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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496호] 2018.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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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한 퇴직자의 히말라야 트레킹

“폭풍 설산이 가르쳐준 것, 인생은 늘 시작이다”

네팔 한필석  전 월간산 편집장  / 사진 서기석  유라시아트렉 대표  

▲ 새로운 산을 바라본다는 것은 즐거움이자 새로운 꿈을 갖는 시간이다. 트레킹 마지막 날, 안나푸르나 산군의 설봉들을 바라보며 쉬고 있다.
정년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다. 정년을 앞두면 가까운 이들로부터 “퇴직 후 무슨 일 할 거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하지만 퇴직 후를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28년째 등산잡지를 만들고 지난 연말 퇴사한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퇴직 전 1년은 ‘정년 후 단기계약’이란 불안한 환경에서 지낸 지라 당연히 퇴직 후를 준비했어야 했건만 한 매체의 살림을 도맡은 위치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똥을 끄며 지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예견했던 일이었음에도 ‘재계약 불가’ 통고를 받았을 때는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나?’ ‘가족 부양은 어떻게?’ 등의 고민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래도 퇴사 날짜가 다가오자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됐다. 책상 정리를 위해 마지막 주말 텅 빈 사무실에 출근했을 때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모든 게 고마웠다. ‘나 혼자 이룬 건 하나도 없구나’ 싶었다. 다 좋은 사람들, 좋은 선후배 덕분에 정년 후 1년을 더 근무하는 ‘천수의 복’을 누렸구나 싶었다.
   
   지난해 11월 중순쯤 오랜 산악인 후배인 김창호 대장(히말라야 14좌 무산소 완등자)이 1월 초부터 20일 동안 네팔 히말라야 구르자히말~다울라기리 트레킹을 함께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연말에 그만두면 동행할 수 있다”고 대답했는데 예측대로 퇴사가 결정되면서 트레킹 동반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가겠다”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1월 1일부터 백수인데…’라는 걱정과 ‘평생 처음 맞는 휴식기간인데…’라는 생각이 맞부딪쳤다. 히말라야 등반을 위해 휴직도 불사했던 나였는데 퇴사한다고 이렇게 약해지다니…. 출발 10여일 남겨놓고 결국 가기로 결정했다. ‘20일 동안 히말라야에서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자’며 길을 나섰다.
   
   시작은 기대만큼 즐겁지 않았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트레킹 기점까지 가기 위해 이틀간 이용한 버스의 스피커에서는 인도풍 음악이 잠시도 쉬지 않고 꽝꽝댔다. 음악이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 뿐만 아니라 버스 바닥에서 올라오는 흙먼지는 마스크를 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만큼 풀풀 날렸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는 디스코텍처럼 쿵쾅거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든 상황이 즐겁게 받아들여졌다. 창밖으로 흰 산이 보이자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고, 안나푸르나 산군이 배경을 이룬 ‘호수의 도시’ 포카라를 지나칠 즈음부터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장단을 맞춰가며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툭툭 쳐댔다. 한동안 잊어먹었던 원초적 본능, 산꾼 본능이 되살아난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버스는 시간당 10㎞ 남짓한 속도로 비포장도로를 달려 카트만두 출발 이틀째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해발 2800m 높이의 티베트 난민촌 도르파탄(Dhorpatan)에 올라섰다. 그런데 그 순간 거짓말처럼 고장이 났다. 버스가 멈춰선 곳은 동서 4㎞, 남북 12㎞ 넓이의 고원. 민가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만 보일 뿐 동서남북도 가늠되지 않았다. 하지만 버스기사와 조수들, 심지어 포터들까지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다. 우리만 불안해했다.
   
   트레킹 초반 현지인들이 짊어진 짐 무게가 적게는 30㎏, 많게는 50㎏이 넘었다. 키 150㎝ 안팎의 ‘디디(현지어로 젊은 여자)’들은 무거운 등짐으로 허리가 앞으로 굽어졌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런데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미소는 더욱 환해졌다. 우리한테 농담도 했고, 기념촬영 하자고 잡아끌기도 했다.
   
   이들을 보며 ‘나는 왜 저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지내지 못했나’ 후회스러웠다. 저들에 비하면 호의호식하며 훨씬 나은 환경에서 살았는데 뭐가 그리 힘들다고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지내왔는지 갑자기 이해가 되질 않았다. 회사 동료, 선후배들에게 좋은 미소와 마음으로 좋은 기운을 전해주지 못하고 직장생활을 끝낸 게 부끄러워졌다.
   
▲ 가이드 치링 보테(오른쪽)와 함께. 한국 히말라야 등반가들에게 잘 알려진 요리사이다.

