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명이 투숙 가능했던 악사라이의 술탄 카라반세라이 유적.
3000명이 투숙 가능했던 악사라이의 술탄 카라반세라이 유적.

눈이 온 뒤에야 소나무가 한층 더 푸르게 보인다고 하던가. 한국인 모두가 국운 상승을 느끼며 앞으로 열심히 나아가던 시기가 있었다.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야말로 대한민국 국운 상승의 절정기였을 듯하다. 경제적 수치로도 증명될 수 있겠지만, 외국에 대한 한국인의 갈증이 한꺼번에 풀렸던 순간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360도 열린 세계관은 국운 상승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우물 안 개구리의 눈에서 벗어나 세계 전체를 시야에 두는 ‘개국(開國)의 눈’이 바로 국운 상승의 징표다. 묫자리를 파헤치고 상대방 약점 찾기에 혈안인 ‘쇄국의 눈’과는 180도 다른 세계관이다. 승자 독식 밥그릇 타령이나 내로남불 위선이 아예 존재할 수도 없는 세계관이다. 돌이켜보면, 대한민국 유사 이래 처음으로 ‘개국의 눈’이 분출된 시기가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다.

몽골이라는 화두는 30여년 전 국운 상승기에 등장했다. 서울올림픽 전후 터진 ‘개국의 눈’으로 대제국 몽골과 관련한 역사와 교훈을 저마다 더듬기 시작했다. 기마민족 몽골과 한민족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는 노력도 있었지만, 필자가 당시 관심을 가진 영역은 몽골의 기상 그 자체였다. 초원을 넘어 대륙 정복에 나선 호연지기가 부러웠다. 집도 땅도 없이 말(馬)과 함께 세계를 정복한, 겸손하면서도 올곧은 몽골의 기상이 서울올림픽 전후 국운 상승 분위기와 맞아떨어졌다.

사실 대제국에 관한 얘기가 국운상승기에 맞춰 등장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얘기는 18세기 세계의 패자로 등장한 대영제국을 통해 확산했다. 대영제국 박물관 1층 중앙 전시관을 아테네 파르테논신전의 유물·유적으로 메우면서, 문화·문명적 차원에서 ‘대영제국=고대 그리스’라고 전 세계에 선포했다. 세계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국운 상승은 반드시 ‘개국의 눈’을 전제로 한다. 이미 한 세대 전 얘기지만, 몽골이라는 화두야말로 필자의 머릿속에 투영된 대한민국 국운 상승의 증거로 남아 있다.

고대도시 아이딘의 호텔 ‘진시르리 한’

운명인지 우연인지, 터키 동부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다시 몽골을 만났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장소에서 대제국의 흔적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 유물·유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던 7년 전, 이스탄불로 돌아가던 길에 들른 한 호텔이 기점이다. 아나톨리아를 대표하는 항구 이즈미르(Izmir)에서 110㎞ 떨어진 아이딘(Aydin)이란 작은 고대도시가 무대다. 거의 8시간 가까이 운전을 하다가 ‘진시르리 한(Zincirli Han)’이란 이름의 호텔에 도착했다. 축구장 반 정도 크기의 넓은 사각형 마당에다 바깥쪽에 복층 객실이 하나로 연결된 구조다. 가운데는 작은 분수대 하나가 들어서 있다. 초대형 호텔인 셈이다. 돌과 원목으로 된 단단한 구조라는 점이 인상 깊었다.

호텔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다음 날 아침 식사 도중이었다. 진시르리 한의 역사가 1708년부터 시작됐다는 얘기를 호텔 종업원을 통해 알게 됐다. “원래 육지, 바다의 실크로드를 통해 건너온 장사꾼들이 이용하던 숙박시설이었다. 넓은 마당에서 낙타와 말들의 거래도 이뤄졌다. 물론 상품의 거래와 보관도 여기에서 행해졌다. 13세기 몽골 지배하의 아나톨리아에 세워진 숙소를 본뜬 것이다. 700년 전 탄생한 몽골판 힐튼호텔 체인점이라고나 할까. 지금도 터키 안에 수십 군데 남아 있지만, 대부분 산속 깊숙이 숨어 있기 때문에 찾기 어려울 것이다.”

얘기를 들으면서 필자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든 것은 몽골에 관한 부분이다. ‘몽골이 만든 실크로드 힐튼호텔?’

술탄 카라반세라이 안에 있는 모스크.
술탄 카라반세라이 안에 있는 모스크.

몽골의 실크로드 힐튼호텔?

아이딘에서의 체험 덕분이지만, 터키어로 ‘한(Han)’이 도심지 주변,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가 도심 밖 시골의 숙소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시설은 도심 속 ‘한’이 아닌, 인적이 드문 외곽의 카라반세라이다. 카라반(Caravan·장사꾼 여행객)과 세라이(Saray·궁전)를 합친 말이 카라반세라이다. 그리스 문화 유적도 넘치기에 그동안 카라반세라이를 소홀히 했다. 아예 작정을 하고 찾아나선 것은 지난해부터다. 지금까지 대략 30군데 정도 들른 듯하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사물의 깊이와 가치는 구체적인 체험과 스토리텔링을 통해 성숙해진다. 이곳저곳 둘러보는 동안 700년 전에 세워진 흔적에 내재된 여러 모습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키워드는 역시 몽골이다.

