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서해안 천수만 가운데 있는 섬 간월도의 간월암은 국내 최고의 달 감상 명소이다. ⓒphoto 박종인 조선일보 기자(왼쪽) 조용헌(오른쪽)
충청도 서해안 천수만 가운데 있는 섬 간월도의 간월암은 국내 최고의 달 감상 명소이다. ⓒphoto 박종인 조선일보 기자(왼쪽) 조용헌(오른쪽)

‘간월암(看月庵)에서 달을 보고 놀다.’

옛 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인생기견월당두(人生幾見月當頭)! 인생에서 몇 번이나 머리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볼 수 있단 말인가!

나이 60이 되니까 남은 인생을 생각하게 된다. 남은 인생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돈 버는 일? 돈은 벌고 싶다고 마음대로 벌리는 게 아니다. 이 세상에 돈 안 벌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다 팔자소관에 맡겨야 한다. 외국의 명승지 여행? 이것도 어느 정도는 했다. 공항에서 줄 서서 기다리고, 좁은 의자에서 장시간 비행기 타야만 하고, 낯선 외국 호텔에 가서 체크인하고 트렁크 끌고 다니는 것도 이제 피곤하다. 책을 쓰는 일? 책도 그동안 스물몇 권 썼다. 쓰면 쓰는 거고 안 써지면 안 쓰는 거다. 그렇다면 뭘 할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할 게 없다. 할 게 없으면 죽어야 하는가. 죽을 수는 없고 달 뜨는 거나 많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은 생애 동안 달을 많이 보다가 죽고 싶다.

달도 여러 가지다. 하늘에 뜨는 달이 있다. 천중월(天中月)이다. 언젠가 인도에서 밤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넓은 평원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하늘에 둥실 떠 있는 보름달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그 기억이 아련하다. 그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집들의 지붕 위로 티 없이 떠 있던 달이 나를 달래주었다. 산봉우리 위로 떠오르는 달도 좋다. 산중월(山中月)이다. 보름달이 앞산의 봉우리 위로 방긋 떠오를 때 보는 맛이 따로 있다. 보름날 저녁에는 전남 장성 축령산의 휴휴산방 마루에 앉아서 앞산에 떠오르는 달을 감상한다. 산중에 사는 재미는 달 보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달을 보면서 농월(弄月)도 하고 무월(撫月)도 한다. 달을 희롱하는 정자가 농월정(弄月亭)이고, 달을 애무하는 동네가 무월리(撫月里)다. 물속에 떠 있는 달이 수중월(水中月)이다. 하늘의 달이 물속에 비칠 때 이를 보는 것이 또 다른 묘미이다. 오죽했으면 이태백이 물속에서 일렁거리는 달을 건지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림자가 주는 묘용이다. 하늘의 달이 실체이고 물속의 달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지만, 때로는 이 그림자가 인간에게는 깊은 상상력을 제공한다. 드라마·영화의 화면발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다 그림자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은 이 그림자에서 희로애락을 느낀다.

충청도 서해안의 천수만 가운데 섬에 있는 암자가 수중월의 진수를 보여주는 간월암(看月庵)이다. 태안반도 남쪽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달을 보기에 좋은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저녁에 지는 석양을 보기에 좋은 지점이 해남의 미황사(美黃寺)라고 한다면, 달을 보기에 좋은 지점은 간월도의 간월암이다. 불교의 ‘관무량수경’이라는 경전에 보면 인간이 도를 닦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일몰관(日沒觀)을 추천한다. 저녁에 지는 석양을 많이 보면 욕심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분노도 줄어든다. 욕심을 떼는 데는 석양만 한 것이 없다. 석양도 바닷가에서 보는 것이 장엄하다. 낙조가 바다로 떨어지는 그 장엄함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 자체로 하나의 신비 체험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일몰관’과 함께 하나의 짝을 이루는 게 수중월이다. 물에 비치는 달을 보는 것이다. 이 수중월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지점이 간월암이 아닌가 싶다.

