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의 ‘겨울연가’ ‘여름향기’, MBC의 ‘해를 품은 달’ ‘킬미 힐미’…. 한국을 넘어 일본과 중국까지 ‘심쿵’하게 만들어 한류의 교두보가 된 로맨스 드라마들이다. 이 드라마의 뒤에는 드라마 제작사 팬엔터테인먼트가 있었다. 팬엔터테인먼트의 김희열 부사장은 “영화가 감독의 예술, 연극이 배우의 예술이라면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작가들이 얼마나 기민하게 트렌드에 반응하느냐에 따라 드라마의 성패가 판가름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최근 팬엔터테인먼트의 신작이 또 한 번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다. SBS에서 방영 중인 ‘닥터스’다.

‘닥터스’의 원래 제목은 ‘여깡패 혜정’이었다. 1회에서 주인공 혜정(박신혜)은 응급실에 출몰한 조폭들을 이종격투기 기술인 하이킥과 덤블링으로 제압한다. 한때 어둠의 세계에 있다가 총명한 머리로 의사가 된 혜정의 이력을 한 방에 설명해 주는 장면이다. 수술실에서는 실력 있는 의사, 수술실 밖에서는 칼을 든 괴한과의 격투도 불사하는 혜정은 남자 주인공 김래원과 첫 대면에서도 그를 업어치기로 맞이한다. 김영섭 SBS 드라마본부장은 시청률 20%를 기록한 ‘닥터스’의 인기 비결로 “여주인공이 유약하고 순진한 캐릭터가 아니라 최근의 ‘걸크러시’의 매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드라마에 불어온 걸크러시

로맨스 드라마는 판타지가 원천이다. 단 현실의 기반 위에 쌓아올린 판타지다. 트렌드를 읽어내지 못하는 드라마는 실패한 드라마다. 내 삶과 닮아 있으면서도 내 삶에 채우지 못한 욕구를 건드릴 때 드라마는 존재의 이유를 갖는다.

2016년 여름 한국 드라마에는 신데렐라가 사라졌다. 2010년만 해도 반지하 쪽방에 사는 스턴트우먼 길라임(하지원)과 집 안에 호수가 있는 백만장자 김주원(현빈)이 사랑에 빠지는 ‘시크릿 가든’이 시청률 35%를 찍었다. 3년 뒤인 2013년에는 가사도우미의 딸 차은상(박신혜)과 집주인인 재벌 2세 김탄(이민호)의 사랑 이야기 ‘상속자들’이 25%의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이 두 작품은 모두 김은숙 작가의 작품이다. 그는 ‘파리의 연인’ ‘프라하의 연인’ ‘온에어’ ‘신사의 품격’ 등의 드라마를 연달아 흥행시켰다. 판타지와 로맨스 두 마리 토끼를 가장 잘 잡는 ‘흥행 끝판왕’이기도 하다.

전작의 명성을 뛰어넘어 하나의 신드롬이 된 김은숙 작가의 최근작이 ‘태양의 후예’다. 그런데 불과 3년 만에 이 드라마에서는 재벌이 사라졌다. 아니 곁길로 빠졌다. 여자 주인공 모연(송혜교)을 괴롭히는 비호감 이사장이 기존의 재벌 2세 역할을 대신했다. 최근 몇 년 새 재벌 1, 2, 3세의 갑질이 연일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면서 이들에 대한 선망은 냉소로 바뀌었다. 김은숙 작가는 이런 시대의 흐름을 빠르게 간파했다. 남자 주인공은 재벌이 아닌 군인이 됐다. 이보다 더 눈에 띌 만한 변화는 여자 주인공의 역할이다. 극 중에서 상대의 선택을 받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는 건 남자 쪽이다. 전도유망한 외과 전문의, 해성병원의 간판 의사로 나오는 모연은 현실적인 미래와 불확실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극 중에서 급박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상황을 파악하고 응급처치로 사람을 살리는 건 모연이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가는 여성은 사극에도 등장한다. MBC에서 방영 중인 ‘옥중화’에서 여주인공 옥녀(진세연)는 뛰어난 무술을 선보인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복수를 위해 무술을 배운 그는 남자 주인공의 조력 없이도 적을 무찌르고 자신을 보호한다. 이는 결혼 이후 경력이 단절되었던 여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tvN에서 방영 중인 ‘굿와이프’는 남편의 스캔들 이후 변호사로 복귀한 김혜경(전도연)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잘나가는 남편 내조에만 힘썼던 가정주부에서 승소율 높은 신참 변호사로 변신 중이다. 언젠가 남자 주인공이 자신에게 신겨 주었던 유리구두를 벗고 맨발로 세상에 나가고 있는 모양새다.

로맨스가 아닌 롤모델

문화평론가 정덕현은 “이제 드라마에서 시청자가 원하는 여자 주인공의 모습이 달라졌다. 누군가에 의해 신분이 상승하는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가는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이제 시청자가 감정을 이입하고 싶은 대상은 로맨스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롤모델로 삼을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아예 로맨스가 부차적인 스토리가 되거나 사라진 드라마도 많다. SBS에서 방영 중인 ‘원티드’에서 여자 주인공 정혜인(김아중)은 납치된 아들을 구하기 위해 온 몸을 던진다. 남자 주인공 차승인(지현우)은 이 미션의 조력자다. 앞서 호평 속에 막을 내린 tvN의 ‘시그널’에서도 주인공 차수현(김혜수)은 믿음직한 형사이자 존경할 만한 선배로 등장한다. 이재한(조진웅) 형사나 프로파일러 박해영(이제훈)과의 희미한 러브라인은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런 움직임은 할리우드에서도 포착된다. ‘원더우먼’을 촬영 중인 배우 갤 가돗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자 아이들에게는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등 좋은 수퍼히어로 롤모델이 있는데 여자 아이들, 가깝게는 내 딸에게는 이런 인물이 없다. 아이들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등장한 연약한 공주에 대해서는 ‘공주는 잠만 자고 하는 게 없다’고 한다”며 “‘원더우먼’을 통해 강하고, 활동적이고, 열정적이며, 긍정적인 롤모델이 되어주고 싶다”고 했다.

카메라 안팎에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깨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자신의 운명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현실의 여성들 역시 이제 누군가가 지켜주는 삶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이제 드라마에서 ‘공주는 왕자를 만나게 될까’라는 질문은 힘이 없다. 현실에서도 자신의 안위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 이종격투기 정도는 할 줄 알아야 응급수술을 무사히 완료할 수 있다. 로맨스가 사라진 2016년의 한국. 드라마가 비춘 ‘웃픈’ 현실이다.

키워드

#방송
유슬기 톱클래스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