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예전만은 못해도 어디를 가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중에 친밀하게 어울려 정담을 나누는 여성들의 모습은 흔하다. 반면 남성들은 가족이나 왁자지껄한 단체를 제외하고는 대개 외톨이다. 왜 남성은 여성처럼 다른 동성과 잘 어울리지 못할까.

이처럼 고독한 남성의 내면적 상처를 날카롭게 파헤치며, 그 치유책을 제시한 것이 바로 융(Jung) 심리학 전문가인 제임스 홀리스의 ‘새턴의 그림자 속에서’(Under Saturn’s Shadow·1994)이다. 이 제목은 “오늘날에도 남성들이 여전히 ‘새턴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남자로 산다는 것’(2019)으로 소개되었다.

새턴은 로마 신화의 농업신인 사투르누스(Saturnus)를 가리킨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의 크로누스(Cronus)에 해당한다. 그는 자신을 제거하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자신의 자식들을 모조리 잡아먹는다. 그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식이 제우스다. 그 역시 아버지를 제거하고 또 다른 폭군이 되어, 모든 신들 위에서 난폭하게 권력을 휘두른다. 거기서는 그뿐만 아니라 모든 신들이 권력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자신의 권능을 과시하기에 급급하다.

이처럼 새턴의 그림자는 권력, 질투, 불안으로 얼룩진 세계를 은유한다. 물론 권력 자체는 중립적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에로스와 함께하지 않으면서 공포와 보상욕구에 사로잡혀 폭력을 불러일으키고 만다. 융의 지적대로 “권력이 있는 곳에 사랑은 없다”. 그런데 남성들이 여전히 이런 새턴의 폭력적 서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여성의 삶은 ‘여성’이라는 성역할에 대한 기대에 얽매여 있다. 마찬가지로 남성의 삶 역시 ‘남성’이라는 성역할에 속박되어 있다. 남성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 가족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 이런 막중한 책임감에 억눌려 항상 불안하다. 한마디로 3W(Work·War·Worry)가 항상 남성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

무엇보다 남성은 평생 동안 어머니 콤플렉스(mother complex)에 시달린다. 어머니 콤플렉스란, 남성 내면에 형성된 보살핌과 안전함에 대한 복합적 갈망이다. 남성은 인격 형성기의 대부분을 어머니의 품속에서 보낸 탓에, 그의 내면에는 어머니의 존재가 너무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로 인해 남성은 여성을 만족시키며 동시에 지배하려고 한다. 또한 여성에게 ‘어머니와 같아야 한다’고 강요하면서도, 동시에 여성의 칭찬과 인정을 갈망한다.

반면 다른 남성들을 경쟁 상대로만 여기고 그들을 두려워하며 적대시한다. 그래서 남성의 삶은 공포와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다. 이러한 공포가 자신을 과시하고 타인을 괴롭히는 등 과잉보상 형태로, 또는 삶의 진정한 소명이나 과제를 회피하는 형태로 왜곡되어 표출된다. 아울러 섹슈얼리티를 과대평가하거나 아예 두려워하고, 동성에 대한 사랑을 혐오한다. 이로 인해 남성은 애정 관계조차 권력 관계로 왜곡하며, 새턴의 그림자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남성은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만약 연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약점을 노출하면 그 대가는 혹독하다. 다른 남성들에게 망신을 당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여성들까지 여기에 동참한다. 스스로도 참지 못한다. 따라서 남성은 침묵하거나, 반대로 허세를 부리며 마초처럼 군다. 마초 같은 남성일수록 내면은 더욱 고독하다. 이는 여성들이 서로 상처나 두려움을 솔직히 털어놓으며 위로를 주고받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남성은 성장함에 따라 어머니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전혀 다른 세계, 즉 어른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어머니 콤플렉스를 상쇄시킬 만한 어떤 힘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반드시 상당한 고통이나 상처가 필요하다. 실제로 전통사회의 통과의례에서는 남성의 몸에 혹독한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또한 아버지나 족장이 남성의 강력한 모델이다.

반면 오늘날에는 남성에게 그런 각성을 주는 의례나 과정이 부재하다. 또한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주는 모델도 부재하다. 아동기와 성인기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오로지 학업, 일, 섹스, 알코올, 약물 등이 메워줄 뿐이다. 남성은 자신이 뿌리가 없고 버림받았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그래서 무의식 중에 아버지나 종족 선조를 갈망하게 된다. 심지어 영화 ‘대부’와 같이 카리스마 있는 보스가 나오는 폭력 드라마에 열광하기도 한다.

이처럼 오늘날 남성은 어른이 되라는 요구는 받지만, 마땅한 통과의례나 모델이 없는 가운데 아무 준비 없이 죽고 죽이는 게임에 내몰린다. 거기서 서로의 내면과 영혼에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래서 남성의 삶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승리할 때조차도 그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고 만다. 그런 가운데 분노는 자꾸 쌓이고 폭력, 알코올, 약물에 빠져들고, 고립과 공포는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이 남성의 삶이다.

이제 남성이 치유되려면, 외부에서 충족시킬 수 없는 무언가를 내면에서 스스로 깨워야 한다. 달리 말해, 어떠한 의례나 모델에 의지하기보다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투적인 사회운동의 형태를 띠면 거기에 자칫 남성성의 문제가 너무 쉽게 재연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저자는 각자 내면적 성찰을 통한 치유를 제안한다. 즉 남성에게도 해방운동이 필요하지만, 사회적 방식보다 내면적 성찰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아버지의 상처를 더듬어 보라고 권한다. 자신이 성인이 된 유리한 위치에서 아버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면,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 자식과 가족을 더 잘 돌보게 된다. 또한 침묵에 결탁하거나 마초처럼 행동해서 보상받으려는 허세를 버려야 한다.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에 따라 살며 그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야 한다.

오늘날 더 이상 통과의례나 모델은 없다. 대안은 서로가 내면을 진솔하게 털어놓으며 서로에게 멘토가 되어주는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솔직한 관계에 기반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심리 상담이 하나의 좋은 예다. 또한 애정과 섹슈얼리티를 동일시하는 것이 과도한 편견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통해 동성애의 공포를 버리고, 다른 남성에게 친밀하게 다가가야 한다. 남성끼리도 여성들처럼 스스럼없이 나약함을 나눠야 한다.

특히 어머니 콤플렉스로 인해 남성은 돌봄을 받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구를 여성이나 다른 남성이 풀어주기를 기대한다. 이로 인해 여러 문제가 야기된다. 하지만 그런 욕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되, 그것을 돌보고 챙기는 일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타인에 대한 욕구나 두려움도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처럼 성인이 되어서도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융이 프로이트와 다른 점이다.

이제 남성은 더 이상 자신을 기만하지 말고, 자신의 허약한 내면을 솔직히 직시해야 한다. 나아가 그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려고 노력할 때 왜곡된 내면의 질곡에서 풀려난다. 해방이 필요한 것은 여성뿐만이 아니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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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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