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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8호] 202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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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 순례]경허스님과 전봉준의 사연이 깃든 마이산의 고금당

글·사진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2021-03-11 오전 11:29:37

▲ ‘조계산 호랑이’라고 불리던 대종사 활안 스님이 친필로 쓴 ‘고금당’ 현판.
도를 닦기에 가장 적합한 터는 어떤 곳인가? 답은 바위굴이다. 이는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적용된다. 그리스의 아테네에 가면 파르테논신전이 있다. 파르테논신전 터도 범상하지 않다. 동양의 풍수전문가가 보기에는 회룡고조(回龍顧祖)의 명당이다. 용이 내려오다가 고개를 휙 돌려서 자기가 출발했던 지점을 쳐다보는 형국을 가리킨다. 판델리산에서 용이 오다가 한 번 방향을 꺾어서 바다를 향해 내달리다 중간에 멈춰 선 지점이 리카베투스 언덕이다. 리카베투스 언덕에는 바위들이 솟아 있다. 아테네 시내를 전부 볼 수 있는 전망대이고 그 앞으로는 파르테논신전도 보인다. 리카베투스 언덕에 솟아난 바위는 용의 등줄기를 나타낸다. 용은 더 달려가서 파르테논신전 터에 멈춘다. 이 터는 바위로 된 언덕이다. 기가 뭉쳐 있었다.
   
   기원전 5세기에 건립된 대리석의 파르테논신전 건물은 그 용의 대가리에다 왕관을 씌운 셈이다. 용의 머리 위에 건축물을 세운 것이다. 고대 아테네는 이 신전 터의 에너지로 영발을 받았고, 여기에서 주요한 신탁을 받았다. 이 신전 바위 언덕의 아래에는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을 때 갇혀 있었다는 동굴이 있다. 지금은 철조망이 쳐져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고대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던 수행터였다. 아마도 파르테논신전 건축물이 세워지기 전에는 아래쪽의 동굴에서 도사들이 명상을 하고 신에 대한 헌신을 새기던 장소였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다가 이것이 후대에 들어서면서 소크라테스대에 와서는 감옥으로 사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스에서도 고대에는 거대한 바위 암반 옆의 동굴이 수행터로 적합하였던 것이다.
   
   
   동서양 도사들이 바위동굴을 찾아든 까닭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가 보아도 바위산의 동굴에서 도를 닦았다. 터키의 카파도키아도 대표적인 암굴 사원이다. 페르시아문명, 지금의 이란에 가 보아도 산의 동굴에서 도사들이 도를 닦은 유적들이 즐비하다. 페르시아제국을 다스렸던 역대 제왕들의 묘도 모두 바위산을 뚫어서 서랍처럼 만들어 놓고 그 속에다가 왕의 시신을 집어넣었다. 요르단의 페트라도 그런 경우이다. 페트라 주변에는 영화 ‘인디애나존스’에 나오는 바위동굴 무덤들이 있다. 제왕들이 여기에 묻혀 있지만 원래는 도사들이 도를 닦던 곳이다. 도를 닦던 영험한 터들이 제왕의 무덤으로 변한 것이다. 인도의 아잔타석굴, 엘로라석굴은 나중에 대규모로 개발된 석굴들이다. 처음에는 몇 명의 도사가 있다가 이게 소문나니까 아예 권력자들이 대규모로 굴을 판 경우이다.
   
   중국의 서악에 해당하는 화산(華山)도 온통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험한 바위산인데, 여기 절벽의 중간중간에 역대 도교의 도사들이 파놓은 동굴들이 수십 개가 있다. 줄사다리를 타고 동굴에 올라가서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한다. 줄사다리를 걷어올려 버리면 외부인은 이 동굴에 접근할 수 없는 구조이다. 숭산 소림사에도 가 보면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대사가 처음에 수행했던 달마동굴이 있다. 여기도 역시 천연 바위동굴이다.
   
   자연동굴의 이점은 무엇인가? 우선 건축비가 들지 않는다. 그리고 바위동굴은 사방에서 바위 기운이 내리쬐기 때문에 압력밥솥에 들어간 것처럼 기운이 뭉쳐 있다. 수행은 자연으로부터의 기운을 받아야만 유체이탈과 삼매가 가능하다. 바위동굴은 추위와 더위를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다. 관건은 물이다. 주변에 먹을 수 있는 물이 나와야 한다.
   
