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조용희 스포츠조선 기자
ⓒphoto 조용희 스포츠조선 기자

드라마로는 ‘로비스트’(2007)가 마지막 작품이었으니 9년 만의 안방 복귀다. 영화 ‘이끼’(2010) 이후로는 어디에서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미국에서 한인방송 DJ를 하며 뮤지컬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부였다. 그는 예전보다 야위어 보였다. 하얀 의사 가운 때문인지 깊게 팬 얼굴 주름은 더 굵게 선을 드러냈다. 그 선들 사이로 많은 생각이 부침을 거듭하는 듯했다. “앞만 보고 전진하며 저돌적으로 살아온 내 삶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새로운 삶을 어떻게 살지 삶 공부하며 지냈습니다.” 배우 허준호가 의학 드라마 ‘뷰티풀 마인드’(KBS)의 이건명으로 돌아왔다.

그는 장애를 갖고 있는 아들과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해야 하는 아버지를 연기하고 있다. 감정중추가 제 기능을 못하는 장애를 갖고 있는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타인의 감정을 느끼거나 공감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명 반사회적 인격장애. 아버지는 아들이 사람들 속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길 원했다. 유능한 신경외과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의학적으로 아들을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그의 선택은 훈련. 공감할 수 없다면 공감하는 척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아들에게 얼굴 표정과 태도, 몸의 변화를 통해 타인의 감정을 읽어가는 훈련을 시켰다.

훈련은 지독했다. 수없이 많은 보디 시그널을 암기하고, 그것에 맞춰 사람들의 감정에 공감하는 척해야 했지만 감정의 변수를 모두 읽어낼 순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아들이 의사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신기(神技)라 불릴 만큼 뛰어난 진단과 치료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와 교감하지 못하는 의사는 안전핀이 제거된 폭탄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통제되지 않는 아들은 아버지를 분노케 했다. 사실 그의 아들은 입양아다.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를 입양한 그는 휴머니스트 의사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아들을 보다 완벽히 지배하려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어쩌면 아들이 아니라 의학적 실험대상으로 그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긋난 부정(父情)일지 의사로서의 빗나간 욕망일지, 자신을 숨긴 채 30년 가까이 아들을 훈련시키고 관찰해온 아버지의 얽힌 감정을 허준호는 틈 하나 없이 조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들에겐 동성의 인생 선배이고, 의사라는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동료이기도 한 이들의 관계 속에서 그는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듯했다.

잠시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내디딜 때 조심스러운 건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제작발표회 현장에서의 그도 그러했다.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그이지만 환한 미소 사이로 살짝살짝 긴장감이 전해왔다. 복귀작으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깊었다고 한다. 그는 “머리 숙여 겸손하게 나갈 수 있는 작품”으로 누군가 자신을 선택해주길 기다렸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뷰티풀 마인드’였다. 허준호에게 아버지는 남다른 의미였기에 그냥 의사가 아니라 아들을 상대로 해야 하는 아버지 의사의 역이 마음을 움직인 듯했다.

“여백이 있는 배역이라면…”

그의 작품 중에서 아버지라는 배역으로 본다면 ‘부모님 전상서’(2004)를 빼놓을 수 없다. 선친의 가업을 물려받아 제법 성공한 사업가 창수는 뛰어난 외모와 똑 부러진 성격의 성실을 고등학교 때부터 마음에 품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성실과 결혼했고 일상은 행복했지만, 자폐아인 아들과 부진의 늪으로 빠져드는 사업은 그를 흔들었다. 그는 자기 앞의 현실을 감당하지 못한 채 방황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은 미움이 되었고, 아들에 대한 사랑은 분노가 되었다. 산다는 것이 그냥 흘러가는 것인 줄 알았는데, 예기치 못한 복병이 너무 많았다. 그 모든 것이 아들로부터 비롯된 것 같아 괜히 부아가 났다.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했던 그는 결국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창수를 연기했을까. ‘부모님 전상서’는 이혼의 아픔을 겪은 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때의 작품이다.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 작품 속 인물과 실제 배우의 삶을 비교하기 좋아하는 대중의 눈길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김수현 작가의 작품이고 김희애의 남편 역이었지만 선뜻 출연을 결정하지 못했다. 한 달여의 고심 끝에 그는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당당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부자지간이었지만 사제지간으로 뜨거운 정을 나눴던 ‘주몽’(2006)의 해모수도 그를 아버지로 기억하게 한다. 배우 허준호의 재발견이라 해도 좋을 만큼 열연했던 ‘주몽’에서 그는 고조선 멸망 후 유민들을 이끌었던 민족의 영웅이며, 형제보다 믿고 아꼈던 금와에게 배신당하고 아들인 주몽을 아들로 품어보지 못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장수로서의 액션 연기만이 아니라 갑옷 속에 숨겨야 하는 대장부의 인간적 고뇌와 번민, 고독을 놓치지 않았다. 혼신의 연기 덕분에 한국의 러셀 크로, 일명 ‘허셀 크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주몽’과 관련된 한 인터뷰에서 “연기할 수 있는 여백이 있는 배역이라면 극중 비중을 따지지 않고 했어요”라고 했다. ‘주몽’의 해모수는 총 81부작 중 11회에서 장렬한 죽음으로 퇴장했다. 짧다면 짧은 등장이었지만, 그의 무게감은 컸다. 그 또한 왜 주몽이 탐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작품을 고를 때 자신이 작품 안에 얼마나 녹아들어갈 수 있는지를 먼저 고민한다는 그였기에 주연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86년에 영화 ‘청 블루 스케치’로 데뷔한 그는 배우 허장강의 아들이다. 대중은 허장강을 본 듯 그를 반겼다. 뻔뻔하고 능청맞은 악역 연기로 한국 영화사의 한 장을 장식한 성격파 배우였던 아버지 허장강은 아들 허준호에게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열두 살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없어진 서울운동장에 운집한 2만 관중 앞에서 ‘영화인 친선축구대회’ 선수로 출전한 아버지는 그라운드를 누비다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이 세상 마치는 순간까지 대중과 함께했던 허장강은 주연보다 조연으로, 선한 역보다 악역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배우였다. 그런 면에서 아들 허준호는 놀랄 만큼 아버지를 빼닮았다.

연기만이 아니라 노래 잘하는 것까지 아버지의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는 한때 가수 활동을 했다. 그가 목 놓아 부르는 ‘어머님의 자장가’는 눈시울을 적시지 않고 들을 수 없을 만큼 호소력이 짙다. 서울예술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다. 뮤지컬 기획자 박명성씨가 무용과 동기다. 노래와 연기에 선천적 재능을 갖고 있는 그는 뮤지컬 배우로 적격이었다. 1999년 초연 때부터 10년 이상 카지노 보스 역으로 꾸준히 무대에 올랐던 ‘갬블러’를 비롯하여 ‘마리아 마리아’(2006), ‘시카고’(2009) 등 그는 놀라운 마성의 힘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돌아온 배우 허준호, TV와 영화, 무대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는 그는 오늘도 묵묵히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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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정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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