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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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를 출발해 전 세계를 돌고 다시 이탈리아 시칠리아로 돌아오는 세계여행, 이 멋진 꿈을 꾸는 그녀는 유쾌했다. 딸이 사준 청바지에 낡은 티셔츠면 어떻고, 시든 오이 씹어 먹다 남편에게 식탐 많다고 투박스러운 소리 들으면 또 어떠랴. “기다려라 시칠리아, 곧 내가 간다.” 그녀를 웃게 하는 건 ‘기승전 세계여행’이었다.

황혼기 청춘들의 인생찬가 ‘디어 마이 프렌즈’(tvN)에서 배우 나문희가 연기하는 일흔둘 문정아의 이야기이다. 어렵고 힘든 생활이었지만 딸만은 자신처럼 살지 말라며 아들도 보내지 않은 고등학교까지 보내준 엄마 덕분에 정아는 고졸의 고학력자가 되었다. 다르게 살 줄 알았지만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평생 중졸 콤플렉스를 갖고 사는 짠돌이 남편을 만나 병든 시부모 모시고 시동생, 시누이 여섯이나 키워 출가시켰다. 딸 셋도 모두 짝 채워놓고 이제 한숨 돌리려나 했는데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요양원 비용을 벌기 위해 딸 셋의 집을 돌아가며 치워주고 밥도 하고 빨래도 해준다.

엄마처럼 요양원에 누워 죽을 날 기다리는 말년이고 싶진 않았다. 죽더라도 길 위에서, 세상 구경하다 죽겠다는 그녀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자동차 운전면허도 따냈다. 남편의 잔소리가 끊이지 않아도, 절친이 피해망상으로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귀찮게 해도, 자식들이 엄마를 도우미 취급해도 그녀를 지탱해준 건 자기 삶에 대한 주인의식이었다. 그런 정아와 배우 나문희는 딱 맞아떨어졌다.

나문희는 1941년생이다. 1961년 MBC 공채 성우 1기로 데뷔한 그녀는 그 시절 성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TV 방송국이 개국하면서 자연스럽게 텔레비전 연기자가 되었다. KBS, TBC에 이어 1969년 8월 개국한 MBC가 그녀의 무대였다. 데뷔작은 개국 작품이었던 화요 드라마 ‘이상한 아이’(1969). 당시 사회가 추구했던 자녀상과 가정 윤리를 모색한 드라마였는데 아직 20대였던 그녀는 동년배인 배우 이대근의 엄마를 연기했다.

MBC 공채 성우로 데뷔

성우 시절의 그녀는 야들야들하고 간드러진 톤에서부터 선 굵은 중저음까지 폭넓은 목소리 연기를 펼쳤다고 한다. 라디오 드라마뿐만 아니라 외화 더빙까지 그녀가 했던 다양한 작품들은 훌륭한 연기 교본이었고 살아 있는 현장이었다. 마릴린 먼로, 글로리아 스완슨 등 내로라하는 주연 배우들의 목소리는 그녀 몫이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달랐다. 빼어난 미모도 아니었고, 체격마저 컸던 그녀에게 주어진 역은 나이에 맞지도 않았고, 주연도 아니었다. 할머니, 동네 아낙, 과부, 술집 마담, 가정부와 같은 역이 이어졌다. 속상할 만도 했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주인공이든 단역이든 모든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드라마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이 작아도 배우인 자신은 작지 않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 그녀의 존재가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여고동창생’(1976)이다. 여고시절 단짝 친구 5명이 졸업 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김수현 작가 작품이었다. 이미 당대 스타였던 김혜자, 윤여정, 남정임, 김윤경과 호흡을 맞추며 비로소 자기 나이에 맞는 역을 하게 되었다. 드라마는 성공했지만 이후 작품에서 매번 주인공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언제나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역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나문희는 늘 엄마였다!

20년이 지난 1995년 그녀는 KBS 연기대상에서 ‘바람은 불어도’로 대상을 수상했다. 그늘지고 소외된 노인들이 늘어나는 세상에서 그녀가 연기한 변덕네는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에 당당했고, 젊은이 못지않은 유머감각의 소유자였다. 얼굴에 주름살 그려넣고 머리를 하얗게 물들이고 허리를 구부린 그녀는 멋들어진 이북 사투리로 속시원하게 세상을 이야기하며 중년 배우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드라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1996).

