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밥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정찬(正餐). 굳이 한정식집이 아니라도 어릴 적 할아버지, 아버지의 밥상에 끼여 앉으면 거긴 불고기든 돼지고기볶음이든 고기에 조기나 고등어 같은 생선, 정갈한 나물반찬에 부침, 김구이, 찌개와 국, 김치도 물김치까지 차려지니 어지간한 크기의 밥상은 빈틈이 없을 정도였다. 다른 하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안 계실 때 차려지는 국이나 탕이 중심이 되는 소박한 밥상이다.

맏이라는 특권(?)으로 언제나 정찬 밥상에 앉기는 했지만 사실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밥풀 하나라도 흘리면 매번 쌀 한 톨의 귀함을 말씀하시는데 왜 그리도 칠칠치 못하게 수시로 밥풀을 흘렸는지. 그렇다고 좋아하는 반찬에 마구 젓가락을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귀하고 좋은 것은 어른이 먼저라는 가르침이 귀에 박혔으니. 물론 아주 못 먹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대는 우대였지만 어린 마음에도 편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가끔 밥에 따라 나오는 국이 아니라 탕이 중심이 되는 날은 아주 편했다. 육개장이든 곰탕이든 밥 한 그릇 말아 뚝딱 해치우면 흘리는 것 말고는 따로 조심할 건 없었으니.

우리 집에서는 특히 닭개장을 자주 끓였다. 장날이면 나오는 시골 마당에서 풀어 기른 토종닭 한 마리를 푹 삶아 건져내 식힌 다음, 잘 익은 살점을 손으로 가늘게 찢어 엄청난(?) 양의 파, 부추와 함께 마늘, 고춧가루 등의 양념으로 잘 비빈 뒤 닭 삶은 물에 넣고 다시 끓인 것이다. 토종닭이 아무리 커도 한 마리로 예닐곱 명의 식구가 제대로 맛보기는 어려우니 파와 부추 같은 야채를 듬뿍 넣었을 것이다. 두 분 어른의 그릇에는 뽀얀 고깃살이 훨씬 많이 담긴 것도 한눈에 알 수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같은 국물에 살점이 섞인 야채는 고기의 질감과 맛이었으니. 희한한 일이었다. 그때는 김치나 나물무침 같은 것에 섞인 파는 참 싫었는데 닭개장 속의 파는 꿀맛이었으니.

고향집을 떠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유학생 처지에 주머니는 항상 비어 있었으니 입맛을 찾아 먹을 처지가 아니기도 했지만 그때 서울에는 통닭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다. 요즘 같은 브랜드 체인점은 없었지만 어지간히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두어 개는 꼭 있었으니 고소한 기름 냄새가 흔했다. 그림에 떡 같은 구워지는 통닭 냄새를 맡으며 닭개장은 천천히 잊혀갔다.

직장생활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매식(買食)이 많아졌다. 간단한 탕 한 그릇은 주로 점심이고, 저녁이면 술잔이 도는 식사였다. 때로 그럴듯한 한정식집을 가면 이게 집밥인가, 고향 밥상인가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예 나라 밖에 거점을 두는 생활을 하게 되자 더욱 달라졌다. 곁들임 반찬은 우리만의 문화이고 대부분 단품 주문이니 가끔 귀국해 여러 반찬이 차려지는 식당에 가면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부담스럽기까지 해 특히 코스로 나오지 않는 한정식집은 피했다. 그래도 바뀌지 않은 하나는 있었다.

중국에 오래 머무는 동안에는 식당에 가면 하다못해 ‘시홍스지단탕(西红柿鸡蛋汤)’이라도 시켰다. 토마토를 끓여 계란을 푼 ‘토마토계란탕’인데 건강에는 좋다지만 아무리 잘 끓여도 기본적으로 밍밍한 맛인지라 숟가락이 잘 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꼭 주문하는 것은 국이 없으면 밥상이 아닌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두 해가 지나니 이제는 한상차림도 썩 부담스럽지는 않다. 그렇지만 건강을 생각해 피하는 음식이 많아지니 갈 만한 식당은 점점 찾기 어렵다. 솔직히 구이, 회, 탕이 대부분인 먹거리문화에서 특별히 관심 가는 음식도 없고, 맛집이라고 소문 요란한 식당도 회가 동할 맛은 아니었다.

누가 뭘 먹자고 해도 ‘아무거나’가 답이 되니 삶이 시들해지는 것인가 하던 지난해 어느 날, 경북 포항에서 차를 타고 가는데 ‘닭개장’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비싼 걸 ‘쏘겠다’는 일행에게 그 집을 가리켜 함께 들어갔다. 하도 오랜만에 보고 생각난 음식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딱 우리 집 닭개장 맛이었다. 고기는 쫄깃하고 파와 부추가 듬뿍 든, 얼큰하고 칼칼한 국물까지…. 가슴 뭉클하고 추억에 행복했는데 건강식이기도 하다. 그 뒤로도 몇 차례 더 가다가 얼마 전 한참 만에 그 집을 다시 찾았더니 세상에! 없어졌다. 다행히 ‘소울푸드’ 청탁을 받고 포항 사람에게 물었더니 가까운 곳으로 이전한 거란다. 글이 실리면 주간조선을 들고 찾아가야겠다. ‘알천닭개장’이다.

내게는 닭과 관련한 또 다른 추억이 하나 더 있다. 닭개장을 끓이거나 제사 등의 일로 닭을 잡는 날에는 반드시 등장하던 특별한 사람. 술로 인한 간경화로 서른을 조금 넘어 세상을 버린 외삼촌이다. 희한하게도 닭발을 좋아했다. 그때는 대부분 먹지 않던 닭발을 모두 챙겨 껍질을 벗긴 뒤 연탄불 위에 석쇠로 구워 소금을 양념으로 소주병을 비우셨는데 언제나 나를 불렀다. 외가를 포함해 우리 가족 중에 누구도 안 먹었고 여자들은 징그럽다며 눈총을 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난 외삼촌을 따라서 먹었고 맛있어 했으니 그 자리에서만은 술동무로 여겼던 것인가 싶다. 물론 초등학생인 내게 술잔을 건네지는 않았지만 그 때문에 성인이 되어 술꾼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책임을 물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외삼촌보다 20년 이상을 더 살고 있는 난 훨씬 많은 소주병을 비웠을 테니…. 게다가 대부분 매운맛으로 진화해 그때의 맛은 아니지만 소주 안주로 닭발을 손꼽기도 한다. ‘알천닭개장’에 맵지 않은 닭발이 있으면 소주도 한잔 해야겠다.

김정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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