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어느 일방에 의해 배타적으로 독점되면 도리어 불화의 씨앗이 되기 쉽다. 그래서 건강한 사회는 뜻을 모아 위인을 가꾸고 기리려고 애쓴다. 이렇게 탄생하는 위인은 사회를 더욱 단단하게 결속시킨다. 이런 선순환이 건강한 사회의 증표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는 그런 노력이 크게 부족하다. 그래서 어느 일방의 위인이 아니라, 모두의 위인으로 널리 재조명되어야 할 인물이 적지 않다. 그중의 한 분이 아마 전태일 열사(1948~ 1970)일 것이다. 마침 11월 13일은 그의 50주기(週忌)다. 이미 반세기나 훌쩍 흘렀다. 그것은 일제 36년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이다. 더 늦기 전에 그가 어떤 인물인지 차분히 돌아보고, 그를 어떻게 기려야 할지 진솔하게 고민해 볼 때다.

이런 성찰을 위해 가장 먼저 펼쳐 보아야 할 것이 바로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1983)이다. 이 책은 스물두 해를 살다간 그의 짧지만 비범한 삶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처음에는 익명으로 출간되었으나, 나중에 저자가 조영래로 밝혀졌다. 조영래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며 인권변호사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가 1970년대 중반 시국사범으로 수배를 받아 도피 중일 때 전태일의 일기, 메모 등을 모아 이 책을 집필했던 것이다.

전태일은 1948년 8월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봉제 노동자이자, 영세 자영업자였다. 어머니는 그 유명한 이소선 여사다. 아버지는 재봉틀 몇 대를 놓고 어렵게 자영업을 하다가 망하면 다시금 노동자가 되거나 실직상태가 되는 일을 되풀이했다. 6세 때 아버지의 파산으로 일가가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였다. 굶주림을 구걸로 때우다시피 했다.

이런 와중에 전태일은 공민학교를 거쳐 정식 초등학교에 편입하여 잠깐 학교생활을 하다가 중단했다. 구두닦이 등 궂은일을 하며 서울, 부산, 대구 등지를 떠돌았다. 아버지의 재기로 15세 때(1963년) 대구에 다시 모인 가족은 한때 단란한 시간을 가졌다. 그도 고등공민학교에 진학해 낮에는 아버지 일을 도우며 밤에는 면학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사업에 실패하고 폭음과 폭행을 일삼았다. 집안은 엉망이 되고 이듬해(1964년) 어머니마저 서울로 식모살이를 하러 간다며 집을 떠났다. 그는 동생들을 데리고 무작정 상경해 노숙을 하며 구두닦이, 신문팔이, 손수레 밀어주기 등을 닥치는 대로 했다. 어린 여동생을 보육원에 맡기기도 했다. 이듬해 가족들은 가까스로 서울에서 다시 모였다.

그도 평화시장 내 삼일사의 견습공(시다)으로 취직을 했다.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어려서부터 봉제를 익혀온 덕분에 그는 다음해(1966년)에 통일사의 미싱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주변의 비참한 노동현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당시 영세한 봉제작업장에서는 재단사가 노동자 대표 자격으로 사업주와 작업량이나 임금 등을 의논했다. 그는 재단사가 되어 노동자의 처우개선에 나서고 싶은 나머지,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자리를 옮겼다.

다음해(1967년) 2월 19세 때 한미사의 재단사가 되었다. 그는 항상 노동자들의 처지를 옹호했고 이로 인해 사업주와 마찰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이 무렵부터 그는 처음 접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다가 1969년 6월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만들었다. 이 모임은 근로기준법 준수투쟁, 조직 확장, 노동실태 조사, 자체적인 모범업체 설립 등을 목표로 삼았다.

곧바로 ‘바보회’가 불온단체로 몰려 그는 해고를 당했다. 한동안 방황하며 건설현장 등을 떠돌다가 다음해(1970년) 9월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왕성사의 재단사로 취직을 했다. 그리고 ‘삼동친목회’라는 재단사 모임을 재건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아울러 노동실태 조사를 벌여 그 결과를 가지고 관공서, 언론사 등을 찾아다니며 비참한 노동현실을 고발했다.

특히 1970년 10월 7일 자 각 신문들은 ‘골방에서 하루 16시간 노동’ 등의 제목으로 그의 노동실태 조사결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그는 해고당했고 그의 활동은 갖은 탄압을 받았다. 급기야 그는 11월 13일 대규모 시위를 계획했다. 그날 낮 1시부터 500여명의 노동자가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오후 2시경 그는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나타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밤 10시경 운명했다.

그의 죽음은 노동자의 권리의식이 희박했던 시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노동운동이 태동하였고, 민주화운동도 가속화하였다. 더구나 1980년대에 ‘전태일 평전’을 읽은 젊은이들은 사회혁명과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이를 통해 그는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의 향도자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586세대는 그의 희생적 삶으로부터 감화를 받았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을 다소 폄훼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저자인 조영래가 자신의 사상과 감정으로 전태일의 삶을 자의적으로 각색했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전태일의 본모습인지 애매하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저자는 전태일의 독자적인 의식화를 주장하지만, 외부 세력과의 연계성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아울러 판본이 거듭되면서 최후의 순간에 대한 묘사가 조금 바뀌었다. 이로 인해 이 책의 사실성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한다.

이런 지엽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의 큰 줄기는 분명하다.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고단한 노동자 생활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1970년 9월 자신이 실시한 노동실태 설문에 자신의 월급이 2만3000원이라고 적었는데 이것은 당시 화이트칼라 평균 수준이었다. 학교 교육도 거의 받지 못한 22세 청년의 월급으로는 대단한 수준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험난한 과정을 통해 중산층으로 도약을 꿈꾸게 마련이다.

바로 여기에 전태일의 위대함이 있다. 그는 이런 개인적인 기회를 포기하고 일반 노동자들의 어려운 처지를 주목했다. 즉 나 혼자 잘살기보다 다 함께 잘사는 사회를 염원했다. 한마디로 그의 위대함은 대동정신과 희생정신이다.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위해 분투노력하는 소시민이라면, 그는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위인이다.

오늘날 그의 정신을 계승했다고 자부하는 대표적인 집단이 민노총과 586 집권세력이다. 과연 그들은 그의 뜻을 올바르게 계승하고 있을까. 민노총은 다양한 노동계층과 수평적으로 연대하기보다 자신들만의 기득권 강화에 골몰하고 있다. 586 집권세력도 마찬가지다. 이미 기득권화된 그들은 전태일을 성역에 가둔 채 자신들만의 상징 자본으로 독점하려고 한다.

한편 전태일은 학생들의 머릿속에 위인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런 변화된 현실에서 여전히 전태일에 무심한 보수는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청계천에 전태일 입상을 세운 것은 서울시장 시절의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 나아가 ‘역사 바로 세우기’에 처음 나선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근래에 보수는 오히려 더 완고해졌다.

다른 많은 위인과 마찬가지로 전태일에 대한 시선 역시 아직은 다소 복잡하다. 그가 성역에 갇혀 독점되는 것도, 무관심이나 냉소의 대상이 되는 것도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그가 흔쾌하게 기려지는 것이 대한민국의 반듯한 모습일 것이다. 그런 날을 손꼽아 고대해 본다.

키워드

#지금 이 책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