말기암 선고를 받은 며느리는 치매를 앓고 있는 시어머니가 안쓰러워 같이 죽자며 시어머니를 껴안고 한없이 울었다. 너무 몰입해 있어서였을까 카메라가 멈춘 후에도 울음이 그치지 않았던 그녀는 노희경 작가에게 이렇게 울려도 되냐고 하소연을 했다는 후일담도 있다.

56년 차 배우 나문희라면 연기에 도가 터 이젠 대본 한 번만 쓱 봐도 될 것 같지만, 그녀는 지금도 새로운 배역과 자신을 일치시키기 위해 수없이 연습한다. 밤새워 촬영하고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와도 연기하며 살 수 있는 자신의 삶이 더없이 행복하단다.

어디서 그런 식지 않는 열정이 샘솟나 생각해 보니 남다른 유전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화가이자 페미니스트 작가로 근대의 벽을 허문 나혜석이 그녀의 고모할머니다. 인생과 사랑에 있어 거침없었던 여인, 자신의 삶에 있어 누구보다 당당했던 고모할머니처럼 그녀 또한 평생 가장 욕심 많은 배우로, 어떤 역이 주어지든 내가 아니면 아무도 이 역을 소화할 수 없다는 결기 어린 마음을 갖고 있었다.

배우 나문희는 늘 엄마였다. 멋있는 이층집 철대문이 아닌 좁은 골목 어딘가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은 평범한 엄마였다. 깍듯하게 부르는 ‘어머니’보다는 ‘엄마’나 ‘어무이’가 더 정겹고, ‘우리 아이들’이란 표현보다는 ‘내 새끼들’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푸근한 엄마였다. 가끔은 푼수 같기도 하고, 때로는 이기적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없는 인내심으로 자식들이 감당해야 할 세상 모든 고통을 말 없이 지고 갔다. 남들이 아니라고 해도 내 자식이 그렇다고 하면 그것을 믿어주는 이 세상 유일한 사람, 엄마. 그녀가 보여준 수많은 엄마가 시종일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진솔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2011), ‘그들이 사는 세상’(2008), ‘소문난 칠공주’(2006), ‘굿바이 솔로’(2006), ‘장미빛 인생’(2005), ‘너는 내 운명’(2005), ‘서울의 달’(1994) 등 그녀를 엄마로 기억하게 하는 이 작품들을 관통하는 것은 강건한 자존감이다.

그렇다고 항상 그녀가 자식만을 위해 애절했던 것은 아니다. ‘애교 문희’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거침없이 하이킥’(2006)의 그녀는 사랑스러웠다. 펑퍼짐한 옷에 부스스한 헤어스타일, 콧소리 한껏 높여 툭툭 내뱉는 말은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무뚝뚝한 남편에게 “여봉, 문희는 오늘~~~”이라며 애교를 떨 때는 스무 살 처녀가 된 듯했다. 그녀에게 코믹한 면이 없진 않았지만 이렇게 시침 뚝 떼고 시트콤 연기를 할 수 있나 싶었다.

그녀는 연극만이 아니라 뮤지컬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몇 번 보았지만 뮤지컬을 할 만큼의 실력인 줄은 몰랐다. ‘친정엄마’(2010)에서는 오직 자식의 행복만을 바라는 시골 엄마로, ‘서울 1983’(2015)에서는 6·25전쟁으로 남편과 생이별한 뒤 홀로 자식들을 키워낸 엄마로 열연하며 대중과 생생한 교감을 나누었다. 둥근 곡선과 풍만한 자태의 달항아리를 닮은 배우 나문희. 세월이 갈수록 은은한 빛이 더 깊어지는 달항아리처럼 그녀 특유의 섬세한 감정 표현과 자연스러운 연기로 배우의 빛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과 하나가 될 때 배우는 가장 아름답듯, 그녀는 언제나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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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정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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