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안현민
ⓒphoto 안현민

지난 6월 27일 오전 10시30분. 흰색 진베이(金杯) 승합차가 중국 베이징 조어대(釣魚臺) 북문을 통과했다. 조어대는 중국을 방문하는 외국 정상들이 머무는 공식 국빈관이다. 넓이 43만㎡에 이르는 조어대의 호수와 녹지를 지나 차량이 멈춘 곳은 2호루 건물 앞. 차 문이 열리고 흰색 요리사 복장을 한 남성이 봉투 꾸러미를 잔뜩 들고 내렸다.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데다 국가 최고 요리사들만 선발하는 조어대에 들어온 이 외부 요리사를 보고 조어대 직원 중 한 명이 말했다. “아, 안따추(安大廚·셰프 안)!”

요리사 복장의 이 남성은 베이징 싼리툰(三里屯)에서 한식 레스토랑인 ‘쌈(SSAM)’을 운영하는 안현민(Andrew An·39)씨다. 그가 양손 가득 들고 있던 것은 한식 도시락 150인분. 이날 3박4일 일정으로 중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 수행단과 대사관 지원팀에 제공될 음식이었다. 그는 이번 방중 행사 기간 동안 두 번 점심을 배달했다. 첫째 날은 비빔밥과 콩나물냉국, 둘째 날은 골뱅이무침과 불고기, 나박물김치가 조어대의 문턱을 넘었다. 박 대통령은 방중 기간 조어대 18호루에 머물렀고 수행단과 대사관 직원들의 임시사무실도 조어대 내부에 마련됐다.

한국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인데도 반응은 뜻밖이었다고 한다. 배달을 마치고 레스토랑으로 돌아오는 안씨의 ‘카톡’에 감사인사가 쇄도했다. 지난 7월 9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도시락 한 개당 가격이 만원쯤 됐을 겁니다. 레스토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자가 막 오더라고요. 너무 맛있다고. 식당 위치가 어떻게 되냐고요. 의전실에서 원래는 방중 마지막 날 일정인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을 시찰할 때 대통령 몫까지 주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간단한 오찬 형식으로 바뀌었다면서 취소했어요. 박 대통령은 무척 소식(小食)하신다는 외교부 직원의 말을 듣고 양은 적지만 맛깔난 메뉴들을 생각해 뒀었는데…. 저도 무척 아쉬웠죠.”

그의 도시락은 주중 한국대사관에서 일하는 중국인 직원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안현민표 도시락 맛의 비결에 대해 “수란(水卵)”이라고 답했다. 수수와 메밀을 넣어 잡곡밥을 짓고 대추, 잣, 은행 고명까지 13가지의 재료를 올린 후 시간이 지나면 자칫 퍽퍽해질 수 있을 밥 위에 샛노란 노른자가 ‘톡’ 하고 터지는 수란을 올리는 게 비결이다. 휴대성과 맛, 두 가지 모두를 잡은 것이었다.

안씨는 1974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다. 사춘기 때 포항 육거리에서 작은 경양식집을 운영했던 어머니의 요리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훔쳐본 게 요리 인생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손님이 없을 때면 주방에 들어가 이런저런 요리 ‘실험’을 했고, 싱크대를 엉망으로 만들어 놔서 혼도 났다. ‘언젠가는 내 주방에서 요리해야지’라며 자신만의 주방을 꿈꿨다고 한다.

대학 시절은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보냈다. 대구산업정보대 조리학과에 입학하면서 경주에 있는 힐튼호텔을 찾아가 실습생으로라도 받아달라고 사정했다. 이곳 주방에서 설거지부터 시작해 7년간 요리 경력을 쌓았다. 처음 본 호텔 주방은 어머니의 경양식집 주방과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점점 더 큰 주방을 꿈꾸게 됐다.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올라와 W호텔에 취직했습니다. 직급도 월급도 전 직장보다 낮았지만 매 순간이 감동이었던 것 같아요. 이때 저를 면접 본 사람이 영민이 형(에드워드 권의 본명)이었죠. 운이 좋았습니다.”

안씨에게서 요리에 대한 근성과 승부욕을 본 스타셰프 에드워드 권(42)은 2007년 자신이 일하던 두바이의 버즈 알 아랍 호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그를 추천한다. 안씨는 이곳에서 2년 동안 파트 조리장(Chef de Partie)으로 일했다. 음식에 과학을 접목한 분자요리(分子料理)를 비롯해 이탈리아 요리의 정수도 이때 배웠다. 그러던 중 2009년 돌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중국 베이징행을 택했다. “이제까지 배운 요리들로 최고의 한식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연고도 없는 중국을 다음번 ‘실험실’로 삼은 셈이었죠.”

2010년 그는 베이징 싼리툰에 한식 레스토랑 ‘SSAM(쌈)’을 열었다. 싼리툰은 중국 주재 각국의 대사관들이 밀집된 곳이다. 지난 17년을 쏟아 온 이탈리아 요리 중심의 양식을 버리고 나선 한식 시장 공략이었다. 자신의 강점을 살려 중국인과 외국인을 타깃으로 했다. SSAM을 오픈하기 전에는, 베이징의 포 포인츠 바이 쉐라톤호텔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1년간 근무하며 ‘주방 중국어’도 익혀 뒀다.

그의 한식은 참신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채소가 듬뿍 들어간 수제순대, 떡갈비를 패티로 사용한 햄버거, 중국인의 ‘양고기 사랑’을 반영한 양고기보쌈 등 비주얼도 뛰어나고 맛도 세련됐다. 한식과 어우러질 수 있는 포도주 리스트를 엄선한 점도 외국인 고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현재 식당 손님의 95%가 외국인, 나머지 5%가 한국인이다. 음식 비용은 1인 평균 150위안(약 2만7000원) 선이다.

‘버즈 알 아랍’ 출신의 한식 요리사는 중국 언론의 주목을 끌기에도 충분했다. SSAM은 그동안 중국 잡지와 TV에 소개되며 유명세를 탔다. 지난 3월부터 한 달 동안 TV 요리방송에 출연하면서 중국 한식업계의 스타셰프가 됐다. 세트장에서 만든 비빔밥을 먹어 본 방송 출연진들이 “천상의 음식”이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微博)엔 중국인 팔로어 2만명이 생겼다. “녹화를 진행하면서 비빔밥을 맛본 진행자와 제작진들이 비닐봉지에 밥을 싸가더라고요. 이번 조어대 도시락도 뤼여우(旅游)TV 요리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보고 대사관에서 연락을 주신 겁니다. 정작 중국인을 타깃으로 한 한식은 이제 시작이구나 싶었습니다.”

“중국에서 한식 레스토랑은 이미 포화 상태”라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영업비밀인데요, 중국 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면서 특색이 있는 식재료를 활용해 진부하지 않고 ‘젊은 한식’을 내놓는 게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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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디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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