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째 아침 라디오를 진행 중인 KBS 황정민 아나운서. ⓒphoto KBS
18년째 아침 라디오를 진행 중인 KBS 황정민 아나운서. ⓒphoto KBS

지난 9월 29일 오전 7시, 아침 라디오인 SBS ‘파워FM’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대타로 DJ에 나선 박은경 아나운서는 “호란씨가 개인 사정으로 방송에 나오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후 호란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그 개인 사정은 다름 아닌 음주운전이었다. 아침 생방송을 위해 달려오던 호란은 음주운전을 하다 접촉사고를 냈다. 호란의 소속사 측은 “변명과 핑계의 여지가 없다”며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로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다.

아침 라디오는 오후·저녁·심야 라디오와는 다른 성격을 띤다. 심야의 라디오가 공적인 시간에서 사적인 시간으로 넘어가는 이들을 위한 감성 충전제라면 아침 라디오는 사적인 공간에서 공적인 공간으로 넘어가는 출근길 직장인들을 위한 활력 충전제다. DJ의 역할도 그만큼 크다. 특히 아침 라디오의 청취자는 부동층이다. 라디오 관계자들은 아침 청취자를 배우자에, 심야 청취자를 애인에 비유한다. 그만큼 헤어지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실제로 아침 라디오의 꽃이라 불리는 오전 7시부터 9시 프로그램은 한동안 KBS ‘황정민의 FM대행진’이 장기 집권했다. 황정민 아나운서는 1998년부터 18년째 ‘황정민의 FM 대행진’을 진행 중인 최장수 DJ다. 2008년 KBS 라디오 진행 10주년을 맞아 ‘골든페이스’ 상을 수상했고, 2011년 KBS 연예대상 라디오 DJ상, 2013년 제13회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라디오상 등을 받았다. 18년 동안 아침을 책임져왔다는 것은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직원이 대리와 과장을 거쳐 차장이나 팀장은 되었음 직한 세월이다. 실제로 이들은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는데, 진행하는 황정민을 ‘족장’, 청취자를 ‘황족’이라 부른다. 1년에 한 번은 이들을 직접 스튜디오로 초청해 식사를 하거나 함께 라디오를 진행하는 이벤트도 갖는다. 이 아성을 무너뜨린 것이 ‘굿모닝FM’을 맡은 전현무였다. 당시 ‘굿모닝FM’ 팀은 만년 1위인 ‘FM대행진’ 팀을 치밀하게 분석했다고 한다. 분당 청취율이 떨어질 때는 언제인지, 어떤 프로그램을 청취자들이 좋아하는지 세밀하게 파악했다. 전현무가 진행했던 2년9개월 동안 ‘굿모닝FM’은 ‘넘사벽’이던 아침 청취율 1위의 고지에 올랐고, 라디오 전체에서도 컬투쇼에 이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2위에 올랐다.

1987년부터 라디오와 함께한 방송인 이숙영. ⓒphoto SBS
1987년부터 라디오와 함께한 방송인 이숙영. ⓒphoto SBS

지각으로 방송사고 전현무 찜질방 출근도

그러나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특히 전현무는 라디오 진행을 시작한 지 4일 만에 아침 생방송에 지각하는 방송 사고를 냈다. 같은 해 11월에 또 두 번의 지각을 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그는 “식은땀도 안 나고, 정신이 멍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찜질방에서 자주 잤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MBC에서 2분 거리의 찜질방을 이용했다. 그래야 푹 잘 수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전현무는 아침 라디오를 통해 ‘비호감’ 이미지를 털어내고, 청취자들의 사랑과 신뢰의 박수를 받으며 마이크를 내려놨다.