바다의 광활함과 호수의 잔잔함을 동시에

서해안의 천수만은 ‘만(灣)’으로 되어 있다. 바다의 광활함과 육지 호수의 잔잔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장소가 바로 천수만이다. 호수인가 싶으면 바다인 것이, 호수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다. 호수처럼 물이 잔잔해야만 월광이 거울처럼 비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물에 파도가 치면 월광이 흩어진다. 이 월광이 작은 호수에 비치는 것보다는 넓은 바다에 비칠 때 끝없는 자비심을 느낀다.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용서해 줄 것 같은 자비심은 광활함에서 나온다. 천수만(淺水灣). 물이 얕은 만이라는 뜻이다. 수심이 얕으니까 깊은 바다가 주는 공포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은 간척이 되어 방조제를 따라 자동차로 주차장까지 가서, 썰물일 때 모래밭을 100m쯤 걸어가면 간월암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방조제가 없었던 옛날에는 배를 타고 와야만 도달할 수 있는 암자였다. 바다 가운데의 조그만 섬 4~5개를 지나서 간월암에 올 수 있었다. 아마도 천 년 전부터 간월암은 달을 보기에 좋은 뷰포인트로 소문이 나 있었던 것 같다. 간월암 달력에 보니까 선인들이 남겨 놓은 감상평이 소개되어 있다.

‘금오(金鼇·큰 자라)가 외로운 한 봉우리를 이고 서 있고 위에는 간월암이 있어 경치가 절로 빼어나다.’(‘정재집’), ‘서해 섬 중에서 으뜸이고 달을 보기에 가장 좋기 때문에 간월도라고 부르는 것이다.’(‘정재집’), ‘가장 황홀한 것은 온 바다가 달빛을 받을 때 천척의 옥탑(간월암)이 거꾸로 잠기고 있다.’(‘간월암중수기’), ‘백 리의 둥근 호수가 넓게 하늘과 접하고 있다. 바다의 많은 섬 중에서 그 아름다움을 견줄 수 있는 것은 없다.’(‘정재집’)

이런 구절들은 간월암의 풍광에 감탄한 내용이다. ‘정재집’(定齋集·1702) ‘간월암중수기’(重修記·1898)는 모두 유가의 글이다. 유가적인 맥락에서는 문학적인 시상(詩想)을 토로하는 수가 많다. 문학에서 끝난다. 문학적으로 표현을 잘하기 때문에 독자가 많다. 불가적 맥락에 들어가면 내면세계의 마음공부로 초점이 모인다. 이게 어렵다. 불가에서는 내면세계로 의식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떻게 의식을 내면으로 집중한단 말인가.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다. 모든 생활환경이 의식을 밖으로 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눈, 귀, 코, 입, 혀, 생각이라는 6개의 감각기관이 모두 인간의 의식을 밖으로 향하도록 만든다. 정보가 들어오고 나간다는 것도 밖을 향하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한 비즈니스 행위가 모두 밖으로 의식을 날뛰게 만드는 과정이다. 독서를 하고, 휴대폰을 보고, 인터넷을 하는 것도 외부로 의식을 향하게 한다. 그런데 이걸 모두 뒤집어서 안으로 향하게 만든다. 이게 정말 어렵다. 그래서 도를 닦기 어려운 것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반문명적 요소가 있다.

고요함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결국엔 자기 마음이 중요하지만, 고요한 마음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 단계의 외부적 환경이 필요하다. 무대장치가 필요하다고나 할까.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는 환경이 필요하다. 바로 달빛이 바다나 호수에 비치는 환경이다. 달빛이 비치려면 우선 밤이 되어야 한다. 밤은 컴컴하다. 컴컴한 상황은 인간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밖이 보이지 않으니까 안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보름날 간월암에서 천수만 바닷물에 비치는 달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고요해진다. 도시에서는 고요함을 느낄 수 없다. 오직 벽으로 막힌 실내공간에서만 잠시 고요를 느낄 수 있다. 실내가 아니고 벽으로 가로막히지 않은 툭 터진 대자연에서 느끼는 고요함은 차원이 다르다. 간월암 앞바다는 호수와 같아서 파도 소리도 별로 들리지 않는다. 밤이라 갈매기 소리도 없다. 배가 다니는 엔진 소리도 없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태양처럼 눈이 부시지도 않는다. 똑바로 바라볼 수도 있다. 아무 소리도 없는 월광이 호수 같은 바닷물에 고요히 비치는 장면은 시간이 멈춘 듯하다.

