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
[2498호] 2018.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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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평생 한 사람에 미친다는 것

김수영 25년 연구 이영준
김유정 36년 사랑 전상국

하주희  기자  

▲ 이영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학장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생강나무 가지에 봄이 웅크리고 있었다. 3월 6일,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을 찾은 참이었다. 실레는 ‘시루’의 강원도 사투리다. 금병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마을의 모양이 꼭 떡시루 같다며 붙인 이름이다. 이곳에 김유정문학촌이 있다. ‘봄·봄’을 쓴 소설가 김유정(金裕貞·1908~1937)이다. 생가와 김유정이야기집, 기념전시관을 갖췄다. 실레마을은 1908년 김유정이 태어난 곳이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중퇴한 뒤 ‘금병의숙’을 설립해 농촌계몽활동을 펼친 곳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김유정이 태어난 지 110주년이 되는 해다. 생가 담벼락을 따라 생강나무가 자라고 있다. 잎이 움트기 전에 샛노란 꽃을 피우는 나무다. “김유정의 소설 속 동백꽃이 바로 생강나무 꽃이다.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이라 불렀다.” 소설가 전상국 강원대 명예교수가 말했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 마지막 장면에서 ‘나’와 점순이는 노랗고 알싸한 향을 풍기는 동백꽃 속으로 파묻힌다.
   
   전 교수는 김유정문학촌을 꾸리고 지금까지 촌장으로 있다. 2002년부터니 올해로 16년째다. 그 이전부터 금병산을 오가며 김유정 등산로를 만들었다. 작품의 실제 배경을 찾아다녔다. 전 교수가 김유정을 만난 건 1982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경희대 국문과 대학원 다닐 때였다. 황순원 선생이 지도교수셨다. 김유정을 한번 연구해 보라고 하시더라. 사실 그때까지 김유정과 그의 작품을 잘 몰랐다. 어떤 작가인가 보니, 나와 고향이 같은 데다 등단도 같은 곳(조선일보)에서 했더라. 소설을 읽었는데, 글쎄, 대단하더라. 이때부터다. 김유정에 미치기 시작한 게.”
   
   전 교수는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아베의 가족’ ‘우상의 눈물’ 같은 작품을 발표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했다. 대학원을 마치고 강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하면서는 소설작법 강의로 이름을 날렸다. 1991년에 낸 ‘당신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작가 지망생들 사이에서 필독서였다. 반년 만에 4쇄를 찍었다. 그런 그가 택한 게 김유정이다. 생각해 보면 흔한 경우는 아니다. 자신만의 입지를 쌓은 작가가 오롯이 다른 작가를 기리는 데 수십 년을 쏟는다는 게 말이다.
   
   이영준 경희대 교수가 시인 김수영(金洙暎·1921~1968)을 진지하게 마주 대한 것도 대학원에서였다. 이 교수는 지난 2월 김수영 전집을 새로 냈다. 김수영의 누이 김수명씨가 낸 2003년 판본의 크고 작은 오류들을 바로잡았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미발표 시와 미완성 시 초고를 더하며 김수영 작품을 총망라했다. 올해는 김수영 시인의 50주기이기도 하다. 이 교수를 지난 3월 5일 경희대에서 만났다. 그는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학장을 맡고 있다. “하버드로 유학을 떠났을 때다. 원래는 이광수, 루쉰,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들을 비교 연구해야겠다 결심한 참이었다. ‘세 작가를 나는 잘 모르니 다른 연구를 하면 어떤가.’ 지도교수의 제안이었다. 그렇게 김수영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 교수는 김수영 연구로 하버드 동아시아문명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민음사에서 책을 만들던 그가 미국으로 떠난 게 1997년이다. 20년 넘게 김수영의 작품을 읽어온 셈이다. 김유정과 김수영의 삶, 그리고 이들의 진면목을 알리는 데 진념해온 두 후학의 삶을 세 가지 키워드로 바라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명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첫 번째는 ‘투명한 시선’이다. 김유정은 농민들의 삶을 편견과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봤다. 강원도 산간마을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 때문에 김유정이 강원도에서 오래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가 실레마을에 머무른 건 1931년부터 1933년까지다. 늑막염을 고치려 형 김유근의 집에서 머물며 농민들과 부대꼈다. 2년여의 경험은 김유정의 작품세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만무방’이며 ‘들병이’를 만난 게 이때다. 만무방은 ‘염치가 없이 막된 사람’을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다. 들병이는 ‘병에 술을 가지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을 의미한다. 현실에서는 술뿐 아니라 몸도 같이 파는 여성을 두고 흔히 쓰는 말이다. 요즘으로 치면 ‘박카스 아줌마’다. 전 교수의 말이다. “김유정은 밑바닥 인생의 삶을 그들의 언어로 그렸다. 일제 수탈이나 계급 문제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상황만 그려줄 뿐 독자가 스스로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어느 공간, 어느 시대에도 가능한 얘기들이다. 그래서 해학이 가능한 거다. 작가가 개입해 해설하면 해학이 안 된다. 채만식은 달랐다. ‘지주’ ‘소작’ 같은 단어를 작품에 쓰지 않았나. 일제강점기 계급 갈등을 직접 표현했다. 프랑스에서 김유정의 소설이 출판됐을 때 ‘한국의 모파상’이라고 했다.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한 문장이라도 넣었으면 그런 평가를 못 받았을 거다.”
   
