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뒤로 백학이 앉아 있는 모습을 닮은 백학봉이 버티고 있다.
백양사 뒤로 백학이 앉아 있는 모습을 닮은 백학봉이 버티고 있다.

머리를 깎고 불교의 승려가 되면 뭐가 좋을까? 전국 명산의 기운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한철 또는 몇 년씩 살아 볼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도를 깨치면 좋지만 못 깨치더라도 한세상 태어나 명산의 명당에서 살고 간다는 것은 남는 장사 아닌가. 산마다 암자마다 다 기운이 다르다. 풍광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그 터에서 올라오는 땅 기운이 다르다는 것이 포인트이다. 비유하자면 비타민 같은 터가 있고, 단백질이 올라오는 터가 있고, 어떤 터는 칼슘에 해당한다. 칼슘이 부족할 때가 있다. 이런 때는 칼슘이 많은 터에 가서 몇 년 살다 보면 보충이 된다. 타이밍마다 부족한 기운이 다를 수 있다. 공부의 정도에 따라 요청되는 에너지가 있는데, 이게 다 다르다. 특히 사람의 기질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물이 감아 돌거나 호수가 앞에 보이는 수기가 풍부한 터에서 살다 보면 자연히 완급 조절이 된다. 반대로 내성적이면서 조용한 스타일들은 바위가 험하게 돌출된 도량에서 살다 보면 또한 보강이 된다.

안국선원의 수불(修弗·68)스님은 27~28세 무렵에 ‘한 소식(불가에서 말하는 돈오(頓悟), 즉 갑자기 깨달음)’한 것으로 알고 있다. 불가에서 말하는 한 소식을 하게 되면 마음이 크게 이완된 상태로 접어든다. 삶이 주는 압박감과 긴장에서 벗어나는 상태이다. 긴장은 인생을 살면서 별도로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동으로 하게 된다. 문제는 릴랙스, 즉 이완이다. 이완이 고도로 어렵다. 말로는 긴장을 풀라고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게 풀어지나? 어떻게 보면 긴장을 푸는 과정이 도를 닦는 과정이다. 제대로 된 이완은 ‘한 소식’을 해야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이렇게 이완이 되면 막혀 있던 몸의 경락도 다 열린다. 긴장을 하면 경락이 막히고 굳어진다. 막힌 것이 오래가면 다 병으로 진전된다. 이완이 되면 이 막혀 있던 나디(Nadi·통로)들이 모두 열린다. 경락이 열리면 그 터의 기운이 모두 몸으로 느껴진다. 또한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운도 모두 느껴진다. 기경팔맥(奇經八脈)이 열리는 이완이 되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가 된다. 이런 상태로 명산의 사찰과 명당들을 둘러보면 그 터의 맛이 제대로 느껴진다.

‘터의 맛’이 인생의 진미

터의 맛! 이게 가장 진미이다. 미쉐린가이드가 식당의 음식 맛을 보고 별을 하나 주고 두 개 주는 것처럼 필자는 터의 맛을 보고 다니는 사람이다. 문제는 필자가 한 소식을 하지 못해서 제대로 깊은 맛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대강은 알지만 아주 속 깊은 맛은 쉽게 못 느낀다. 인생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크게 쉬지 못했기 때문이다. 엊그제 수불스님하고 가회동 안국선원에서 차를 한잔하면서 그동안 당신이 다녀보았던 터에 대한 느낌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 “외국에도 기운이 강한 명당이 많이 있는가요?” “남인도에 갔을 때 아주 특이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원이 있었어요. 스리랑감이라고 하는 힌두교사원인데, 강의 하류지점인 삼각주에 위치하고 있었어요. 건축 구조도 특이했어요. 일곱 겹으로 겹겹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사원이었죠. 가장 가운데에 있는 7번째 장소는 황금지붕이 씌워져 있고, 일반인은 못 들어가게 통제하는 지점이었죠. 그 사원의 지킴이가 나는 예외적으로 들어가게 했어요. 외국인이더라도 아마 머리 깎은 승려이니까 허용했던 것 같아요. 7번째 방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발바닥으로 그 어떤 강력한 기운이 쑥 들어왔어요. 발바닥에는 용천혈(湧泉穴) 자리가 있는데, 이 혈자리로 뭉클하면서 기운이 강하게 들어왔죠. 발바닥과 종아리를 거쳐 하반신으로 들어오는 땅 기운은 이때 처음으로 느꼈어요. ‘아! 이거 무슨 허망한 기운인가’ 하고 주시하면서 기운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았지만 아주 강력한 기운이기는 했어요. 옛날 인도 사람들도 그 기운을 알고 거기를 특별한 장소로 숭배했던 것 같아요. 조 선생도 언제 시간 되면 거기 한번 가보시오.”

