스스로도 낯선 자신의 모습에 어찌할 줄 모르는 변호사 박태석. 간신히 찾아낸 기억, 가족들과의 약속장소로 뛰어가는 그는 숨이 턱에 차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무언가에 된통 당한 것 같은 불쾌하고 불안한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준비할 시간도 없이 삶에 균열이 생기고, 태어나 처음으로 길을 잃고 두려움에 빠져 있던 40대 중반의 나를 기억하게 될까.”

이미 시작된 알츠하이머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기억’(tvN)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집안형편은 어려웠고, 아버지는 딴살림 차린 난봉꾼. 어머니는 아들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다. 지방대에 진학했지만 열심히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법대 후배와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삶이 그렇게 자리 잡아가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유치원생인 아들이 뺑소니 사고로 죽었다.

범인을 잡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가족을 지키지 못한 고통은 머리가 아니라 심장이 기억”함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름 정의로운 변호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그런 신념도 아들의 죽음 앞에선 아무 소용없었다. 대형 로펌의 변호사가 되어 세상의 힘을 갖고 싶었다.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은 필요 없었다. 권력자가 원하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그들이 갖고 있는 힘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하는 그는 승률 최고의 변호사가 되었다. 재혼하여 아이도 둘이나 있고, 이제 살 만했다. 그런데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 그물에 걸려버렸다. 그 절박한 슬픔의 한복판에 서 있는 박 변호사의 옷을 배우 이성민이 입었다.

고등학생 때 배우의 꿈

그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오랜 단역 생활과 조연 시절을 거쳐 주연급에 오른 배우들처럼 그도 연극으로 시작해서 영화와 드라마로 활동 영역을 넓혔고, 언제 벗어날지 모르는 무명의 긴 터널을 지나왔다. 오지 중에 오지인 경북 봉화에서 1968년 태어나 자란 그의 마음 안으로 연극이 들어온 것은 고등학생 때.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대부분의 부모님들처럼 그의 부모님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뛰어드는 아들을 반대했다. 한번 품은 꿈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연극영화과 진학이야 포기했다지만 배우에 대한 꿈을 접을 수 없었던 그는 극단에 들어갔다. 지방 극단 생활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 생활 몇 년 만에 대구연극제에서 ‘침묵’(1992)으로 신인연기상을 수상했고, 또 몇 년 뒤에는 전국 연극제에서 ‘돼지 사냥’(2001)으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이즈음 한번쯤 인생의 승부수를 던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딱 3년만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서울로 향했던 2002년, 배우를 천직이라 생각했기에 서른이 훨씬 넘은 나이에 감행한 무모한 도전이었다. 하루아침에 유명 배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중이 기억하는 의미 있는 배우이고 싶었다. 자신의 성공이 대구에서 연극하는 후배들에게 희망이 되길 소망했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며 영화와 드라마도 넘나들었다. 배우는 서울에서 하든 대구에서 하든 배우이고, 연기는 무대 위든 카메라 앞이든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상은 단역의 연속이었다. 사채 조폭 1, 과일가게 주인, 미스터 김, 형사, 박씨 등등 주어진 배역엔 이름 석 자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나마 출연한 장면이 편집당해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배우이고 싶었다.

그를 돋보이게 했던 작품 속 인물들은 불의를 그냥 봐 넘기지 못하는, 그래서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고집쟁이였다. ‘대왕 세종’(2008)에서 그는 최만리였다. 꼬장꼬장한 성품의 원칙주의자, 합리적 보수이자 청백리였던 그는 부정과 타협을 모르고, 진퇴가 분명한 인물이었다. ‘골든타임’(2012)의 최인혁은 중증 외상 환자를 수술하는 몇 안 되는 의사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환자의 위급 여부가 치료의 우선이었다. 세상과 비겁하게 타협한 자가 성공하는 던적스러운 세상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은 그런 세상의 흐름을 따를 수 없기에 생사의 갈림이 순간에 결정되는 현장에서 수술로서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려 했다.

‘미생’(2014)에서의 오상식 과장도 비슷한 인물이었다.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노련한 통찰력과 승부사 기질을 갖고 있는 집념의 상사맨이었던 그였지만 회사 내 정치는 관심 없었다. 업무에 있어 예의는 갖추고 있었지만, 개인의 영달을 위한 아부와 아첨으로 가야 할 길을 거스르진 않았다. 그는 위로받고 싶은 청춘들의 멘토였고, 앞만 보고 달려온 이 시대 경제 부흥의 주인공 중년들의 또 다른 자신이었다. 어떻게든 버티라고, 버티면 이길 수 있다고, 그렇게 하면 완생(完生)으로 나갈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연극을 알게 되고 평생 자신의 길이라 다짐하며 버텨온 그의 삶과 이들의 삶은 시공간을 넘어 어느 지점에선가 맞닿아 있는 듯했다. 연극 포스터를 직접 붙이러 다니고, 돈이 없어 제대로 된 끼니를 이어갈 수 없었지만 그래도 배우의 길을 갈 수 있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고단한 삶이었지만 접을 수 없는 꿈이 있어 견딜 수 있었다. 주목받는 것보다 지치지 않고 배우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길 원했던 이성민은 버티지 않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었으니 독해져야 했다. 세상과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배역은 있어도 작은 배우는 없다는 신념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막이 오르면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연극무대다. 마치 텔레비전 방송이 처음 시작되었던 1960년대, 생방송으로 드라마를 방송하던 시절처럼 무대 위 배우들의 긴장감은 피를 말렸을 것이다. 존재의 이유이기도 한 연극 무대에서의 30년은 이성민으로 하여금 어떤 배역이 주어져도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해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주었다. 장발의 껄렁껄렁한 팝칼럼니스트에서 막장 드라마 피디로, 아내를 위해 비아그라도 서슴없이 장복하는 느끼한 중년 아저씨에서 단정하고 신사다운 대통령으로, 후광 작렬하는 임금에서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레스토랑 사장으로, 처세와 줄타기의 달인이나 자기 꾀에 잘 넘어가는 신경외과 의사에서 탐관오리들이 판치는 세상을 뒤집어엎을 의적 대장으로. 정의로우면서도 악하고, 진지하면서도 코믹한 그의 변신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독보적 주연 배우가 되었지만 그는 소박한 연극 무대, 독립영화, 비주류 영화를 잊지 않고 있다. 진짜와 가짜를 바꿔버리는 자본의 힘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그만의 노력인 듯하다. 그래서 그는 평온한 지금을 가능하게 했던 연극 무대에 항상 두 발을 딛고 있다. ‘미생’ 마지막회에 이런 대사가 있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 같다. 지상에는 원래 길이 없었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마치 배우를 향해 묵묵히 살아온 그의 인생을 읊조리는 듯했다. 어떤 역이든 배우 이성민이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씩 쌓아가는 그는 연기의 답을 찾아가는 길 위의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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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정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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