▲ 거친 퇴석빙하를 거슬러 오르는 다울라기리 서킷. 다울라기리 2봉 일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트레킹 4일째, 다울라 콜라(Dhaula Khola) 협곡 산사면에 자리한 아르체(Low Arche·1820m) 마을 외딴집에서 자던 중 꿈을 연달아 꾸었다. 버스 뒷자리에 쌓여 있는 스위스 화폐를 마구 주워 담는가 하면, 세상 떠난 지 2년이 지난 어머니와 귀인이 나타나 환한 웃음을 지어주기도 했다. 군대 다녀온 남자라면 누구나 평생 세 번은 군에 다시 입대하는 꿈을 꾼다고 하는데, 그에 버금가는 꿈도 꿨다. “어! 가야 하는데요, 비행기 표도 벌써 끊어놓았는데….” “이 사람이 제정신이야! 조선일보가 어떤 회사인지 아직도 모르는 거야!” 20년 전 예순 나이에 세상을 떠난 옛 부서장께서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꿈에 나타나 알프스 몽블랑 가겠다는 필자에게 “절대 안 된다”고 소리쳤다. 재입대하는 꿈을 꾼 지도 이미 오래인데, 신출내기 기자 시절로 되돌아가는 꿈을 꾸다니….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새카만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도시에선 보기 힘든 은하수가 그야말로 은빛 물줄기로 흘러가는 듯했다.
   
   다울라 콜라를 빠져나와 다울라기리 서킷(circuit) 구간에 접어든 이후 고도를 높일수록 점점 힘들어졌다. 해발 3000m를 넘어서면서 일행을 뒤쫓아가는 게 힘들 정도였다. 한 시간쯤 걷다보면 앞서간 세 사람은 체온유지를 위해 두툼한 우모재킷을 입고 한참 동안 기다리곤 했다.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무산소 완등 김창호 대장을 비롯, 대한민국 최고 산악인들과 함께하는 트레킹이긴 해도 30년 가까이 해온 히말라야 트레킹 가운데 이렇게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
   
   다울라기리 베이스캠프(4750m)를 출발한 날은 최악이었다. 이날 프렌치패스(5360m) 너머 거대한 분지를 이룬 히든밸리 캠프(5140m)에서 야영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두 달 넘게 지속된 가뭄에 계곡물이 말라붙어 담푸스패스(5244m)를 넘어 담푸스 베이스캠프(5000m)까지 내려서야 했다.
   
   그래도 남미 아콩카구아(6959m), 북미 데날리(6194m),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895m), 유럽 엘브루즈(5642m) 등 4개 대륙 최고봉을 올랐고 에베레스트도 발코니(8500m)까지 등반한 나인데…. 게으름의 대가였다. 헬스장에서 틈틈이 운동한다고 했지만 시간 없다는 핑계로 적당히 했고, 일 스트레스 등등 수많은 핑계를 동원해가며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다울라기리 베이스캠프에서는 도착하는 순간부터 바람이 모질게 불어댔다. 텐트가 휘청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조리팀은 저녁 취사를 마무리한 뒤 바람이 더 거세지자 취사용 대형텐트를 아예 접고 취사도구와 함께 커다란 돌멩이로 눌러놓았다.
   
   바람소리는 다울라기리조차도 무너뜨릴 것처럼 거칠었다. 그렇게 바람이 모질게 불어대는데도 모두 코를 곯아가며 잘 잤다. 특히 김창호 대장은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자는 모습이었다. 고산 등반 잘하려면 잠도 잘 자야 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필자는 바람 불어오는 쪽에 누워 있다 보니 텐트 천이 툭하면 얼굴로 쏠렸고 그럴 때마다 몸을 뒤척였다. 플라이가 심하게 펄럭이면 이러다 텐트가 찢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됐다. 밖으로 나가 벗겨진 플라이를 돌멩이로 누르고 다시 텐트 안으로 들어왔으나 상황이 점점 나빠졌다. 폴이 바람에 휘면서 내 몸을 짓눌러댈 때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김 대장을 깨웠다. 우리도 우리지만 포터들이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포터들 역시 텐트 플라이가 바람에 벗겨져 나갔는데도 서로 딱 달라붙어서 잘 자고 있었다.
   