‘장자(莊子)’에 보면 ‘眞人踵息(진인종식)’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종(踵)’ 자는 발꿈치를 뜻한다. 진인은 발뒤꿈치로 숨을 쉰다는 의미가 된다. 발뒤꿈치로 호흡을 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만큼 깊은 호흡을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급하면 숨이 헐떡거린다. 코끼리가 풀만 먹는데 힘이 세고 오래 사는 이유는 긴 코를 통해서 호흡이 깊고 느리기 때문이다. 모든 긴장에서 풀려 이완이 되면 발뒤꿈치에서 호흡을 하게 된다. 불가는 마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몸의 경락과 혈자리의 기운이 돌아가는 부분에 대한 설명이 소략하다. 그러나 이완이 되면 경락으로 기운이 돌아가는 현상을 느끼는 도가(道家)나 같다. 용천혈이나 발뒤꿈치나 비슷한 개념이다. 강력한 지기가 올라오는 남인도의 스리랑감에서 종식(踵息) 현상을 특별히 느낀 것 아닌가 싶다.

“국내에서 백양사 운문암(雲門庵)은 어떻습니까?” “운문암은 모든 수좌가 한철쯤은 공부하고 싶어 하는 곳이죠. 역대 내로라하는 선지식들이 한 번씩 거쳐간 이름 있는 공부 도량 아닙니까.”

전남 장성군에 있는 백양사는 절 뒤쪽에 거대한 암벽이 있다. 약간 흰색을 띠는 암벽인데 이 암벽을 백학봉(白鶴峰)이라고 부른다. 멀리서 보면 커다란 백학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사람을 압도하는 백학이다. 산꾼들이 말하는 호남정맥의 끝자락이다. 끝자락에 명당이 많다. 마지막 자리에 기운이 뭉치기 때문이다.

백양사 뒤쪽의 산길로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가면 운문암이 나온다. 해발 500m에 있다. 우선 풍수를 살펴보자. 바닥은 암반이다. 암반이니까 기운이 세게 올라오는 것은 당연하다. 어찌되었든 공부터는 암반으로 되어 있는 것이 유리하다. 암반이라야 공부터에 해당한다. 운문암의 바로 뒤 봉우리는 상왕봉(象王峰). 코끼리처럼 생긴 봉우리라는 뜻이다. 코끼리는 불교적인 작명이다. 이 상왕봉에서 좌우 양쪽으로 청룡, 백호가 갈라져 나간다. 좌청룡은 기린봉을 거쳐서 백학봉으로 떨어진다. 백학봉이 바위 봉우리니까 청룡이 아주 강한 편이다. 좌청룡이 남자이고 양기운에 해당하니까 바위 암벽으로 내려간 점이 이치에도 맞는다. 우백호는 부드러운 육산으로 내려갔다. 사자봉을 거쳐 도집봉(道集峰)으로 내려갔다. 도집봉은 바위가 전혀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육산이다. 좌청룡의 백학봉과는 음양의 관계이다. 한쪽이 강하면 한쪽은 이 강기를 수용하고 안아주는 게 이치에 맞는다. 둘 다 강하면 부딪친다. 도집봉 에너지가 최종적으로 내려간 곳이 백양사의 극락전이다.

운문암에서 바라본 풍경. 호남의 명산들이 도열해 있다.
운문암에서 바라본 풍경. 호남의 명산들이 도열해 있다.