   이런 김유정을 기리자는 전 교수의 제안을 막상 실레마을 사람들이 기꺼워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부인이 매춘한 돈으로 먹고사는 남편, 남편의 노름 판돈을 구하기 위해 몸을 파는 아내, 딸과 결혼하게 해주겠다며 남의 집 아들을 착취하는 악당 등 김유정의 소설 속 인물들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김유정과 그의 집안에 대한 반감도 상당했다고 한다. 전 교수의 얘기다. “김유정역이 원래 신남역이었다. 신남은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굳이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인제군에 있는 신남과 혼동되는 등 문제가 있었다. 김유정역으로 바꾸자고 했더니 마을 사람들이 들고일어났다. 청와대에 청원까지 넣었다. 폐병쟁이에 총각귀신인 자의 이름을 마을 역명으로 하면 안 된다는 거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애원했다. 무릎까지 꿇었다. 지금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사람 이름이 붙은 역으로 유명해지지 않았나. 김유정역 사례를 보고 다른 지역에서도 역명을 바꾸겠다고 잇따라 나설 정도였다. 역명 교체가 돈이 많이 든다더라. 철도공사에서 김유정역 이후 더 이상 같은 이유의 개명 신청을 안 받기로 정했다. 이젠 면 이름을 김유정면으로 바꾸려고 하는데 아직도 반대가 많다.”
   
   김유정 집안은 춘천의 유지였다. 서울에 백 칸짜리 집을 마련해놓을 정도였다. 김유정의 어린 시절, 부모가 잇따라 사망하면서 몰락이 시작된다. 장남 김유근은 서울에서 가산을 탕진하다 실레마을로 귀향해 술과 기행으로 남은 가산을 도륙했다. 전 교수는 “생가를 복원하는데 옹기 조각이 수북이 나오더라”고 말했다. “이게 뭘까 싶었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얘기해주더라. 김유근이 집에 앉아 있다 옹기장수가 지나가면 불러서 옹기를 다 깨버리곤 대가로 논 문서를 줬다더라.”
   
   김수영의 현대성도 ‘투명한 시선’에서 온다. 이영준 교수의 말이다. “1950년대 잡지를 읽어 보면 글이 다 촌스럽다. 이상과 김수영만 예외다. 의식이 현대적이어서다. 천재라는 게 도대체 뭔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사심과 편견 없이 사물을 보려면 의지, 노력, 힘이 필요하다. 김수영 시는 신문 기사로 치면 스트레이트 기사다. 오해의 여지가 없다. 번역을 해보면 안다. 번역이 쉽다.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을 수 있는, 골격이 뚜렷한 문장이다. 사물을 보는 힘이 만든 문장이다.”
   
   가족들의 증언을 보면 김수영은 강박적으로 솔직함에 집착했다. ‘작품이 좋은 것보다 거짓말 안 하는 게 중요하다.’ 그가 일기에 쓴 말이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삶을 작품에 그대로 담았다. “김수영의 시 ‘성’을 고등학교 때 읽고 깜짝 놀랐다. 외도하고 온 후 부인과의 잠자리가 어땠는지 써놨다. 창녀와 잔 얘기를 시에 쓴 사람은 김수영이 유일하다. 사창가 출입이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냐는 건 별개의 논의로 하고, 다른 문인은 아무도 사창가에 안 갔을까. 거짓말하는 사람은 큰 문인이 될 수 없다.” 이 교수의 얘기다.
   
   
▲ 전상국 김유정문학촌 촌장 photo 김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봄봄’ 사이에 점을 찍다
   
   두 번째 키워드는 ‘점’이다. 김유정의 소설이 ‘봄봄’이 아닌 ‘봄·봄’이라고 교과서를 고쳐놓은 이가 바로 전 교수다. “문학작품은 기호들의 모임이다. 가운뎃점을 빼면 안 되는 이유다. 작가가 그 해석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은 거다. 유인순 강원대 교수는 점을 아래아로 봤다. 작품에 등장하는 ‘나’와 점순이의 관계가 대등하단 의미가 아닐까 얘기한 제자도 있었다. 등장인물이 점순이라서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중고등학생들에게 물어보면 각기 다른 해석을 한다. 생각할 거리를 주는 거다.”
   
   김유정은 언어를 다루는 것에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김유정은 한학을 했기에 한자를 잘 알았다. 작품 31편엔 한자를 한 글자도 안 썼다. 밑바닥 인생들의 얘기다. 그들이 한자를 어떻게 알았겠나. ‘산골 나그네’를 보면 낙엽을 ‘떨잎’이라 한다.” ‘뽀뽀’라는 구어를 처음 문자로 옮긴 것도 유정이다.
   