   똑같은 강도의 바람이 불어대는데 나만 못 자고 있었다. ‘상황은 같아도 반응은 사람 따라 다르구나’ 싶었다. ‘그랬구나. 바람을 그대로 맞고 지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늘 긴장하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살았구나. 그래서 그렇게 찌푸린 표정으로 지냈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내 스스로가 안쓰러워졌다. 한편으론 ‘그래도 잘 견뎌냈구나’ 싶어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그래 너 열심히 살았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즈음부터 다울라기리 1봉(Dhaulagari Ⅰ·8172m)이 눈에 꽉 찼다. 김창호 대장이 자신이 등반한 루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할 때는 대단하다 싶고 한편 부러웠다.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프렌치패스를 올라설 때는 투크체봉(Tukuche West·6848m)이 힘겨워하는 필자를 내내 길동무해 주었다. 담푸스패스에 올라서자 이번에는 안나푸르나 산군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가슴 벅차게 했다. 투크체봉은 새롭고 거대한 풍광으로 압도해왔다. 담푸스 베이스캠프에서 석양에 물든 안나푸르나 산군을 바라볼 때는 눈이 젖어들 만큼 감동 그 자체였다.
   
▲ 아르체 마을을 걸어가는 디디들. 남자 포터들 뒤로 구르자히말~캄본히말 남벽이 우뚝 솟아 있다.

▲ 구르마 마을의 주민들. 소녀들은 산 아래 큰 마을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방학 때면 고향에 올라와 지낸다.

   어린 시절부터 산을 즐겨 찾은 것은 오로지 내 두 다리로 땀 흘리며 걷는 행위와 모험을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산 너머 ‘숨은 그림’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는 즐거움을 느끼고자 함이 컸다. 언제나 산을 넘어서면 새로운 풍광이 반겨주고 그 풍광은 새로운 꿈을 심어주곤 했다.
   
   이튿날 담푸스 베이스캠프를 출발, 산허리를 돌고 돌아 4100m 높이 능선 어깻죽지에 올라서자 안나푸르나 산군 왼쪽(북쪽)으로 무스탕과 돌포 일대가 보였다. 처음 보는 풍광이었다. 나무도 눈도 없는 삭막하고 황량한 산릉은 겹을 이룬 채 잔잔하게 파도 치고 있었다. 저곳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졌다. 히말라야에 새 목표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열흘간의 도보 트레킹을 마치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마르파(Marpha· 2670m)에 도착했다. 벽돌 모양 돌멩이를 켜켜이 쌓아올려 만든 가옥들이 골목 양쪽에 줄지어 있는 마을이었다. 관광 시즌이 아니라 동네는 썰렁했고, 주민 대부분이 노인이었다. 노인들은 늦은 오후 햇살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려는 듯 양지 바른 곳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네 겨울철 시골 풍광과 별 차이 없었다. 그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관계없이 포터들 표정이 환해졌다. 고된 여정을 끝낸 뒤 오는 편안함이었다.
   
   그날 묵은 로지 식당에서 감사파티를 열었다. 양고기 수육에 마르파 특산 사과로 만든 브랜디를 마셨다. 맥주를 건넬 때는 ‘못 마신다’며 손을 젓던 젊은 현지인들도 어느 순간 얼굴빛이 불콰해지자 말수도 늘어나고 노래를 읊조리는 이들도 보였다. 네팔 민요 ‘레삼피리리’를 요청하자 몇몇 디디들은 노래에 맞춰 춤 솜씨를 발휘했다. 필자 역시 함께 리듬을 타고 싶은 마음에 그들 옆에 다가섰지만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몸으론 어림없었다. 그래도 신났다. 이 얼마나 오랜만의 여흥인가.
   
   그동안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자 다짐하고 살아왔지만 이제 그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어떤 일이든 일희일비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작은 일에 감사하고 작은 일에 즐거워하고, 함께 길을 걷는 사람의 작은 슬픔에 같이 슬퍼해주고 아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인간답게 사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100세 시대에 내가 살아온 삶은 60%에도 못 미친다. 인생은 늘 시작이었다. 태어날 때 시작이었고 초·중·고와 대학 졸업 또한 매번 시작이었다. 하산 역시 새로운 산을 오르는 시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정년 역시 새로운 시작이다.
   
   이번 여행 교통비를 아끼겠다고 직항 대신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 비행기를 바꿔 타는 저가 외국 항공기를 이용했다. 귀국 날,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청두국제공항 6번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다가 활주로 이동용 버스를 탔다. 버스가 1분이나 달렸을까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주머니 속에 스마트폰이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지난 여름 아들과 함께한 알프스 트레킹, 그리고 이번 20일간의 구르자히말~다울라기리 트레킹 기록이 몽땅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직장생활 하며 인연 맺은 1200여명의 전화번호마저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면서 거의 패닉 상태에 이르렀다.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승무원에게 스마트폰 분실 사실을 알리며 찾을 길이 없나 하소연했다. 공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항공사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깜빡 잠들었다 깨어났다. 머리가 개운해졌다. ‘이 또한 무(無)에서 시작하라는 누군가의 계시다. 그래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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