군신봉조의 풍광

운문암에 머물렀던 역대 수행자들이 찬탄했던 대목은 암자 앞으로 펼쳐진 풍경이다. 시원하다, 호쾌하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저 멀리 앞으로 광주의 무등산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순천의 조계산, 화순의 모후산, 그 옆으로 광양 백운산의 바구리봉이 보인다. 호남의 내로라하는 명산들이 저 멀리 앞으로 도열해 있다. 이처럼 봉우리들이 멀리서 도열해 있는 광경을 가리켜 풍수가에서는 군신봉조(群臣奉朝)라고 평한다. 여러 신하가 이쪽을 향해서 인사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쪽이라 하면 바로 운문암이다. 운문암을 찾았던 선지식들이 마음에 들어했던 부분은 이 군신봉조의 풍광이 아닌가 싶다. 암자 바닥은 기운으로 끓고 풍광은 신하들이 군왕에게 하례를 올리는 모습이니 어찌 시원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조안산(朝案山)이 읍(揖)을 하고 있다. 운문암에서 하루 종일 좌선 방석에 앉아 화두를 참구하면 머리로 열이 오를 수 있다. 이 열을 곧바로 내려주는 풍광이 아닐 수 없다.

고려시대 각진국사를 필두로 해서 수많은 도인이 운문암을 거쳐 갔다. 조선조에는 호남에서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진묵대사가 여기에서 수도했고, 담양이 고향이었던 소요태능선사, 그리고 용성선사가 이 운문암과 인연이 깊었다. 구한말 일제강점기에는 학명선사, 만암선사, 금타화상, 전강선사, 서옹대화상, 청화스님과 같은 도인들이 운문암에서 수도하였다.

청화스님의 운문암 인연도 흥미롭다. 청화스님은 왜정 때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일본 해군에 끌려왔다. 경남 진해에서 해군 훈련을 받다가 광복이 되었다. 갑자기 광복이 되자 진해에서 나온 청화는 고향인 전남 무안에다가 중학교를 세웠다. 속가의 집안이 밥 먹고 사는 여유 있는 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사장 스님’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학교 운영을 하였지만 광복 이후에 좌우익 충돌이 심하였다. 그 충돌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던 중에 집안 형님이 일찍 출가하여 이 운문암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학교를 운영하던 중에 운문암에 들렀다가 결국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다고 알고 있다. 청화가 처음 운문암에 들렀을 때 당시 수도하던 스님들이 머리가 긴 속가 사람이 오니까 방석을 하나 내주면서 “좀 앉아 있어 보라”고 했다고 한다. 처음 좌선 방석에 앉은 청화가 4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4시간 동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운문암의 승려들이 청화에게 “머리 깎으라”고 권유도 했을 것이다. “가만히 보니까 당신은 전생에도 참선을 했던 승려가 분명하다”고 하지 않았을까.

영험한 터로 소문난 운문암의 칠성전.
영험한 터로 소문난 운문암의 칠성전.