   전북 진안군의 마이산에 있는 고금당(古金堂)은 고대의 동굴 법당에서 출발하였다. 마이산은 독특한 형태의 산이다. 두 개의 봉우리가 마치 말의 귀처럼 뾰쪽 솟아 있는 모습이 기이하다. 바위도 화강암이 아니고 자갈과 화산재가 오랜 세월에 걸쳐 뭉쳐서 천연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변한 지질구조이다. 바위산의 해발 550m 지점에 천연 바위동굴이 서너 개 있다. 이 중에서 제일 큰 동굴을 천상굴(天上窟)이라고 부른다. 공중에 높이 솟아 있는 바위절벽 중간에 굴이 있기 때문이다. 접근하기도 쉽지 않은 지점이다.
   
   이 동굴에서 고려 말의 고승이었던 나옹대사가 도를 닦았다고 한다. 나옹대사는 ‘토굴가(土窟歌)’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청산림 깊은 골에 일개토굴(一間土窟) 지어 놓고 송문(松門)을 반개(半開)하고 석경(石經)에 배회하니… 풍경도 좋거니와 물색이 더욱 좋다’는 내용의 ‘토굴가’는 유명하다. 이 ‘토굴가’를 지은 현장이 어디인가? 유력한 후보지가 바로 고금당의 천상굴이다. 토굴가에 묘사된 주변 환경이 거의 부합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천연 콘크리트 암반 중간에 굴이 있고, 굴 위에는 바위가 반석처럼 되어 있다. 반석에서 앞을 바라다보면 마이산의 두 개 봉우리(아버지봉·어머니봉) 중 어머니봉에 해당하는 봉우리가 앞에 우뚝 솟아 있다. 어머니봉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고금당 터를 향해 쏘아주고 있는 형국이다.
   
   앞산에 뭐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앞산이 어떻게 생겼느냐에 따라 그 터에서 발생하는 묘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말의 귀같이 솟아난 두 개의 봉우리가 유명해서 붙은 이름이 마이산(馬耳山)이다. 거대한 암봉이 이처럼 두 개가 솟아 있는 모습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 이곳 마이산의 기이한 풍경이다. 이 두 개의 바위 봉우리 중에서 암마이산의 봉우리를 정면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망 포인트가 바로 고금당이다. 어머니봉은 모양이 튼실한 문필봉으로 볼 수도 있다.
   
   문필봉으로 볼 것 같으면 대학승이나 대학자가 거처하기에 좋은 곳이 된다. 볏단을 쌓아 놓은 노적봉으로 볼 수도 있다. 노적봉은 먹을 것으로 본다. 아니면 암마이봉을 장군들이 머리에 쓰는 투구로 볼 수 있다. 투구봉으로 본다면 고금당 터는 장군이 살기에 적당한 터이다. 봉황의 머리로 볼 수도 있다. 산봉우리가 약간 둥그런 듯하면서 거대한 것은 봉황의 머리로 간주한다. 이처럼 고금당에서 암마이봉을 바라다보면 문필봉, 노적봉, 투구봉, 봉황봉이라는 4가지 형태로 보인다. 그만큼 이 터가 영지라는 이야기다.
   
   
▲ 마이산의 고금당은 암마이봉이 가장 잘 보이는 전망 포인트이다.

   경허선사와의 인연
   
   고려 말의 나옹대사가 머무르기 훨씬 전부터 이 터는 유명했다. 서기 600년대 중반에 고구려의 보덕화상이 백제로 망명을 하였다. 당시 고구려에는 도교가 세력을 잡았다. 연개소문이 도교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반발한 고구려 불교계의 수장이 보덕화상이다. 보덕화상은 백제 지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해서 전주 인근의 고달산에다 새로운 터를 잡았다. 고구려에서 나르듯이 옮겨 왔다고 해서 이름도 비래방장(飛來方丈)이다.
   
