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에는 음모가 아닌 것이 없을 지경이다. 특히 각종 음모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주로 집권 엘리트 및 그 주변 세력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선하다고 믿으며, 자신들의 선한 의도로 세상을 선하게 바꾸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얼핏 보면 음모론을 가장 멀리할 것 같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앞장서서 음모론을 제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답답한 물음에 환한 빛을 비춰주는 인상적인 연구가 있다. 바로 서강대 전상진 교수의 ‘음모론의 시대’(2014)이다. 이 책은 음모론이라는 난해한 주제를 명쾌하게 해부한다. 저자에 따르면, 격변은 혼란을 낳고 혼란은 음모론을 키운다. 무엇보다 음모론은 언론과 대중문화의 핫 아이템이다. 따라서 격변이 지속되고 언론과 대중문화가 힘을 발휘하는 현대는 음모론의 온상이다. 특히 이런 양상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삶의 기대와 현실 사이에는 늘 ‘간극’이 있게 마련이다. 이때 ‘간극’ 자체보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해서 우리는 답답하고 고통스럽다. 전통사회에서는 신정론(神正論)이 그 고통을 설명해 주었다. 즉 언젠가 신이 고통을 없애주거나 보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종교가 위력을 잃어버렸다. 그 자리에 즉각적인 혁명적 보상을 약속하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들어섰다. 곧이어 이데올로기마저도 불신당하고 말았다.

이제 ‘간극’을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할 것인가. 무엇보다 현대는 개인이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개인주의 시대다. 이로 인해 스스로 능력을 키우자는 자기계발론이 부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효과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이런 틈을 파고드는 것이 음모론이다. 그것은 ‘간극’의 원인이 음모라고 주장하여, 두려움과 분노를 음모집단에 배설하도록 한다.

이처럼 음모론은 기능 측면에서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같다. 이것들은 모두 ‘간극’을 설명해 주는 방식이다. 다만 신정론과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으로 공인된 이론인 반면, 음모론은 그렇지 못하다. 모두가 그 효능을 알아채고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점이 음모론의 ‘음습한’ 특징을 웅변하는 것이다.

음모론에는 권력자의 통치 음모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항 음모론도 있다. 약자, 피지배자, 아웃사이더도 저항이나 항의의 수단으로 음모론을 활용한다. 다만 목표와 방향이 다를 뿐이다. 전자가 현상유지를 꾀한다면, 후자는 현실타파를 겨냥한다. 전자에서 음모세력은 체제 전복 세력 또는 현실 불만 세력이다. 후자에서 음모세력은 체제 수호 세력이다.

그러나 두 음모론이 결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마디로 음모론은 현실적으로 채워지기 어려운 ‘간극’을 메워 주는 ‘상상의 해결책’이다. 이런 쓸모와 매력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더욱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다. 특히 현실적인 해결책이 없거나, 공공영역이 ‘텅 비어’ 해결책이 논의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기득권 세력은 이런 틈새를 파고든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민’의 편임을 설득하고, 체제에 대한 서민의 불만과 분노를 반대 세력에 향하게 한다. 즉 통치 음모론과 저항 음모론을 교묘하게 결합시킨다. 이럴 경우 기득권자를 향해야 할 민초들의 반란은 되레 그들을 돕게 된다. 그 대신에 ‘애꿎은’ 집단과 자기 자신을 조준, 파괴하고 만다. 특히 이런 음모론을 악용하는 것이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다.

정치전략으로서 음모론은 지지자를 동원하는 수단이자 정적을 비난하는 수단이다. 그것은 스스로 희생자를 자처해 지지자를 일체화시키고, 적을 악마로 만들어 전선을 구축한다. 이러한 ‘희생자 되기’와 ‘악마 만들기’는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또한 음모론은 정당한 비판을 회피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것은 비판자를 음모론자로 몰아 비판의 정당성을 훼손시킨다.

한편 오늘날 우리는 예견과 예방이 가능한 문명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불행한 일이 닥치면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무책임한 누군가의 잘못이거나, 악의에 찬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은 아닌가. 자기 잘못을 숨기거나, 그것으로 이익을 챙긴 자들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처럼 예견과 예방 가능성에 대한 신념은 역설적으로 음모론을 부추긴다.

음모론은 희생자의 순수함과 가해자의 사악함을 동시에 설명한다. 예견하고 예방할 수 있었던 사건과 사고로 피해를 입은 희생자에게는 보상과 복수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건과 사고를 만들어낸 가해자에게는 치죄의 사유가 부과된다. 고통의 원인인 가해자는 악마다. ‘악마 만들기’는 지지자 결집의 동력이 된다. 그래서 ‘희생자 되기’가 제공하는 전략적 특권과 ‘악마 만들기’가 북돋는 투쟁의지는 모든 정치집단을 유혹한다.

음모론은 당장은 달콤해도 그 대가는 파괴적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정파 간의 경쟁과 투쟁을 넘어 전쟁을 초래한다. 타협과 협력은 허물고 적대감과 혐오만 키운다. 그런 극렬한 대치 상태에서는 도리어 감시와 견제가 작동하지 않는다.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모든 기준은 내 편이냐 네 편이냐에 따라 규정된다. 이처럼 음모론은 민주주의를 뿌리째 망가뜨린다.

당연히 기회주의자들이 음모론을 선호한다. 그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멀리 나아간다. 그는 막스 베버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불러온다. ‘신념윤리’란 선한 동기에 집중하는 태도다. 그런 윤리에 골몰하는 사람들은 선한 동기가 반드시 선한 결과를 가져오며, 자신도 선량한 존재라고 확신한다.

그런 사람들은 현실의 비합리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과가 나쁘게 흐르면 어딘가로 책임을 돌리려고 한다. 이런 성향은 음모론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더구나 이런 들뜬 신념윤리와 기회주의가 뒤섞이면 음모론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이미 6년 전에 요즘 우리 사회의 혼란상을 정확하게 예견한 저자의 식견이 놀라울 따름이다.

음모론은 한마디로 ‘올바른’ 질문에 대한 ‘잘못된’ 답변이다. 실제로 음모론이 제기하는 질문 자체는 타당하다. 즉 그것은 으레 던져 볼 만한 의혹이다. 관건은 그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아 사람들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음모론은 진지하게 답을 찾기보다 감정을 폭발시켜 버린다. 그리하여 올바른 답이 도리어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

그렇다면 음모론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저자는 그 처방으로 ‘책임윤리’를 제안한다. 그것은 “선한 동기에서도 나쁜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상정하는 태도다. 그런 윤리에 충실한 사람들은 자신도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결과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지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자세로 모든 질문에 대해 올바른 답을 모색하며 신뢰를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

엄중한 현실 속에서 ‘착한’ 의도와 ‘좋은’ 결과는 반드시 상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베버는 정치인에게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겸비 또는 균형을 주문했다. 하지만 요즘 집권 엘리트들은 책임윤리를 외면하고 신념윤리에 함몰되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선한’ 의도가 관철되지 않으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음모론이 봇물을 이루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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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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