반대의 사례도 있다. 특히 SBS의 ‘파워FM’은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이 있었다. 관록의 DJ 이숙영에 이어 DJ로 데뷔한 방송인 박은지는 7개월 만에 라디오에서 하차했다. 당시 제작진은 ‘스케줄상의 이유로 DJ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후임은 클래지콰이의 호란이 맡았다. 호란은 첫 방송부터 ‘처음 같지 않은 깔끔한 진행을 선보였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후 2년 동안 안정적인 진행을 선보였다. 지난 8월 ‘2시 탈출 컬투쇼’에 게스트로 출연한 호란은 “아침 시간대 라디오 DJ를 맡은 지 2년이 됐다. 첫해에는 낮술을 마셨다. 그런데 2년 차가 되니까 이젠 술을 싫어하게 됐다”며 “나도 이런 내가 낯설다. 아침 중심으로 생활 패턴이 바뀌어 11시 전에 자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그를 DJ석에서 내려오게 만든 건 아이러니하게도 술이었다. 다시 ‘파워FM’의 DJ는 공석이 되었다.

‘파워FM’의 새로운 진행자가 된 개그맨 김영철. ⓒphoto SBS
‘파워FM’의 새로운 진행자가 된 개그맨 김영철. ⓒphoto SBS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수

10월 24일 ‘파워FM’의 새로운 진행자가 나타났다. 앞선 타임인 6시에 ‘펀펀투데이’를 진행했던 개그맨 김영철이다. 지난 5년 동안 새벽 6시마다 아침을 깨웠던 그는 특유의 성실함과 근면함을 인정받아 ‘꿈의 시간’인 7시에 입성하게 됐다. 실제로 그는 첫 방송에서 “‘펀펀투데이’와 오열하면서 작별했다. 한 시간 이사 가는데 이민 가는 기분이더라”라고 했다. 스스로 ‘꿈을 이뤘다’는 그는 청취자들에게도 “성실함이 꿈을 이루는 열쇠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처럼 아침 라디오는 입담이나 활기보다 중요한 게 성실함이다. ‘오늘 아침 정지영입니다’의 메인 작가로 활동했던 윤석미 작가는 “아침 방송 DJ는 저녁이 없는 삶을 산다”고 했다. 특히 “아침 방송의 청취자들은 방송을 들으며 출근을 하기 때문에 라디오는 회사에서 이야기를 나눌 소재를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 얼마만큼 재미있고 유익한 이야기를 들려주느냐에 따라 라디오의 성패가 갈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음악이나 선물을 준비하는 것만큼이나 원고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때문에 아침 프로그램의 DJ와 제작진은 점심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저녁 약속은 거의 못 잡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점심 때 다양한 직종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제작진이 아침 프로그램은 기분 좋게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DJ는 특히 목 관리도 신경을 쓰죠. 스카프를 두르거나 찬 음료를 마시지 않는 건 기본입니다. DJ나 청취자나 아침의 기분이 하루의 컨디션을 좌우하니까요.”

보통 아침 라디오는 평일 생방송, 주말 녹음 방송으로 진행한다. 주 5회는 일반 직장인처럼 정한 시간에 출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더구나 출근길 직장인의 동무가 되려면 이들보다 한 걸음 먼저 일어나 준비해야 한다. 김영철은 아침 라디오를 시작하면서 알람을 6개 맞추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한다. 아침 방송을 28년째 진행하고 있는 방송인 이숙영은 소문난 책벌레다. 그와 20년째 함께 방송하고 있는 송정연 작가는 “고체가 아닌 액체 같은 사람, 어떤 내용을 써 줘도 다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를 소개했다. 최근에는 보이는 라디오도 많아졌지만, 라디오는 기본적으로 목소리로 소통하는 매체다. 그럼에도 이숙영은 매일 정장을 차려입고 정성껏 화장을 한 뒤 마이크 앞에 앉는다. 그것이 청취자를 대하는 기본자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의 채널은 바뀌어도 청취자는 변하지 않는다. “1987년 대타로 시작한 라디오를 지금까지 하고 있다. 나에게 라디오는 숙제가 아니라, 축제다.” 그의 말처럼 아침 라디오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들만 즐길 수 있는 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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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슬기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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