북두칠성의 7번째 별 아래

결제철에는 일반인이 운문암에 들르기가 힘들다. 수행 중인데 방해되는 것 같아서 말 붙이기가 좀 미안하다. 하안거가 끝나고 운문암의 선원장을 맡고 있는 정견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터는 왜 이름을 운문이라고 했나요?” “겨울에는 북서쪽에서 몰려오는 구름과 여름에는 남서쪽에서 오는 구름이 모두 이 상왕봉 아래의 운문암으로 지나갑니다. 구름이 지나가는 길목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운문암이라 했다고 합니다. 해발도 500m 위치이므로 여름에도 시원한 편입니다. 아래쪽의 백양사하고 3~4도 차이는 납니다. 평지에서 이 운문암을 바라다보면 항상 구름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운문암에 칠성전이 예로부터 유명하다고 들었는데요. 그만큼 영험이 있었나요?” “칠성전 영험이 대단했습니다. 운문암에 모여 살던 수좌들의 숫자가 상당수 되었는데요, 이 인원이 먹고사는 공양물이 바로 칠성전에서 나오는 불공이었습니다. 칠성전 영험을 체험하고 불공 드리는 신도들의 성금으로 수좌들이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죠.” “왜 운문암의 칠성전이 그렇게 영험이 있었던 것입니까?” “하늘의 북두칠성 기운이 곧바로 운문암으로 떨어진다고 옛 어른 스님들이 말씀하셨습니다. 겨울철 새벽에 좌선을 끝내고 아침 6시쯤 마당에 나와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북두칠성의 마지막 7번째 별이 바로 운문암 위에 떠 있습니다. 국자 손잡이의 손잡이 부분이기도 한 7번째 별이 이곳으로 향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칠성전이 영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6·25전쟁 때 토벌대에 의하여 칠성전이 불에 탔습니다. 칠성전 안에 모셔져 있던 칠성님들은 암자 아래의 백양사 칠성전에 현재 모셔져 있습니다. 불에 탄 운문암 칠성전을 다시 복원하려고 저희들이 현재 시주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토속신앙의 3대 축이 있다. 산신, 칠성, 용왕이 그것이다. 산에 가서는 산신을 숭배하였고 강이나 호수, 바다에서는 용왕을 믿었다. 그리고 하늘의 신이 바로 칠성이었다. 이 북두칠성 신앙이 사실은 매우 뿌리가 깊다. 북방 유목민족은 유라시아대륙에서 가축들을 이끌고 이동하였다. 이동을 하자면 방향과 시간이 문제이다. 이 방향과 시간을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했던 별자리가 북두칠성인 것이다. 칠성은 하루 저녁에도 가만히 있지 않고 빙빙 돈다. 칠성의 1번 별인 추성(樞星)을 꼭짓점으로 해서 한 바퀴 돈다. 이때 6번과 7번 별을 시침(時針)이라고 부른다. 하늘의 시곗바늘이다. 이 시침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밤하늘의 방향과 지금이 몇 시쯤인가를 가늠하였다. 손목시계가 없던 고대에는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시계가 바로 칠성이었다. 손목시계가 발명된 이후로 인간들은 하늘에 떠 있는 태초의 원형 시계를 잊어버린 셈이다.

하늘에 떠 있는 시계란 결국 무엇인가? 시간의 신이다. 칠성을 시간을 관장하는 신으로 떠받들었다. 헝가리 철학자 루카치가 “사막의 대상들이 하늘의 별을 보고 가던 때가 행복했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는데, 칠성님을 믿고 따라가던 시절이 좋았다로 들린다. 북방 유목민족은 칠성이 인간세계의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칠성님에게 돌아간다고 믿었다. ‘돌아가셨다’는 말은 칠성님에게 돌아갔다는 뜻이다. 이승에서 죽었다는 것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시간을 다 써버렸다는 말이다. 다 썼으니까 다시 칠성님에게 돌아가서 시간을 새로 부여받아야 한다. 새로 시간을 부여받기 위해 칠성님에게 돌아가는 셈이다. 군대에서도 병사가 죽으면 시체를 얹어 놓는 바닥 판자에 칠성이 새겨져 있다. 소위 말하는 칠성판이다. 죽을 때는 칠성판 위에 누워서 간다. 그런가 하면 사람이 죽었을 때 새끼줄로 관을 묶는데 이때 일곱 개의 가닥으로 묶는다. 우리 민족의 고대 토속신앙인 칠성 신앙이 불교 사찰로 흡수되어 칠성각, 또는 칠성전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칠성각(閣)보다 더 영험하고 한 급 위의 호칭이 칠성전(殿)이다. 각보다 전이 앞에 온다. 대개 칠성각이라고 부르는데 백양사에서는 칠성전이라고 간판이 달려 있다. 그만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영험하니까 높여 부른다. 영험한 명당터는 그 땅의 형상과 풍수도 중요하지만 그 터에 조림하여 비추는 별의 각도가 어떤지도 중요하다. 대명당은 칠성이 조림하는 곳이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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