   김수영은 한국시의 전근대를 뒤로하고 근대의 문을 열었다. 이 교수는 ‘마침표’의 예를 들었다. “문장이 끝나면 점을 찍는다. 마침표는 근대의 발명품이자 인쇄문화의 폭력이다. 말할 때 중간중간 점을 찍는 사람이 있나. 조선시대 책을 보면 단락 구분도 없고 마침표도 없다. 이광수와 최남선 시대에 서양을 따라하면서 쓰기 시작했다. 그걸 깨보려 한 게 이상이다. 단어를 붙여 써보기도 했다. 이상 이후 실험적 시도가 없어졌다가 나타난 게 김수영이다. 김수영은 시에 마침표를 안 썼다.”
   
   어느 신문사가 그의 시를 실으면서 마침표를 붙여놨다. 김수영은 시가 실린 지면을 오려내 일일이 모든 마침표에 삭제 표시를 해놨다. 마침표와의 전쟁이다. 이 교수가 이번 개정판에서 마침표를 뺀 이유다. “지금은 한국 시단에서 아무도 마침표를 안 쓴다. 외국에선 시에도 붙인다. ‘왜 마침표를 안 쓰나.’ 한국 시인들에게 물었다. 이유를 모르더라. 왜 연으로 구분하는지, 단락을 왜 바꾸는지 이유를 모르고 하면 안 된다. 서양 문법엔 이유가 있다. 리듬과 논리 구조에 맞춰 정교하게 단락을 바꾸고 문장을 배열한다.”
   
   이 교수는 김수영이 한국 시어의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했다. “일상어가 시어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거대한 뿌리’에 ‘개좆이다’라는 말이 있다. 시 속에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어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했단 얘기다.”
   
   시인은 시어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도 바꿨다고 한다. “정지용과 서정주의 시를 읽으면 우리의 산하를 아름답게 보게 된다. 김수영의 시세계는 다르다. 진실성이 미의 기준이 된다.”
   
   
   문학도 삶도 축적이다
   
   세 번째 키워드는 ‘축적’이다. 몰락한 양반의 자손 중에 좋은 작가가 난다는 말이 있다. 김수영의 집안은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 넓은 토지를 소유해 해마다 쌀 400여석을 거둬들이는 부잣집이었다. 김유정처럼 김수영도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며 집안의 몰락을 목격한다. 망한 후에도 김수영은 어떻게 해서든 책을 구해 읽었다. 이 교수의 말이다. “시인은 하이데거 전집과 프로이트, 소쉬르, 레비 스트로스를 읽었다. 제임스 볼드윈의 책을 번역하며 신식민지 이론을 논했다. 한국에는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이론이다. ‘엔카운터’ ‘파르티잔 리뷰’ ‘애틀랜틱 먼슬리’처럼 미국 뉴욕에서 1급 지식인들이 읽는 잡지를 구독했다. 그 시대에 서울에서 그 잡지들을 구독하는 사람은 아마 김수영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최상층의 독서를 했단 얘기다. 전 세계 톱 레벨의 시인들과 격투를 벌였다. 지금도 그를 따라갈 문인이 있을까.”
   
   김유정은 폐결핵에 시달리며 문학으로 전 세계를 누볐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톨스토이의 ‘부활’, 에밀 졸라의 ‘나나’ 등은 김유정이 꼽은 애독서다. 조카에겐 도스토옙스키와 나쓰메 소세키, 바이런, 루쉰의 작품을 읽으라고 권했다. 병석에서도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스물아홉으로 생을 마치기 전에 서른한 편의 소설을 쓰고 번역서까지 낼 수 있었던 이유다.
   
   김유정과 김수영을 수십 년 기리고 연구해온 두 사람의 삶도 결국 ‘축적’이다. 전 교수는 김유정의 주변을 샅샅이 추적했다. 누이들을 만나고, 한때 김유정이 짝사랑했던 여인의 삶도 추적했다. 남북작가회의 때문에 북한을 찾아서는 “김유정의 유품이 혹시 없냐”고 수소문도 했다. “삼촌의 유고를 월북한 안회남이 가져갔다”는 김유정의 조카 김영수씨의 증언 때문이다. 북한 작가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축적한 결과물이 유품 하나 없는 작가의 기념관이다. 주변인과 후세인들의 기억으로 채워진 전시실이 의외로 꽤 흥미롭다.
   
   이영준 교수는 “계속 김수영을 연구한다”고 했다. “그의 시집을 백 번 정도 읽었다. 이제야 느낌이 좀 그려진다. 흔히 ‘김수영은 참여시인’이란 식으로 이해한다. 참여시는 전체 작품 중 5분의 1도 안 된다. 시 ‘풀’을 참여시가 아닌 초월적인 관찰이라고 보는 이유다. 풀이 눕는 건 안식, 그러므로 삶의 희열을 그린 게 아닐까. 깊은 정신은 1000년을 살아남는다. 김수영은 우리 문단이 생산한 최대 크기의 시인이었다. 우리는 김수영을 아직도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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