   고구려의 고승 보덕화상이 고달산으로 망명해서 비래방장을 지었고, 비래방장을 기점으로 주변 100리 안에 8개의 사찰을 짓는다. 그 8개의 사찰, 암자 가운데 첫 번째 사찰이 금동사(金洞寺)이다. 금동사가 시대가 흐르면서 ‘금당사(金堂寺)’로 이름이 변했고, 금동사의 제일 처음 시작은 천상굴, 나옹굴로 알려진 바위절벽의 자연동굴이다. 이 자연동굴이 있는 지점에 붙인 이름이 고금당(古金堂)이다. ‘금당사가 시작된 터’라는 의미이다.
   
   17세기 후반에 유현재(猶賢齋) 조구상(趙龜祥·1645~1712)이라는 인물이 나옹굴에 대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고금당 아래 산허리 춤에 석벽이 있는데 높이는 100여척이다. 그 중앙은 갈라져 굴이 되었다. 나무사다리를 통해 올라서면 굴속에 두 칸의 집이 있고, 단청이 벗겨져 어느 때에 지은 것인지 알 길이 없다. 한 칸은 방이고 방에는 사면 벽에 창문이 있으며 모두가 자연스러워 조탁한 것 같지가 않다. 한 칸은 처마의 집인데, 사람의 힘으로 세워져 있다.… 이 석굴은 기이한 절경이 가히 호남에서 으뜸이다.”
   
   고금당에서 주목해야 할 결정적 대목은 경허선사(鏡虛禪師·1849~1912)와의 인연이다. 경허는 이 고금당과 고금당 아래에 있는 금당사에 자주 들렀다. 구한말에서 왜정 초기까지의 험난한 시대를 살다간 경허선사가 고금당에 자주 왔었다. 왜 여기를 왔는가? 바로 전봉준(1855~1895)의 딸 전옥련을 피신시키기 위해서였다. 1894년 동학군은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고, 전봉준은 체포된다. 도망다니던 동학군들은 일본군과 조선관군의 합동 추적대에 의해서 이 잡듯이 체포당하고 사형당한다. 처절한 색출이었다. 대역적이 된 전봉준의 일가친척들도 잡히면 무조건 사살당하는 상황이었다. 전봉준의 딸 전옥련도 마찬가지였다. 경허선사가 전봉준의 딸을 살리기 위해 심산유곡으로 도망길에 오른다. 처음에는 김제 모악산의 금산사 미륵전에 숨겨 놓았다가, 금산사도 위험하다고 여기고 밤으로만 산길을 걸어서 마이산 금당사 고금당에 숨겨 놓는다. 1894년 10월에 여기로 숨어들어와서 만 8년간 머무르다가 27세에 옆동네로 시집을 갈 때까지 숨어 있는다. 전옥련이 18세에 들어와서 27세까지 머물렀던 아지트였다.
   
   
▲ 마이산 해발 550m 지점에 위치한 천연 바위동굴인 천상굴 내부.

   경허와 동학군 대장 전봉준
   
   그렇다면 왜 도를 통한 당대의 고승이자 스타 도인이었던 경허선사가 18세의 여자를 데리고 이 깊은 산중의 오지 절까지 왔는가? 이유는 전옥련이 경허의 조카딸이었기 때문이다. 조카딸? 경허의 여동생이 전봉준의 부인이었다. 여동생의 딸이었던 전옥련을 외숙이었던 경허가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당시에 가장 오지이고 비밀스러운 장소였던 이곳으로 피신시킨 것이다. 어떻게 해서 경허가 동학군 대장 전봉준과 인척관계가 된단 말인가? 이건 굉장한 사건이다.
   