간월암은 예로부터 영험한 터로 유명했다. ⓒphoto 조용헌
간월암은 예로부터 영험한 터로 유명했다. ⓒphoto 조용헌

고요함 가운데 충만함

간월암에서 보는 달빛 장면은 고요하면서도 충만함이 느껴진다는 데 특징이 있다. 달빛은 은총이 내려오는 것 같다. 바다 전체를 품어 주는 월광은 충만함이 느껴진다. 차가운 느낌도 아니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안아주면서도 한없는 고요함과 광활함이 느껴진다.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온갖 이전투구를 해야만 하는 인간세계의 번잡함과 지저분함을 일거에 잠재워 버리는 고요한 충만함이다. 불가의 그림인 수월관음(水月觀音)은 간월암 앞바다에 보이는 이런 광경을 나타낸 그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월관음의 사전적 정의는 ‘물에 비치는 달을 바라보는 관음보살’이란 뜻이다. 인간세상에서 맛보기 어려운 고요함과 달빛의 충만함이 겹치면 그것이 대자비로 다가오지 않나 싶다.

대자비를 상징하는 수월관음의 이미지를 표현하려면 물에 비치는 달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달의 이미지는 불가의 화엄사상에서도 즐겨 사용한다.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화엄 철학이 그것이다. 하나가 곧 여럿이라는 이치를 현상계에서 눈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례는 물에 비치는 달이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바로 그것이다. 하늘의 달은 하나지만 그것이 지상의 물에 비칠 때는 천 개의 강물에 같이 비친다. 왕과 신하의 관계가 이런 것이다. 일즉다의 사례다. 제왕과 1000명의 신하는 일즉다의 관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화엄사상의 ‘일즉다 다즉일’은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명분에 딱 맞다. 불교권의 제왕들이 좋아했던 사상체계이기도 하다. 조선의 정조는 자신을 나타내는 서명을 할 때 ‘명월만천옹(明月萬川翁)’이라는 서명을 사용한 바 있다. 임금이란 무엇이냐. 명월만천옹이다. 하늘의 명월이 만 개의 냇물에 비친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라는 뜻이다.

불가에서 도가로 넘어가면 달의 의미가 또 달라진다. 달이 에너지원(源)으로서 의미가 부각된다. 우선 달은 초승, 보름, 그믐달로 변한다. 태양은 변하지 않지만 달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변한다. 이 변화가 지상에 영향을 미친다. 밀물과 썰물이 그것이다. 달의 인력에 따라 밀물과 썰물의 시간대도 달라진다. 조수간만에 따라 어부들의 고기잡이 시간도 달라진다. 배를 타고 나가는 시간과 들어오는 시간이 달의 변화에 따라 정해지는 셈이다. 태양도 인간세계의 시간표를 정하는 기능이 있지만, 달도 역시 인간세계의 주기율표를 정하는 역할이 있다. 한자문화권에서 2500년 동안 생명을 이어오고 있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사상도 첫 대목이 음(陰)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음은 달이다. 달이 맨 앞에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왜 앞에 있나.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왜 큰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변하니까 그 변화가 인간 생체리듬에 직접적으로 느껴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인간의 혈액도 액체니까 달의 영향을 받는다. 여성의 생리를 왜 월경(月經)이라고 이름 붙였겠는가. 달의 주기와 맞는다는 뜻이다.