대제국 몽골이 아나톨리아를 완전히 정복한 것은 1243년이다. 아나톨리아 북동부에서 벌어진 ‘쾨세다그전투(Battle of Köse Dağ)’에서 몽골군은 터키 연합군(Sultanate of Rum)을 섬멸한다. 당시 터키 연합군은 몰락 직전의 셀주크 대제국(Seljuk Empire) 일원이었다. 10세기에 세워진 셀주크 대제국은 터키와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이슬람 연합국가다. 아나톨리아가 함락되기 22년 전인 1221년, 이미 페르시아도 몽골에 굴복했다. 몽골은 승전 후에도 아나톨리아 토착세력을 제거하지 않았다. 끝까지 반대한 세력만 섬멸할 뿐, 기존의 지배구도를 그대로 인정하는 통치방식이다. 세금만 내면 일절 간섭하지 않는 것이 대제국 경영방식이다. 세계사 공부를 통해 익숙해진 말이겠지만, 현지 세금징수 총책임자인 ‘다루가치(達魯花赤)’를 통한 간접통치다.

다루가치들이 앞다퉈 세운 비즈니스 현장

몽골은 토착 권력가들을 현지 다루가치로 임명한 뒤 일정량의 세금을 받아냈다. 1243년 아나톨리아 점령 후 수많은 다루가치가 등장한다. 분리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다루가치를 양산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토착 권력세력이던 다루가치들은 서로 경쟁하듯 장사에 몰두한다. 할당된 세금도 바쳐야 하지만,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이 주된 이유다. 세금을 내고 남은 돈은 전부 자기 몫이다. 아나톨리아 동쪽에 산재한 수많은 실크로드 숙소는 이 같은 배경에서 ‘갑자기’ 탄생한 산물들이다. 많은 숙소를 지어야 장사꾼들이 몰려들고 세금도 징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아나톨리아에는 몽골 지배 당시 등장한, 크고 작은 실크로드 숙소 수백 군데가 존재한다. 21세기 들어 터키 정부가 발굴, 보수공사에 나서고 있지만 대부분은 수백 년 폐허의 모습 그대로다. 아예 토사 속에 매몰된 상태인 것도 많다.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흔적만 남은 곳을 포함할 경우 적어도 200군데 이상의 카라반세라이가 아나톨리아 지방에 존재한다. 카라반세라이는 숙박시설로서의 기능에 그치지 않는다. 정보를 구하고 필요한 물건도 제공하며 갖고 온 상품을 장기간 보관하거나 대여하는 역할도 했다. 물론 현장에서의 물물교환이나 판매도 가능했다. 실크로드의 장사꾼 대부분은 일정한 거리만 걸은 뒤, 중간에 물건을 팔고 다시 되돌아가는 비즈니스에 주력했다. 오해하기 쉬운데 낙타를 타고 1년 이상 대륙을 넘나드는 식의 장거리 비즈니스는 극히 드물다. 단거리로 물건을 넘기면 거기서 다시 다른 장사꾼이 더 먼 지역으로 옮겨가는 이어달리기 식 비즈니스가 주류다.

카라반세라이는 만약의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요새로도 활용됐다. 밖에서 보면 창문이 거의 없다. 정문을 닫으면 거의 난공불락 철옹성으로 변한다. 카라반세라이의 기능 중 하나로 여행에 동행할 경호원이나 용병 제공 서비스도 빼놓을 수 없다. 터키와 접한 아르메니아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국가다. 서기 301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표한다. 로마나 다른 그 어떤 나라보다도 기독교 국교화에 빨랐던 것은 아르메니아 특유의 ‘정보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래 아르메니아는 실크로드 주변의 경호와 용병 업무에 특화된 나라였다.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면서 동행하는 ‘보디가드’ 서비스를 행하는 동안 세상의 흐름을 일찍 파악하게 된 것이다.

카라반세라이의 우물. 카라반세라이는 주변에 큰 물줄기를 끼고 있다.
카라반세라이의 우물. 카라반세라이는 주변에 큰 물줄기를 끼고 있다.

