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어느 유명 작가는 조국 전 장관을 옹호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문프(문재인 대통령)께서 함께할 사람으로 조국이 적임자라 하시니까. 나는 문프께 이 모든 권리를 양도해 드렸고 그분이 나보다 조국을 잘 아실 테니까.” 아무리 그 진의를 너그럽게 이해하려고 해도 섬뜩하다. 왜 그는 지도자에게 그토록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일까.

물론 권위에 대한 복종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직의 안정화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진화적 산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인간 사회는 복종 없이 온전히 유지되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극단화하면 결과는 늘 파멸적이었다. 나치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도자의 권위에 기꺼이 복종하려는 것일까.

이 어두운 심연을 심리학적 실험으로 명료하게 해부한 고전이 있다. 바로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Obedience to Authority·1974)이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이 너무 쉽게 권위에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파헤친 실험 보고서다. 이 실험에서 많은 사람은 실험 진행자의 요구에 따라 타인에 대한 가혹 행위를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이 실험은 아이히만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스라엘 당국이 끈질긴 추적 끝에 1960년 남미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 책임자 중 한 명인 아이히만을 비밀리에 붙잡아다가 이스라엘 법정에 세운 사건이다. 유명한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 재판을 참관하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을 써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본지 제2441호 참조)

사람들은 대부분 아이히만이 ‘악마적’ 인물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아렌트는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명령에 따른 평범한 인물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런 결론은 아이히만의 악마성을 믿었던 보통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물론 그도 결코 아이히만이 무죄라고 보지는 않았다. ‘아무 생각이 없는(thoughtless)’ 행동이 바로 그의 중대한 범죄라고 단정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사회나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성찰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평범한 사람들이 공식적인 권위자에게 복종하여 누구나 아이히만처럼 행동할까. 밀그램은 이 어두운 화두를 실증적 실험으로 검증해 보려고 했다. 그는 실험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대학생이 아니라, 인근의 일반 주민들을 실험에 참여시키기로 했다. 신문광고와 우편을 통해 모집한 실험 집단은 직업, 연령 등을 고려해 되도록 다양하게 구성했다.

실험은 3인 1조로 설계되었다. 그들은 실험진행자, 선생, 학생이다. 진행자와 학생은 미리 역할과 행동이 주어진 연기자들이고, 선생이 순수한 피험자(실험대상자)이다. 선생이 문제를 내서 학생이 틀리면, 의자에 묶여 있는 학생에게 전기자극을 보내는 버튼을 누르도록 했다. 계기판에는 15볼트부터 450볼트까지 15볼트 간격으로 30개의 버튼을 달았다.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선생은 전기자극을 한 계단씩 올리도록 했다. 자극이 높아질수록 학생은 더욱더 괴로운 비명을 지른다. 물론 이것은 연기다. 그런 강한 전기자극도 실제로는 없다. 진행자는 실험 과정을 관장하며, 선생이 머뭇거리면 계속하라고 지시한다. 이런 실험은 조건을 달리하며 다양하게 실행되어, 그 결과를 상호비교해 보도록 했다.

실험 1은 선생과 학생을 딴 방에 격리했다. 피험자가 반응하면 선생은 단지 빨간불로 그것을 알 뿐이다. 300볼트가 넘을수록 벽을 쾅쾅 치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도록 했다. 실험 2는 벽을 통해 학생의 음성이나 비명을 직접 들을 수 있다. 실험 3은 선생과 학생을 한 방에 배치했다. 선생은 학생의 소리뿐만 아니라, 모습까지 직접 접할 수 있다.

실험 4는 실험 3에 전기충격판이 추가되었다. 학생이 손을 거기에 얹어야 자극이 전달되는 것처럼 꾸몄다. 학생이 거부하면 선생이 직접 학생의 손을 거기에 올려 놓아야 한다. 각 실험마다 선생은 40명씩이다. 진행자와 학생은 미리 역할이 주어진 연기자가 계속 맡았다. 사전에 사람들은 선생들 대부분이 진행자의 ‘부적절한’ 지시를 거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실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학생의 비명과 거부에도 불구하고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최고전압에 이르기까지 실험을 완수한 사람들이 실험 1, 2, 3, 4에서 각각 65%, 62.5%, 40%, 30%에 달했다. 실험 3, 4처럼 극단적인 경우에도 30~40%가 실험을 완수했다. 물론 대부분이 긴장하고 갈등했지만, 그중 일부는 비교적 ‘흔들림 없이’ 실험을 마쳤다.

피험자(선생)들은 단순히 실험에 참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피험자들은 일단 실험실에 들어가서 진행자(공식적 권위자)의 지시와 요구에 따라 학생(희생자)에게 극도로 고통을 주는 일을 끝까지 완수했다. 도중에 실험을 중단한 사람들도 상당한 단계까지 진행하다가 그만두었다. 물론 예상대로 학생을 좀 더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또한 그에게 구체적인 행동을 가해야 할 때 실험 완수율은 현저히 떨어졌다.

이 프로젝트는 다양한 변형 실험을 병행했다. 그중에 특히 눈길을 끄는 실험이 있다. 거기서 마치 진행자 2명이 공동으로 실험을 관장하기로 했다가, 학생 역할자가 갑자기 불참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래서 진행자 1명이 급히 학생 역할을 맡았다. 실험 결과, 그가 한때 진행자였다는 점은 선생으로부터 아무 우대도 받지 못했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선생(연기자)을 2명 더 투입하여 한 사람은 문제를 내고 다른 사람은 정답을 확인하고 진짜 선생(피험자)은 전기 버튼을 누르게 했다. 그리고 연기자 두 명이 도중에 차례로 포기하자, 피험자의 포기율도 훨씬 높아졌다. 이처럼 다양한 조건에 따라 피험자 반응도 달라졌다. 이런 결과를 통해 우리는 현실에서 일어날 일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런 실험은 나치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상황만 다를 뿐, 공식적 권위자·가해자·피해자로 구성된 기본 구조는 동일하다고 역설한다. 이처럼 공식적으로 권위가 부여된 사람이 관리, 감독하는 조건에 처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자신의 양심을 내려놓고 권위자의 지시에 따르려는 ‘어두운’ 본성이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더구나 현실에서 과업은 흔히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실행된다. 이로 인해 각 개인이 맡은 일의 의미와 성격이 모호하게 흐려질 수 있다. 아이히만도 자신이 ‘직접’ 살인을 명령한 적도 없고 ‘직접’ 살인을 저지른 적도 없으며, ‘오로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아렌트는 그가 성실했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관료였다고 비판했다.

‘권위에 대한 복종’은 우리가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마침 전 세계적으로 권위주의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소련,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아무 생각 없는’ 진영 정치나 팬덤 정치의 격화는 심각한 문제다.

그런 어두운 흐름을 막으려면 사회나 타인을 돌아보는 ‘사려 깊은(thoughtful)’ 자세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아울러 그런 생각을 북돋아주는 사회적 여건 조성 또한 필요하다. 만약 이런 노력을 외면할 경우, 우리는 자칫 아이히만들이 활보하는 제국에서 살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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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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