달의 주기는 인체 리듬의 주기

보름달이 뜰 때는 음식도 적게 먹는 게 좋다. 달의 에너지가 많이 들어오니까 음식을 줄이는 게 균형에 맞는다. 서양에 ‘나자리노’ ‘울프’ 같은 괴기영화가 있다. 인간이 동물, 늑대로 변한다는 줄거리다. 영화의 배경은 꼭 달이 뜰 때다. 달이 인간의 감정과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고대로부터 서양에서 내려온 인식이 반영된 영화다. 어찌 되었든 서양에서도 고대부터 달이 인체의 리듬에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치를 알고 있었다는 징표라고 생각한다. 도가에서 달을 주목하고 있었던 결정적 대목은 주역의 곤괘(坤卦)에 등장하는 ‘서남득붕(西南得朋) 동북상붕(東北喪朋)’이다. ‘서남쪽에서는 친구를 얻고, 동북쪽에서는 친구를 잃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중국의 한족 입장에서 볼 때 동북은 동이족이 사는 방향이고, 이 방향으로 잘못 나갔다가는 낭패를 본다는 뜻일까. 동북 동이족에 대한 콤플렉스의 반영인가. 필자는 이 대목을 20년 이상 이해하지 못하였다. 근래에 남회근 선생의 ‘참동계강의’를 보니까 이 대목을 남 선생이 명쾌하게 해석하였다. 남 선생 본인도 이 대목을 오랫동안 고민했다는 소회도 곁들여 있다.

남 선생 이야기로는 달 뜨는 방향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붕(朋)은 명(明)으로 해석해야 한다. 달이 뜰 때도 상현, 하현, 보름달에 따라 각기 방향이 다르다. 곤괘는 달을 상징한다. 매월 초사흘이면 서남방에서 달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달이 초승달이다. 초승달은 서남방에서 뜨기 시작한다. 23일이 되면 한쪽이 이지러진 하현달이 동북쪽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그믐이 되면 동북쪽에서 달이 아예 사라진다. 달이 사라진 상태를 동북상붕이라고 ‘주역’ 곤괘에서 표현하였다는 게 남 선생 해석이다. 곤괘는 달이 사라진 상태다. 달이 안 보이는 컴컴한 상태가 바로 곤괘, 텅 빈 상태라고 본 것이다. 달이 왜 이처럼 ‘주역’에서 비중 있게 다뤄졌는가. 달의 상태에 따라 도가의 수련 방법이 바뀌기 때문이다. 달의 정기를 흡수하는 태음공(太陰功)은 고대부터 도가의 내단(內丹) 수련가들에게 중요한 정보로 여겨졌다. 달의 변화에 따라 잠자는 시간, 호흡의 방법, 몸 안의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주천화후(周天火候)의 타이밍이 변화된다. 신선이 되려면 달을 모르면 안 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2020년 6월 6일(양력) 밤 10시 반쯤 간월암에서 보름달을 보니까 남동쪽에 떠 있다. 8시쯤 동쪽에서 떠서 밤 10시가 넘어가니까 남쪽으로 이동해 가는 중이다.

천수만에 떠 있던 여러 개의 섬 가운데 하나인 간월도가 수행처로 주목받은 이유는 또 있다. 하나는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德崇山)의 지기가 간월도로 내려왔다는 점이다. 간월암에는 산신각이 영험하다. 직선거리로 50~60리(20~23㎞) 정도 떨어져 있는 덕숭산의 기운이 바다 밑의 암반으로 이어져 오면서 간월암 산신각 터로 뭉쳤다. 앉아 보면 기운이 짱짱하다. 간월암 산신각은 옛날부터 영험한 터다. 바다에 있는 섬이니까 용왕각이 있어야 하지만, 덕숭산의 지기가 내려왔으므로 옛날 도인들이 산신각을 지어놓은 것이다. 간월암에 스님들이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식수다. 먹을 수 있는 물이 나온다. 물의 양도 제법 된다. 여러 명이 살 수 있는 양이다. 인생이 허하다고 느껴지거나, 화병 날 것 같은 사람은 간월암에 가서 달빛 바다를 한번 보아야 한다. 서해안의 영지임에 틀림없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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