   근래에 전봉준과 경허의 관계를 밝혀낸 인물이 홍현지(65) 박사이다. 수년 동안 미친 듯이 이 관계를 추적하여 밝혀냈고 결과물을 박사논문으로 정리하였다. 나는 홍 박사로부터 둘 사이의 관계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경허의 고향은 현재 전북 완주군 봉동읍 구암리이다. 이 동네에 거북바위라고 불리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의 정기를 받고 경허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동네에서 전봉준의 아버지도 같이 살았다. 경허와 전봉준의 아버지는 친구 사이였다. 그래서 두 사람의 자식들도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경허의 여동생이 전봉준에게 시집을 갔다. 시집갈 때 신랑 측에 보내는 여러 가지 문서를 경허가 친필로 써 주었다. 경허 아버지는 경허가 8세 때 일찍 죽었기 때문에 여동생이 시집갈 때 오빠인 경허가 친정아버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경허보다 6살 연하인 전봉준은 동학 봉기 이전부터 여러 가지 인생 문제를 손위 처남이자 집안 형님 같은 경허에게 상의하고 의지하였다. 홍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처음에 전봉준은 동학군을 일으키는 데 주저하였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다. 죽음 앞에서 누가 주저하지 않겠는가. 주저하는 전봉준에게 ‘나가라’고 용기를 준 사람이 경허이다. 이 내용이 경허의 편지에 남아 있다. 아울러 동학군이 처음 기병하는 지점을 전남 무안군의 공산에서 시작하라고 구체적인 장소까지도 경허가 편지로 알려 주었다. 이처럼 밀접한 관계였으니 동학군이 우금치에서 패배하자 조카딸을 살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당연하다.
   
   경허와 평소 인연이 있었던 마이산 금당사의 주지 김대완 스님에게 전옥련을 맡겨 놓는다. 당시 마이산은 아주 깊숙한 오지였다. 전옥련은 여기에 숨어 살면서 성씨도 김씨로 행세한다. 추적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변성명을 하는 것은 당시에 흔한 일이었다. 김대완 스님은 전옥련을 수양딸로 삼고 8년간 보호하다가 옆동네 남자에게 시집을 보낸다. 전봉준과 처남 매부지간인 경허도 당연히 위태로웠다. 잡히면 죽었다. 경허도 도망다녀야만 했던 것이다. 그 살벌한 시기에 경허는 섬으로 숨었다. 전라북도 서해안의 섬 가운데 하나인 비안도에 숨어 살았다. 고군산군도에 속한다. 현재는 군산시의 옥도면이다. 비안도에서 약초나 캐고 밥 굶어가면서 숨어 있다가 1년에 한두 번씩 조카딸이 잘 있는가를 살피기 위해서 마이산 금당사에 왔다고 한다. 이 시절에 고금당 나옹굴에 들러서 참선도 하고 바위 위에서 청산을 둘러보며 쓴 시가 전해진다. 제목은 ‘청산을 희롱하고(自弄靑山)’이다.
   
   ‘산은 절로 푸르고 물도 절로 푸른데(山自靑水自綠), 맑은 바람 솔솔 불고 흰구름 두둥실 흘러가네(淸風拂白雲歸). 하루종일 반석에서 놀아 본다(盡日遊盤石上). 내가 세상을 버렸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我舍世更何希)’.
   
   조카딸을 시집 보내고 나서 경허는 이북의 삼수갑산으로 가서 숨어 살기로 결심하는 것 같다. ‘왜 경허가 삼수갑산으로 갔는가?’는 수수께끼였다. 홍 박사의 연구를 보니까 경허는 전봉준의 처남이자 의지하는 집안 형님이었고, 인생 문제를 상의했던 멘토였다. 아울러 일급 수배범이기도 하였다. 혈육 전옥련을 결혼시키고 나니까 한반도의 궁벽진 오지인 삼수갑산에 가서 승복도 벗고 서당 훈장 노릇하면서 숨어 살기로 결심한 셈이다.
   
   지난 20년간 폐허로 있던 나옹굴을 정비하고 법당을 지은 스님은 성호(性虎·64)스님이다. 아주 의지가 굳은 스님이다. 이렇게 기가 센 터에 불사를 하고 터를 지킨다는 것은 어지간한 강골 스님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스님 태몽이 어떻게 됩니까?” “어머니 꿈에 가사장삼을 입은 스님이 한 손에는 주장자, 한 손에는 두루말이 경전을 쥐었고, 머리에는 무장들이 쓰는 투구를 쓰고 있었답니다.” 투구를 쓴 스님이 태몽이니까 이렇게 센 터를 누르면서 사는 것 같다. 선승으로 유명했던 활안(活眼)스님 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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