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는 역사상 존경할 만한 위인이 적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인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위인도 재능과 업적을 제대로 알아보고 그것을 진심으로 기릴 줄 아는 풍토에서 배출된다. 과연 우리는 인물이 적다고 한탄할 만한 자격이 있을까.

이런 무거운 질문에 상당한 단서를 제공하는 인상적인 저술이 있다. 바로 조성관 작가의 ‘서울이 사랑한 천재들’(2020)이다. 저자는 그동안 세계 주요 도시를 돌아보며 ‘도시가 사랑한 천재들’ 시리즈를 아홉 권 펴낸 바 있다. 이번의 ‘서울이 사랑한 천재들’은 열 번째 책이자, 시리즈의 대미(大尾)다. 저자는 15년에 걸쳐 무려 열 권의 시리즈를 완성한 것이다.

저자는 천재들이 도시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살아가며, 어떤 재능을 발휘했는지를 열정적으로 파고들었다. 특히 빈, 프라하, 런던, 뉴욕, 파리 등을 직접 찾아가서 천재들의 발자취를 일일이 더듬었다. 이런 발품을 통해 탄생한 열 권의 시리즈는 전기(傳記)이자, 역사서이자, 지리서이자, 여행서다. 나아가 이런 모든 분야를 요량 있게 녹여 빚은 고품격 인문서다.

‘서울이 사랑한 천재들’은 시인 백석·윤동주, 화가 박수근, 경제인 이병철·정주영을 다룬다. 이 중에 백석은 다소 낯설다. 그가 재북(在北) 시인인 탓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광복 전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겨 ‘시인들의 시인’으로 불린 인물이다. 윤동주도 그의 시를 필사해서 읽었다. 또한 그의 고향 후배인 화가 이중섭도 그의 시에서 소(牛)의 모티브를 얻었다.

그는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로 당선되었다. 그는 어렵사리 일본 유학을 가서 영어교육을 전공했다. 귀국 후 서울 통의동에서 하숙을 하며 조선일보 기자로 활약했다. 그는 기자를 그만두고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갔다. 그때 마음에 둔 여자와 결혼이 무산되어 방황하다가, 기생인 ‘자야’와 만나 연인관계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 그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 주옥같은 시를 썼다.

그는 조선일보에 재입사했다. ‘자야’도 서울로 와서 한동안 동거했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자유의 땅 만주로 향했다. 광복이 되자 평양으로 돌아간 그는 오산학교 은사인 조만식의 통역을 맡았다. 조만식이 정치적으로 몰락하자, 그 역시 곤궁한 처지가 되었다. 그는 공산치하에서 시작(詩作)을 포기하고 번역에 매달렸다. 그러나 1958년 공산당은 그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그는 삼수갑산으로 갔다가, 아예 가족까지 불렀다. 거기서 1996년 사망했다.

훗날 자신이 백석의 연인 ‘자야’라고 고백하는 여인이 등장했다. 그녀는 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의 주인 김영한이다. 그녀는 대원각을 쾌척하여 길상사라는 절을 탄생시켰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천억원의 재물도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 절절한 마음이 오랜 망각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가 백석을 다시 만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윤동주는 만주 용정의 비교적 유복한 가정 출신이다. 그는 평생 그와 고락을 같이한 고종사촌 송몽규와 늘 함께했다. 그들은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 문과에 나란히 진학했다. 연희전문은 일제의 손길이 비교적 덜 미친 공간이었다. 민족의식이 강했고 분위기도 자유로웠다. 그에게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이때 그는 그의 시 대부분을 썼다.

그가 3학년 때 그는 신입생인 정병욱(나중에 서울대 교수)을 만나 형제처럼 지냈다. 졸업을 앞두고 시집 발간을 계획했으나, 돈이 없어 포기했다. 그때 필사본 1부를 정병욱에게 주었다. 졸업 후 동주와 몽규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1943년 여름에 두 사람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나란히 2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동주는 1945년 2월 옥사했다.

한편 그의 시집 필사본을 받은 정병욱은 학도병에 끌려가며 그것을 전남 광양의 고향집에 맡겼다. 그의 모친이 비단 보자기에 싸서 가보처럼 간수했다. 이로 인해 윤동주의 주옥같은 시는 그의 사후에 생생하게 살아났다. 정병욱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민족시인 윤동주’를 가슴에 담지 못했다. 그의 체취는 오늘날 연세대 교정과 서촌 하숙집 터 등에 남아 있다.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나왔을 뿐이다. 그럼에도 18세 때 조선미전에 입선했다. 그는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또한 그 흔한 동인회 활동을 한 적도 없다. 그는 오로지 홀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면 누구나 단박에 알아본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되지만, 그는 평생 가난에 시달렸다.

그는 천재이면서도 한없이 성실했다.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늘 노력했다. 춘천에서 결혼한 그는 그의 재능을 알아본 한 일본인의 호의로 평안도청에 일자리를 얻었다. 광복이 되자 처가 동네(오늘날 김화)로 내려와 미술교사를 했다. 그러나 당시 그곳은 38선 이북이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홀로 월남했다가, 뒤쫓아 내려온 가족과 서울에서 극적으로 상봉했다.

그의 집은 창신동이었고, 그의 일터는 미군 PX 초상화부(현재 신세계백화점)였다. 그는 사진을 스카프 등에 옮겨 그려주고 푼돈을 받았다. 그러면서 틈틈이 자신만의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가난한 신생국에서 그의 그림을 사줄 사람은 없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간간이 그의 그림을 사준 것은 주한 미국인들이었다. 그 덕에 식구들이 입에 풀칠을 했다.

그는 가난 속에서 예술혼을 불태우다가, 쉰두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향 양구에는 박수근미술관이 있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우리의 정서를 화폭에 담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바라보면 정겹고 푸근하다. 아내는 대학노트 160쪽에 ‘박수근 화백의 일생기’를 남겼다. 딸과 아들은 화가다. 또한 장손자도 화가다. 이렇게 그의 혼은 이어지고 있다.

사업가 이병철과 정주영은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그들은 ‘사농공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놀라운 통찰력과 용기로 ‘공상(工商)’의 반란을 이룩한 거인들이다. 그들이 뿌린 씨앗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10위 안팎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士)가 갑질을 일삼는 우리 사회 풍토에서 그들의 업적은 아직도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서울이 사랑한 천재들’을 다섯 명 추려 놓고 보니 놀랍게도 그들이 모두 1910년대생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격동기의 고난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각자 자기 분야에서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은 천재들이다. 서울은 그들을 자극했고 그들은 서울을 키웠다. 나아가 대한민국을 키웠다. 오늘날 그들이 없는 서울이나 대한민국은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다.

김영한은 어떤 재물도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일갈했다. 정병욱은 윤동주의 필사본을 보물처럼 간수했다. 주한 미국인들은 간간이 박수근의 그림을 사주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천재가 그의 재능을 제대로 알아주는 풍토에서 탄생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그러니 인물이 없다고 한탄만 할 일이 아니다. 그에 앞서 우리가 할 일이 많은 것이다.

우울한 연말이다. 떠들썩한 모임이나 여행도 어렵다. 이럴 때 ‘서울이 사랑한 천재들’이 이끄는 대로 그들의 체취가 진하게 밴 장소들을 고즈넉이 배회해 보는 것도 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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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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