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曺國) 파동’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온전한 토론은 온데간데없고 극단적 주장과 선동만 난무한다. 이게 민주국가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세계 도처에서 민주주의의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집권을 계기로 미국의 민주주의를 우려하는 견해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2018)이다. 과거에는 민주주의가 폭력적 방식에 의해 ‘불법적으로’ 훼손되었다. 반면 오늘날에는 선출된 지도자의 손에서 ‘합법적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특히 그들은 트럼프가 민주주의를 해치는 극단주의자라고 비판한다.

어디서나 극단주의 선동가들의 등장이 민주주의 붕괴의 단초다. 그들은 대개 대중적 인기가 높은 아웃사이더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들이 정치권에 진입하기가 어려웠다. 간혹 ‘노회한’ 정치인들이 그들의 인기를 이용하기 위해 연합의 손을 내밀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그런 기회를 활용해 재빨리 권좌에 오르는 수완을 발휘했다. 무솔리니, 히틀러, 차베스 등이 대표적이다.

국민이 민주적 가치를 지지한다면 민주주의는 살아남는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 낙관론은 국민이 자신의 의지대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나 성립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예를 들어 1920년대에 독일 국민이 전체주의를 선호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극단주의 선동가의 등장을 막는 것은 정당, 특히 정치 엘리트 집단의 몫이다.

내각책임제에서 총리는 의회의 일원이자 다수당의 대표자다. 그는 정치집단의 내부 평가를 거친 인물이다. 반면 대통령중심제에서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한다. 그만큼 포퓰리즘 선동가의 등장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선거인단 제도라는 완충장치가 고안되었다. 거기서는 여론보다 당 지도부의 의중이 결정적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정당은 오랫동안 문지기(gatekeeper)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런 정치 행태가 밀실담합으로 비난받으며, 오늘날에는 선거인단 제도가 단순히 일반 득표를 전달하는 기계적 기능만 하게 되었다. 이런 개방적 환경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강화시켰지만 한편으로 정당의 문지기 기능을 약화시켰다. 이로 인해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거나 공허한 공약을 해도 잃을 게 없는 극단주의 선동가”가 손쉽게 등장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트럼프는 당적을 몇 차례 옮긴 극단주의 선동가다. 처음에는 공화당 지도부도 그를 외면했다. 하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분열을 획책하며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했다. 저자들은 공화당 지도부가 선거 승리보다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그런 인물을 거부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국에 그가 승리하자, 공화당 지도부도 차츰 그를 인정하고 말았다.

일단 선거를 통해 권좌에 앉은 극단주의 선동가는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축구 경기에 비유하자면, 심판을 매수하고 상대팀 주전의 출전을 방해하고, 또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규칙을 바꾼다. 트럼프 역시 독립적인 국가기관장들에게 충성을 강요하고 각종 행정명령을 남발한다. 아울러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규칙 변경을 시도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결코 완전한 제도가 아니다. 그것이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운영방식으로서 다양한 규범이 필요하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다. 상호관용이란, 경쟁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다. 그의 주장에 반대하거나 그것을 혐오할지언정 경쟁자의 선의를 믿는 자세다. 상대를 적대자로 여기는 순간, 민주주의는 곧 멈춰 서게 된다.

제도적 자제란, 헌법적 권한을 무조건 100%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권한의 행사를 절제하려는 태도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헌법에는 다선 금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3연임을 사양했다. 그 이후의 대통령들도 그의 절제에 거의 예외 없이 따랐다. 모든 권력주체들이 법에 규정된(또는 금지되지 않은) 권한을 ‘최대한’ 휘두른다면 민주주의는 대혼돈에 빠져든다.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제도적 자제는 필수이다.

미국에서 이런 규범들은 비교적 잘 지켜져왔다. 하지만 1990년대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의 강경노선이 이런 규범들을 무너뜨리고 공화당 강경파를 전면에 나서게 만들었다. 그들은 ‘불법이 아니면 무엇이든 한다’는 자세를 취했다. 특히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자, 그들은 오바마가 ‘진정한’ 미국인이 아니라고 비난하며 사사건건 극단적으로 대결했다. 그들에게 ‘진정한’ 미국인이란 개신교도 백인들뿐이다. 미국도 ‘그런’ 사람들만의 나라라는 것이다.

극단주의 선동가인 트럼프의 집권은 그런 파당적 흐름의 결정판이다. 그의 언행에서 상호관용이나 제도적 자제는 조금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FBI 등 독립적인 국가기관장들을 임의로 갈아치우고, 경쟁자와 반대자들에게 가혹한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또한 의도적으로 인종주의를 부추기고 서슴없이 분열을 통해 정치적 승리를 쟁취하려고 으르렁거린다.

앞으로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세 가지 운명적 변수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첫째로, 공화당 지도부의 태도다. 그들이 과연 트럼프에 동조할지 또는 그를 견제할지다. 둘째로, 여론의 향배다. 지지율이 높을수록 트럼프는 더 위험한 인물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쟁이나 대규모 테러 등의 돌출이다. 트럼프 시대에는 안보 위기가 민주주의의 더욱 큰 위험요소로 대두했다.

야당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저자들은 야당도 똑같은 자세로 맞선다면 설사 승리하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이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가 파괴된 마당에 정치적 승리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원칙과 규범의 준수를 권한다. 미셸 오바마의 연설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들이 낮게 가더라도 우리는 높게 가야 한다.(When they go low, we go high.)”

역사적으로 정치인들이 원칙에 입각해 희생적 선택을 한 경우가 간혹 있다. 최근의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도 극단주의자 르펜의 당선을 막기 위해 보수당이 이념을 뛰어넘어 중도좌파 마크롱을 지지했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당장의 승리보다 원칙에 충실하기란 쉽지 않다. 실제로 요즘 미국 민주당은 TV 토론에서 트럼프를 ‘깔아뭉갤’ 후보를 찾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주권이 국민들로부터 나온다 해도 민주주의를 수호할 책임은 일차적으로 정당과 정치 엘리트들에게 있다. 그들이 극단주의 선동가의 등장을 막고, 바람직한 규범을 가꿔나가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규범이 바로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다. 그런 규범이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쳐지면, 자연스럽게 극단주의자들만 득세하게 된다.

우리 민주주의는 제도로서는 손색이 없다. 하지만 운영방식으로서 규범이 취약하다. 최근의 인사청문회만 보더라도 야당과 여론이 아무리 반대해도 대통령은 ‘법대로’ 임명을 강행한다. 그런 대결 자세는 개별 제도를 넘어 민주주의 전반을 위협한다. 민주주의가 선출된 지도자의 손에서 ‘합법적으로’ 무너진다는 경고는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발등의 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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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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