문만 닫으면 철옹성으로 변신

카라반세라이는 크기라는 점에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철옹성 구조도 특이하지만, 아무리 적어도 최소한 1000명 정도는 수용할 초대형 시설이란 점에서 인상 깊다. 터키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것은 악사라이(Aksaray)에 들어선 ‘술탄(Sultan) 카라반세라이’다. 최대 3000명 투숙이 가능하다. 터키 투어에 나섰다면 카파도키아(Cappadocia) 가는 길에 들르는 필수 여정 중 하나다. 술탄 카라반세라이를 중심으로 한 주변환경은 실크로드의 흔적과 당시 상황을 이해할 최적의 모델로 느껴진다. 반경 300㎞ 안에 카라반세라이가 10개 정도 들어서 있다. 30㎞당 하나씩 자리 잡은 셈이다. 아나톨리아 전체를 통틀어 실크로드 비즈니스의 중심무대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자연환경은 모질다. 지난 6월에 다녀왔지만, 나무 하나 없는 불타는 평지로 이어져 있다. 여름철 여행일 경우 섭씨 40도의 폭염도 각오해야 한다. 낙타를 타고 간다 해도 보통은 하루에 60㎞,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하루 90㎞가 한계다. 카라반세라이는 숙박용 건물만이 아닌, 미(美)와 예(藝)로서의 건축물로도 평가될 수 있다.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겠지만 정면의 대문 주변이 건축물로서의 카라반세라이를 이해할 핵심이다. 이슬람 특유의 문양과 함께, 몽골 모자를 연상케 하는 70도 각도의 원통형 대문 장식이 특이하다. 이슬람은 우상이나 동물 장식을 금지한다. 쿠란(Quran)을 인용한 문장이 대문 위에 들어서 있지만, 가끔은 사자상과 같은 ‘불성(不聖)’ 장식물도 만날 수 있다.

카라반세라이는 숙박시설이 들어선 내부 공간과, 낙타와 말을 보호하는 외부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술탄 카라반세라이의 경우 실내 숙박시설 크기가 축구장 하나 정도 규모로 엄청나다. 대리석이나 석회암이 주된 재료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내부 마당 중간에는 우물과 작은 모스크가 들어서 있다. 카라반세라이는 기본적으로 이슬람 전용 숙박시설이다. 큰 규모의 카라반세라이에 국한되지만, 기도를 올릴 수 있는 모스크가 실내 공간 한가운데에 들어서 있다. 모스크의 중심은 선지자 마호메트의 출생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Mecca)로 향한다. 21세기 힐튼호텔이 그러하듯, 카라반세라이는 엔터테인먼트도 제공했다. 숙소 한가운데 무대를 만들어 무희들의 춤이나 현지 음식도 제공했다. 카라반세라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다. 음료용 물만이 아니라 낙타, 말 그리고 씻기 위한 물이 필요하다. 따라서 카라반세라이 주변에는 반드시 큰 물줄기가 존재한다. 계곡수이거나 시냇물, 강을 반드시 끼고 있다.

카라반세라이는 터키만이 아니라 이란·이라크·시리아를 비롯한 이슬람권 중앙아시아와, 모로코·리비아를 포함한 북부 아프리카에서도 볼 수 있는 고대 비즈니스의 현장이다. 중국의 역할과 기능에 관한 부분은 실크로드 비즈니스 역사와 관련해 주목할 부분이다. 보통 실크로드 역사라고 하면, 기원전 2세기 한(漢)이 생산한 실크를 주인공으로 떠올리기 싶다. 6세기 당(唐)의 번영은 실크로드가 번성한 최대의 요인으로 해석된다. 실크 생산에 관한 모든 것이 국가비밀로 유지되는 과정에서, 유럽과 이슬람권이 실크에 환호하면서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이 줄을 이었다는 식의 분석이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 먼저 실크로드의 주된 상품이 실크에 국한된 것이 아니란 점이다. 중국만이 아닌 인도, 베트남, 스리랑카와 같은 나라의 식품이나 특산품들도 해로·육로를 통해 서쪽으로 반입되었다. 둘째는 중국이 실크로드의 기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1세가 만든 아나톨리아 지방의 3000㎞에 달하는 로열로드(Royal Road)가 실크로드의 원조다. 나중에 로열로드도 실크로드에 흡수되지만, 동서 비즈니스의 출발점은 페르시아를 통해 이미 2500여년 전에 시작됐다.

코나에 있는 셀주크투르크의 통치자 술라이만 이븐 쿠탈미시의 동상.
코나에 있는 셀주크투르크의 통치자 술라이만 이븐 쿠탈미시의 동상.

몽골의 통치방식이 가르쳐 준 것

한국에서 언급되는 몽골에 관한 이미지는 파죽지세 기마민족으로 압축될 수 있다. 엄청난 스피드로 적을 단숨에 격파하고 다시 미지의 땅으로 도전하는 ‘정복 민족’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정복 그 자체보다 정복 이후 유지된 몽골의 통치방식에 있다. 무적 전사보다는 평화를 유지해나가는 국가적 능력에 관한 부분이다. ‘대제국을 어떻게 유지했는가’라는 점이다. 카라반세라이는 이에 대한 최적의 답이 될 수 있을 듯하다. 몽골은 상품 거래의 3%를 세금으로 거둬들였다. 간단히 말해 상업활동에 관련한 돈의 3% 정도만 내면 평화가 유지됐다. 당시 유럽과 중국의 30% 정도에 비하면 10분의 1 수준이다. 세금이 적다 보니 부정부패도 적고, 모두가 상업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 동맹국에서 자국의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을 국방비로 사용하라고 다그치고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700년 전 대제국 몽골의 계산법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중앙아시아를 지킨 평화와 번영의 상징이자, 대제국 몽골의 통치방식을 이해할 살아있는 교훈, 바로 카라반세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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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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